마침내 5개월, 기나긴 꿈에서 깨어났다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20> 다시 돌아오는 길
이제 다시 일상인데, 아니 일상이 어떤 거였지?
집중하지 않아도 들리는 한국어가 귓가에 윙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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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아이레스를 뜨던 날도 역시 언제나처럼 날씨는 화창하고 기온은 높았다. 오랜만에 등에는 20kg이 넘는 배낭을, 앞으로는 또 작은 배낭을, 옆구리엔 잼베를 끼고 숙소를 나왔다.

 
약 반년 동안의 여행을 마무리할 마지막 일정이 남아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라파스를 경유해 쿠스코로 가는 것. 남미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코카샵의 코카차와 코카브라우니를 먹을 수 있고 맨발로 돌아다니는 와이키들을 볼 수 있다. 쿠스코의 높은 공기를 마실 수 있고 돌길을 걸어 다닐 수 있다.
  

나이를 알게 되면 알게 모르게 질서가 잡힌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던 도시들에게 나 진짜 간다고, 잘 있으라고 인사하고 싶었다. 당시 쿠스코에서는 폭우로 인해 사망자가 나오고 관광객들이 억류되고 길도 유실되는 등 수많은 피해가 잇따랐다. 게다가 마추피추로 가는 길마저 유실되어 다시 복구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관광수익으로 먹고사는 쿠스코인 만큼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재정 적자가 엄청나다는 뉴스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쿠스코로 통하는 도로도 온전한 곳이 없어 육로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정보까지 있었다. 관광객이 없는 쿠스코라, 도무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어쨌거나 비행기는 쿠스코를 향해 떠났다. 쿠스코보다 이전에 가장 사랑했던 도시인 라파스에 도착하는데, 라파스에서는 약 10시간 정도 다음 비행기를 위해 대기해야 했다. 밤 12시부터 다음날 7시 반까지 라파스의 공항에서 꼼짝없이 노숙을 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다시 한 번 그곳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비행기는 산타크루즈를 경유하는 라파스행 비행기였다. 도대체 경유를 몇 번 하는 건지. 게다가 볼리비아의 공항은 도착하면 한번 출입국심사를 받고 나갔다가 공항세를 지불하고는 다시 들어와야 한다. 바로 환승이 되지 않는다.

 
뭐 어쨌든 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산타크루즈 공항에 내려서 출입국심사를 받고 있는데, 내 앞에 세 명의 같은 또래로 보이는 일본인들이 있었다. 대기시간 동안 심심하던 차에 말을 걸었다. 우리는 같은 비행기를 타야했고 같은 호랑이띠였다. 일본의 대학생은 휴학 없이 스트레이트로 졸업하는 게 지극히 보통이다. 이들은 입사 전의 한동안 찾아오지 못할 장기 휴일을 보낼 곳으로 남미를 택했다. 다른 곳도 아닌 남미에 온 것은 ‘가장 멀어서’란다.

 
어쨌거나 동갑인 우린 만나자마자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몸이 있는 곳은 남미이지만 사고방식은 동양이다. 언뜻 매우 개방적으로 보이는 여행자들이라도 일단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다. 나이를 알게 되면 그때부터 알게 모르게 질서가 잡힌다. 그 위계질서가 좋은 것만도, 그렇다고 항상 나쁜 것만도 아니다, 동전에는 양면이 있듯.
 

남자 둘과 눈이 마주쳤다, 딱 나와 같은 신세다
 

약 세 시간의 대기시간과 한두 시간 정도의 짧은 비행시간을 보내고 라파스 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라파스의 엘알토 공항을 보고 느낀 점은 “헐” 이 한마디. 그 다음으로, 이게 한 나라를 대표하는 공항이라고? 라는 것이었다. 너무, 너무 허름하다. 하지만 이내 공항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새겨진 조각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태양의 문에 새겨져 있는 귀엽고도 우스꽝스러운 티와나쿠 유적의 문양이었다. 그 문양이 새겨진 곳의 밑으로 들어가 또 한 번의 출입국심사를 받았다.

 
세 명의 일본 친구들은 바로 예약해둔 숙소의 관리인이 픽업을 나와 떠났고, 나는 짐을 찾아 적당히 하루 노숙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엘알토 공항의 내부는 외관보다야 훨씬 그럴싸했지만 그럼에도 내가 잘 수 있을 만큼 안전해 보이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딱 한 군데 있다면 화장실이었다. 그래도 아직 화장실에서 잘 만큼의 능력치는 아닌가보다. 심각하게 고려해봤지만 혼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다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공항 벤치에는 이미 피곤해 보이는 현지인들이 다리를 뻗고 팔짱을 낀 채로 만사가 귀찮은 듯 잠들어 있었다. 그 조금 옆에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여행자 둘이 배낭을 깔고 앉아 조금 언성을 높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금 말쑥한 차림의 남자와 등산매니아 같은 차림의 남자 둘이었다. 딱 봐도 그들도 나와 같은 신세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다가갔다. 이 공항에서 혼자 노숙을 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뭉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미국인이라는 그들도 역시 이 공항에서 아침까지 기다려야 했고 노숙할 수 있는 적당한 공간을 찾으려던 참이었다.

 
볼리비아의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는 남미의 대표적 반미주의자이다. 그는 공공연하게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다. 그래서 미국 국적인 사람들은 볼리비아 땅을 밟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 여행을 하면서 만난 몇몇 미국 친구들은 그런 이유로 볼리비아를 포기하거나 아예 처음부터 루트에 넣지 않았다. 당연히 볼리비아에는 미국 사람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볼리비아에서 미국인을 만나면 조금은 신기했다. 거금을 지불하고서까지 자신들에게 그렇게 적대적인 볼리비아에 와서 어떤 인상을 받고 가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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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열면 바로 야외인 흡연실에 침낭 깔았지만…
 

어쨌거나 그 둘과 함께 침낭을 깔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엘알토 공항은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이나 다른 나라 대도시의 국제공항 같이 복잡한 구조가 아니라 마치 2D 같은 구조이다. 다른 곳에 비해 너무나도 평면적인 볼리비아 수도의 국제공항엔 그만큼 안전하게 잘 만한 곳도 없었다. 처음엔 안쪽의 대기실 같은 곳이 적당해 보여 그곳에 자리를 잡으려 했지만 청소부가 여기는 청소를 해야 하는 곳이니 침낭을 깔면 안 된다고 했다.

 
결국 공항 관계자로 보이는 자가 노숙을 하려면 여기서 하는 게 좋다며 흡연실 안으로 우릴 몰아넣었다. 흡연실이라 해도 도대체 왜 만들어놓은 지 모르는 곳이었다. 공항에서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티켓팅 오피스는 공항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문에서 5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고, 흡연실은 창문이 달린 방 하나를 만들어놓은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그냥 문 밖으로 나가서 피우면 되는 것이었다. 흡연실은 노숙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노숙을 하려면 최소한의 안전성은 보장돼야 하는데 정말 ‘아무나’가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 하나만 넘으면 그냥 바로 야외 주차장이었고 공항 건물 입구였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빵으로 거뭇거뭇 수가 놓이고 가죽이 찢겨 노란 스폰지로 된 속살이 멋대로 드러난 소파 위에 침낭을 깔았다. 나머지 두 사람은 바닥에 침낭을 깔았는데 언제 누가 들어와서 우릴 덮쳐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저 성선설을 믿으며 볼리비아 사람들의 선량함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으잉? 이게 뭐야, 비행기 일정이 이틀 뒤로 바뀌었단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몇 시간 후에 조금 말쑥한 차림을 한 사람은 비행기 시간이 빨라 먼저 떠났다. 나는 등산매니아와 둘이 남았는데, 그는 갑자기 나에게 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왔다. 그때 나는 갑자기 이 친구가 대화를 끌어내기 위해 약간은 무거운 질문을 던지는구나 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신에 대해 열심히 말해주었다.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가 신이라 칭하는 존재들은 인간들이 권력을 위해 만들어 낸 것이며, 신이 진짜 있다고 치면 나는 그런 위대한 존재가 아닌 우리 삶에 깃들어 있는 모든 것이라 생각한다고.

 
그러자 그 친구, 갑자기 자신은 신을 만나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종교관과 자신이 믿는 신에 대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하는데 표정을 보니 몇 시간 전에 처음 알게 된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정치와 종교 얘기는 국적을 불문하고 쉽게 하면 안 되는 이야 구나, 하고.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종교 이야기 속에서 나는 도대체 이 화제를 어떻게 돌려야 하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타이밍만 재고 있었다. 덕분에 자는 동안 도둑맞을 걱정을 덜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영어로 종교 이야기를 듣는 건 리스닝 테스트를 하는 것보다 더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다행이 그 친구의 비행기는 나보다 이른 시간에 있었고, 자신의 접신(?) 경험을 쓴 소책자를 주며 이걸로 너는 영어 공부도 할 수 있다며 떠났다.

 
나도 침낭을 접고 슬슬 체크인을 하기 위해 로비에서 안내 방송이 나오길 대기하고 있었다. 비행기 시간 약 3시간 전부터 전광판에 편명이 뜨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 두 시간이 지나도 내가 탈 비행기의 편명은 뜨지 않았다. 아무리 둔하고 낙천적인 나라도 뭔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티켓팅을 위해 잔뜩 늘어진 사람줄 뒤꽁무니에 쫄랑쫄랑 매달려 내 차례를 기다렸다. 프린팅한 전자 티켓과 여권을 꺼내들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데스크의 직원에게 물어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내 비행기의 일정이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으잉?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 진한 눈 화장을 한 직원은 메일이 갔을 거라며 바뀐 나의 비행기 일정을 프린트해서 주었다. 비행기는 이틀 후로 바뀌어 있었다. 어처구니는 없었지만 화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 때 그 숙소로 돌아가니 익숙한 그들이 반겼다
 

그대로 나는 짐을 짊어지고 라파스 시내로 향했다. 익숙한 라파스의 공기 맛이 느껴졌다. 내가 곧장 달려간 곳은 라파스에 돌아갈 때마다 묵었던 푹 꺼진 침대의 그 숙소였다. 군대에서 오랜만에 휴가 나온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 마냥 가슴이 뛰었다. 너무나 익숙한 오르막길을 올라 늘 사무치던 익숙한 녹색 문 옆의 벨을 눌렀다.

 
불친절하지만 익숙한 종업원이 ‘너 또왔냐?’ 라고 말하는 듯한 미미한 웃음을 띠고 문을 열어주었다. 푸근한 청소부 아주머니가 날 보며 입을 반쯤 벌려 웃어주고는 얼싸 안았다. 항상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같이 이야기하던 꼬마 종업원도 꽉 안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두세 개 정도밖에 남지 않은 앞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지배인 몰래 숙객들에게 마리화나나 코카인 등의 마약을 팔던 호세 아저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침대가 15개 정도 놓인 커다란 방의 한 침대가 내 차지가 되었다. 누리끼리한 벽에는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빼곡히 낙서가 되어있고 간간히 태극기나 한국어도 보였다. 그곳은 여전히 돈은 없지만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아지트였다. 여전히 한쪽에선 서커스를, 한쪽에선 음악 연주를, 한쪽에선 팔찌를 땋고 있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머리카락이 배수구에 잔뜩 끼어 있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퀴퀴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푹 꺼진 침대에 빠져들었다.

 
그 후로 몇 시간이 지났는지, 권태롭게 눈꺼풀을 올려보니 이미 방은 창문을 열어두어도 가녀린 한 줄의 빛만 남기고 어둠에게 삼켜진 상태였다. 다시 눈을 감고 베개에 머리칼을 부볐다. 손가락 끝으로 이불을 잡고 손목에 감았다 풀었다 뒤척이다가 결국은 배가 고파서 일어났다.

 
아무렇게나 연주하고 아무렇게나 춤추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반쯤 뜬 눈으로 귀찮은 듯 조리를 질질 끌며 익숙한 길을 걸었다. 숙소 바로 앞 구멍가게의 할머니도, 매일 아침을 해결하던 키오스크의 아주머니와 아들도 불빛을 밝히며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언제 돌아와도 여전했다. 공사를 하던 곳은 공사 진행을 하는지 마는지 그대로였다. 라파스의 한국 식당에 가서 언제 먹어도 맛있는 김치찌개를 시켰다. 역시나 반가운 주인 아주머니가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냐고 물어왔다. 저번에 왔을 땐 홀쭉했는데 통통해지니 좋아 보인다고. 아르헨티나에서 먹어댄 수많은 아이스크림과 고기들은 나를 퉁퉁하게 살찌웠다.

 
배를 채우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 보니 숙객 중에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전부터 계속 이 숙소를 지키고 있는 백발의 브라질리언은 날 보며 큰 눈을 더욱 크게 뜨고 헤이! 라며 인사했다. 하도 싸구려 코카인을 많이 해 약간 정신이 나간 듯한 페루 친구도 아직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백발의 브라질 아저씨는 옥상에서 다 같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으니 와서 함께 즐기자며 나를 초대했다.

 
이곳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언제나 야경을 보며 아무렇게나 음악을 연주하고 그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음악은 항상 라파스의 밤하늘에 퍼지곤 했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의 구성은 달라졌을지라도, 그 풍경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나는 북을 치고 내 옆에서는 탬버린을 치고 그 옆에서는 기타를 치고 또 그 옆에서는 말린 과일로 만든 악기를 흔들어댔다. 손에 악기가 없는 친구들은 노래를 불렀다. 불친절한 종업원이 시끄럽다고 화를 내며 올라오기 전까지 우리는 몇 병의 맥주와 싸구려 럼주에 취해 눈꼬리를 늘어트린 채 싱글벙글 그 제멋대로인 음악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밤 나이트 끈적끈적한 그, 이런 미친!
 

라파스에서의 진짜 마지막 밤에는 숙소 친구들과 함께 근처의 나이트에 갔다. 20명 이상 단체로 떼지어 작은 지하 클럽을 점령해 버리고선 춤을 추었는데, 나는 피곤하기도 했고 내일이면 떠날 생각에 조금 우울해져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몇몇 친구들이 와서 날 일으켜 세우며 억지로 춤을 추게 했다.

 
하는 수 없이 대충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는데 웬 자그만 체형의 청년 하나가 내 앞으로 오더니 열심히 부비적거리는 게 아닌가. 인상 팍 쓰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 싶어서 그냥 대충 같이 춤춰주다가 벽 쪽의 소파로 가니 그 청년도 쫄래쫄래 따라왔다. 욕망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미친 듯이 응시하는 그는 시인을 꿈꾼다는 칠레 청년이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의 말들 듣자 어려서 엄마 손을 잡고 영화관에 가서 본 일 포스티노의 영상이 뇌리를 스쳐갔다. 그 청년은 함께 춤을 추고 싶다며 날 일으켜 세웠다. 눈으로 날 씹어 먹을 기세였다. 여행기가 점점 야설이 되어가고 있지만 아무튼.

 
그런 열정적인 남미 청년이었는데, 자기 방에 자신이 쓴 시가 있다며, 그걸 꼭 보여주고 싶다고 같이 가자고 했다. 이런 미친. 미안하지만 나는 그 시를 읽어도 스페인어를 잘 몰라서 이해를 못할 거라고 완곡한 거절의 표현을 했는데 역시 완곡한 표현은 씨알도 안 먹히나 보다. 계속 자작시드립을 치는 그를 뒤로 한 채 피곤하다는 친구 한 명과 택시를 타고 숙소로 먼저 돌아왔다. 이젠 정말 마지막이다. 푹 꺼진 침대에서 잠드는 것도, 라파스의 차가운 밤공기를 마시는 것도.

 
라파스를 떠나는 날엔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늦잠을 자서 비행기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정신없이 짐을 꾸리고는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갔다. 공항에서 티켓팅을 하고는 출국심사를 받는데 비자 없이 볼리비아에 체류한 것으로 되어 문제가 발생했다. 그 긴 줄을 몇 십 분 동안 기다렸는데 다시 벌금을 위한 돈을 뽑기 위해 ATM을 찾아 나서야 했다. 허둥지둥 돈을 뽑아 360볼리비아노(약 60~70달러) 라는 거금을 벌금으로 내고서야 겨우 비행기에 탈 수 있었다. 아니 그럼 진작 말해주던가…. 정말 이놈의 나라는 멋대로 비행기표도 바꿔버리고 벌금까지 내라 한다! 볼리비아는 정말이지 더럽게도 불친절한 나라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불친절한 볼리비아는 나의 남미 여행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안데스 산맥을 넘으며 왜 그리도 눈이 시린지
 

비행기는 안데스산맥 위로 날았다. 산맥이 높아서인지 비행기는 그리 높게 나는 것 같지 않았다. 구름보다 더 높이 치솟은 안데스는 내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울퉁불퉁 솟아오른 안데스의 모습을 사이 사이의 크고 작은 호수들이 담았다. 그 호수에는 푸른 하늘도 담겨 있었다.

 
하얀 만년설 밑으로 보이는 짙은 감색의 산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괜스레 콧등이 시큰해졌다. 왜 그리도 마음을 시리게 하는지. 어쩌면 진짜 여행다운 여행을 시작한 쿠스코로, 어쩌면 진짜 여행의 마지막이었을 수도 있는 라파스에서 날아가고 있다. 이젠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니 몇 달간의 추억들이 영상이 되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한 장 한 장 그리움이라는 따듯한 빛이 더해져 애틋해졌다. 저쯤이 영화 <얼라이브>에 나오는 산쯤 될까? 지금 날고 있는 여긴 코파카바나 근처겠지? 아, 저기 티티카카가 보인다. 갑자기 눈물이 봇물 터지듯 와르르 흘러내렸다. 창 밖의 웅장한 풍경들이 번져 보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또 울어젖혔는지 모르겠다. 여행의 끝에 선 나는 너무나도 감상적이었고 조그만 자극에도 금방 눈물이 쏟아졌다. 나와 함께 여행 한 친구들은 이미 여행을 끝내고 다시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겠지.

 
떠나야 하는걸 알면서도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은, 정말이지 여행의 끝은 실연과도 같았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아니 일상이 어떤 거였지? 그나저나 도둑맞은 지갑에 들어있던 카드들이랑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다 재발급 받아야 하는데. 여행과의 이별이 슬퍼 흐느끼는 중에도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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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달라져 있었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았다
 

눈물 콧물 다 짜내고 정신을 가다듬으니 쿠스코에 도착했다. 쿠스코에서도 익숙한 숙소를 찾았고, 친절한 주인은 고맙게도 날 기억해주고 있었다. 그 숙소는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예약하기가 힘든 곳이었는데도 방은 텅텅 비어서 4인실을 나 혼자 쓰게 되었다. 폭우로 인해 마추피추로 가는 길이 유실되고 쿠스코를 찾는 관광객이 급감했다는 게 정말인가 보다.

 
항상 관광객들로 득실대던 아르마스광장에 가보아도 광장을 가득 채운 햇살이 무색할 만큼 텅 비어 있었다. 쿠스코는 너무나 조용했다. 광장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두 명씩은 꼭 보이던 맨발의 와이키들도 온데간데 없었다. 늘 왁자지껄 흥이 넘치던 쿠스코였는데 참 차분도 하다.

 
어쨌거나 쿠스코에 왔으니 코카샵의 브라우니와 코카티를 마셔야 했다. 키를 낮춰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코카샵의 주인인 크리스토는 1초 동안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고, 바로 날 얼싸안으며 우스꽝스러운 발음으로 안뇽하세요? 라고 인사했다. 쿠스코를 떠나 지금까지 여행한 이야기와 그동안 쿠스코는 어땠는지 간단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여행길에 만난 사람들에게 코카샵을 추천해주곤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 소개로 코카샵엘 다녀갔나 보다. 요즘엔 쿠스코 자체에 사람이 너무 없어 장사도 안 된다고 한다. 거리를 보니 관광객 상대로 하는 가게 중 반은 열고 반은 닫혀 있었다.

 
쿠스코를 맨발로 활보하던 와이키들의 행방을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노 투리스타스, 노 와이키스(no turistas, no waykys)”였다. 기껏해야 겨우 세 달 정도 전인데 내 기억 속의 쿠스코와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침착한 쿠스코는 익숙하진 않았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았다. 쿠스코에서의 2박3일 동안 나는 그저 거리를 걷고, 공예품 시장에서 선물을 사고, 숙소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책을 읽고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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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의 자연은 항상 이런 식, 그저 감탄할 수밖에
 

쿠스코에서 리마로, 리마에서 LA행 비행기를 타면 남미와는 정말 안녕이다. 마지막 버스여행이 될 쿠스코-리마구간의 티켓을 사고는 지금까지 그렇게 울어댔던 게 연기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담담하게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안데스 산자락을 달렸다. 쿠스코 시내를 벗어나니 폭우로 인해 주저앉은 도로가 뼈를 드러내고는 나뒹굴어 있었다. 버스는 그 도로 옆으로 낸 임시 도로 위를 달렸다. 뱅글뱅글 산길을 돌며 올라가는 버스는 구름을 뚫고 달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와 구름 속에서도 안데스의 버스운전수들은 능수능란하게 핸들을 돌렸다.

 
한참을 구름 속에서 달리다가 점차 지대가 낮아지면 커다란 꽃이 활짝 피어 있는 바나나나무가 잎을 늘어뜨린 채 이곳저곳 서 있는 정글지대가 나타난다. 푸르름이 우거지고 드문드문 보이는 원주민들의 옷가지는 얇지만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만년설을 두른 안데스가 내려다보고 있다. 항상 이런 식이다, 남미의 자연은. 그저 감탄하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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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마에는 무사히 도착했고, 리마에서의 짧은 여정도 마라쿠야 주스를 왕창 사다 마시거나 열대과일을 배 터지도록 먹는 것으로 보냈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또 갈아타고 내려 보니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스튜어디스들은 캐리어를 끌며 삼삼오오 무리지어 걸어갔고, 집중하지 않아도 들리는 한국어는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마침내 기나긴 꿈에서 깬 것이다.
 
글 사진 황라연

 
P2.jpg ◈ 황라연=호랑이띠. 이름인 라연을 굴려서 발음하면 Lion. 온순하나 속은 맹수와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음.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함. 한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섬에 청승 떨러 감. 좋아하는 섬은 관매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학교에 거저 먹기라는 특례로 입학.(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했음)

 새내기 때 “학고 한번 맞아줘야 간지”, “시험기간에 먹는 술은 꿀맛” 등의 고학번 선배들의 유혹에 넘어가 평점 0.15를 기록. 그 뒤론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 촛불집회 때 미친듯이 시위하느라 성적 말아먹고 정치에 눈뜨게 됨. 2007년엔 인도로 떠났고 2009년엔 남미로 떠났음. 2010년 여름방학에는 유럽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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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떠났나
2.
콜롬비아-남미에서의 첫 식사
3.에콰도르-거지가 된 사연
4.
페루①-가방은 털렸어도
5.
페루②-첫 히치하이킹
6.페루③-드디어 아마존
7.
페루④-정글속 대도시
8.페루⑤-숙제같은 마추피추
9.볼리비아①-무지개가 떴다
10.볼리비아②-에보 모랄레스(선거일 풍경)
11.볼리비아③-사하마의 트럭운전수
12.볼리비아④-체 게바라와 고양이
13.볼리비아⑤-크리스마스,그리고 새해
14.볼리비아⑥-신음하는 은광
15.칠레-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16.아르헨티나①-죽음보다 더 한 더위
17.아르헨티나②-그냥 가서 보시라
18.아르헨티나③-어, 민가협이?
19.아르헨티나④-여기에도 스위스가?
20.버스는 구름을 타고
21. 혼자, 진짜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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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