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한밤 날강도, 겁없이 ‘선빵’을 날렸다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4>가방은 털렸어도
“훠킹 쉣 £∞¡яЩð&€÷≠※ð?!!”…그냥 갔다
 외계인과 교신하고 신의 계시로 만났다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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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의 키토로 돌아간 뒤, 일행 중 한 명이지만 키토에 남은 친구와 다시 일행이 되었다. 일단은 그 친구의 통장으로 부모님께 송금을 부탁하고, 페루로 떠나기 전까지 키토에서 쉬기로 했다. 한번은 키토의 뉴타운에서 유학생 친구들과 만났다. 자정을 지나서까지 마시고 놀았다. 금요일 밤이라 꽤나 밝고 사람도 많았지만, 숙소로 돌아오던 중 뒤에서 흑인 남자와 현지인이 우리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 채고 발걸음을 서둘렀으나, 그들은 앞길을 가로막고 돈을 요구했다. 으악, 키토의 치안이 나쁘다더니 올 것이 왔구나! 난 주고 싶어도 한 푼도 없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고 멍하니 있었을 때 갑자기 친구가 영어로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아시아인=이소룡…태권도복 든 가방 훔쳤다가 ‘줄행랑’ 전설도

 
 “훠킹 쉣 ※£∞¡яЩ?ðð€?÷≠※ð???!!!!!!!!!!!!!!!!!!!!!!”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내 앞에 벌어지는 풍경들이 슬로우모션처럼 펼쳐졌지만, 그들은 그냥 그렇게 갔다. 아, 다행이다.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라곤 병을 깨뜨린 것밖에 없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두 가지이다. 순순히 가진 것을 주거나, 먼저 ‘선빵’을 때리는 것. 여행을 하면서 들은 얘기 중 하나는, 남미 쪽 사람들은 ‘아시아인=이소룡’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다들 무술을 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가방을 도둑맞았는데, 가방 속 태권도복을 본 도둑이 지레 겁먹고 가방을 놓고 튀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총기를 소유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후자는 정말 위험하다. 실제로 자원봉사하러 온 미국인 친구가 하루에 두 번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번은 소매치기, 또 한 번은 권총강도. 그 친구의 무모한(?) 행동에 우린 결국 아무 일도 없었지만,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다.
 
어쨌든, 우리는 먼저 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정든 키토를 등지고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키토에서 페루 국경을 넘기 위해선 다시 남하해야 하는데, 죽어도 로하는 다시 가고 싶지 않아 쿠엔카로 밤차를 타고 가서 쿠엔카에서 후아퀴야스 라는 국경도시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후아퀴야스까지 가는 도중에 차장이 “파사 포르테(여권)” 라고 하며 에콰도르 출입국 사무소에 내려준다. 그곳에서 내려 출국심사를 받고 후아퀴야스까지 간 뒤 또 버스장류장에서 페루쪽으로 가는 봉고차(콜렉티보 혹은 미니부스 라고 하여,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의 대중교통수단이다) 를 타고 국경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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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들이 세운 해변도시에서 만난 자유와 웃음의 선물
 
국경을 넘어 우리는 일단 ‘만코라‘라고 하는 해변도시에 가기로 했다. 판아메리카나 고속도로를 달리는 콜렉티보 안에서, 옆에 앉은 아르헨티나 청년과 안되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청년도 역시 만코라에 가는 중이라고 해 일단 숙소 등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도착한 만코라는 바다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작은 도시였다. 그 아르헨티나 청년을 따라간 숙소에는 방이 없어서, 바로 그 앞의 숙소에서 묵기로 했다. 일단 짐을 풀어놓고 한숨 잔 뒤에 마을 산책에 나섰다.
 
만코라는 히피들이 세운 도시라 한다. 길거리엔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히피스러운 이들이 직접 만든 팔찌나 악세사리 등을 팔고 있었다. 마을 광장에서는 아프리카 북인 잠베를 두드리고, 서커스를 하고, 팔찌를 만들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들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도 가끔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했기에 나도 신발을 벗어 던져버렸다. 어쩌다 보니 광장에서 그 일당들과 이야기를 하며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메이카의 라스타파리안교를 믿는 사람들로, 길게 드레드한 머리가 맨발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삶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 같았다. 라스타파리안교도들을 예수를 흑인으로 보며 성지를 예루살렘이 아닌 이디오피아라고 주장한다. 레게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친 종교로 밥말리 또한 이 라스타파리안교 신자였다. 이들의 특징은 드레드-레게머리를 하고 마리화나를 흡입하는 것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미 사람들이 그렇듯, 모든 이들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오고 마음까지 웃는 얼굴로 모르는 사람에게도 인사를 하는 그 모습에 나도 같이 웃으며 인사했다. 자유를 사랑하고, 자연과 교류한다는 그들에게서 나는 웃음과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을 선물 받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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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에프오 어쩌고 저쩌고…아무래도 좋다, 밥줬으니까

 
만코라에서 갈 수 있는 해변 중에 ‘푼타 살’이라는 해변이 있다. 이것 또한 만코라의 해변을 방황하며 악세사리 등을 관광객들에게 판매하는 히피들에게 얻은 정보로, 그 해변에는 사람이 없어 바다를 보기에 아주 좋다고 했다. 만코라에서 택시로 한 30분 정도에 위치한 그 해변은, 옆 마을 만코라에 비해 관광객의 발길이 뜸한 조용한 해변이었다. 해변에 앉아 바다를 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백발에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우리에게 다가와 영어를 할 줄 아느냐 물었다. 
 
그 사람은 샤머니즘을 공부하고 있다는 페루인 제리였다. 어젯밤 꿈에 나를 만날 것이라고 하는 신의 계시가 있었다고 한다.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해변을 걷다보니, 내가 있었다고 한다. 제리는 우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빵과 밥을 주었다. 공짜로! 어찌나 맛있던지, 그냥 밥과 빵, 토마토샐러드밖에 없었지만, 나는 무슨 3일 굶은 아귀처럼 입에 쑤셔넣기 바빴다. 10년 동안 미국에 살면서 갖은 일터를 전전했다는 제리는 영어가 매우 유창하고, 그의 아들은 태권도를 한다며 우리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제리는 자신이 우주인과 교류한다 했고, 유에프오의 존재를 믿는다고 했다. 어젯밤에도 아야와스카 (아마존 정글식물로 만든 환각제로, 나중에 자세히 쓰게 될 것이다)를 마시고 우주인이 자기 옆에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상식으로는 조금 맛이 간 사람처럼 보이지만, 투명한 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제리는 괜찮다면 자신의 집에서 자고가라 했지만, 이미 그날 밤 9시에 트루히요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니 어디선가 이상한 막대기 두 개를 꺼내와 선물이라고 나에게 쥐어주었다. 아야와스카라고 쓰인 그 나무막대기 두 개는 샌달우드로 만든, 샤먼이 의식을 행할 때 쓰는 일종의 악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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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짜고짜로 그쪽 여자들은 못 생겼다는 등 폭언 소나기

 
다음날 아침 트루히요에 도착해서는 바로 먼저 간 일행들이 있는 와라스행 표를 샀다. 시간이 남아 트루히요의 유명한 잉카시대 이전 유적인 찬찬을 보러 가기로 했다. 콜렉티보를 타고 가며 옆에 앉은 페루 여인과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에콰도르를 거쳐 왔다고 하니 에콰도르 여자들은 못생겼다며 에콰도르를 향한 폭언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모든 남미 국가들이 그렇듯, 국경을 마주한 나라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다. 특히 영토분쟁 탓으로 페루와 에콰도르, 칠레와 볼리비아는 서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유명하다. 물론 나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 여인이 말해준 대로 내렸지만, 어디에도 유적지에 대한 표시는 없었다. 눈앞에는 황량한 사막 같은 대지가 펼쳐져 있고, 흙벽돌로 만든 거대한 뭔가가 이곳저곳 있기는 한데 트루히요 시내에서 들고 온 팸플릿과는 크게 다른 풍경이었고, 매표소도 없었다. 일단은 걸어보자, 뭔가 나오겠지 라는 마음으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으나 한 시간이 넘어도 발굴 작업이 한창인 터만 보일 뿐, 태양의 피라미드, 달의 피라미드 등의 유적은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일단은 몇 시간이나 안쪽으로 걸어온 터…. 그대로 바다나 보고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 페루여인은 우리가 에콰도르에서 왔다고 골탕먹인 건가!
 
 
돌고 돈다, 만남 뒤엔 이별 있고 잃은 것 있으면 얻는 것 있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던 중, 넓은 토마토 밭이 나타나고, 농부 둘이 토마토를 수확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내가 카메라에 담자, 농부는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고, 토마토에 둘러싸인 채 우리에게도 갓 딴 토마토를 주었다. 너무나도 배가 고파 가져갔던 피넛버터를 손으로 다 퍼먹어 속이 메스껍던 나에게는 정말 단비와도 같은 선물이었다. 두 농부는 나에게 오노 요코 라는 별명을 지어주고, 요코에게 열 개가 넘는 토마토를 선물해주었다. 더 가져가라는데 더 이상 담을 곳이 없어 인사를 하고 다시 바다로 향했다.
 
이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때묻지 않은 친절을 베풀 수 있을까. 남미의 태양을 흠뻑 머금은 토마토를 한입 깨물면서,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따듯함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따듯한 물을 담은 물풍선이 심장에서 툭 터지는 것과 같이, 그 따듯함과 친절이 서서히 몸 전체로 퍼지는 듯했다. 나는 에콰도르에서 내 돈과 귀중품을 다 도둑맞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이 사람들을 만나 그 따듯한 마음을 선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도둑맞아서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사적으로 지킬 돈이 없으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사람들에게 진짜 웃음으로 대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돌고 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 또한 있다. 이렇게 당연한 이치를 왜 한국의 일상생활에서는 항상 잊고 살아가는 것일까. 나는 돈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큰 자유와 꾸밈없는 모습을 얻게 되었다. 덤으로 현지인들에게 받은 여러 가지 선물까지.
 
글·사진 황라연


 
P2.jpg ◈ 황라연=호랑이띠. 이름인 라연을 굴려서 발음하면 Lion. 온순하나 속은 맹수와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음.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함. 한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섬에 청승 떨러 감. 좋아하는 섬은 관매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학교에 거저 먹기라는 특례로 입학.(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했음)

 새내기 때 “학고 한번 맞아줘야 간지”, “시험기간에 먹는 술은 꿀맛” 등의 고학번 선배들의 유혹에 넘어가 평점 0.15를 기록. 그 뒤론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 촛불집회 때 미친듯이 시위하느라 성적 말아먹고 정치에 눈뜨게 됨. 2007년엔 인도로 떠났고 2009년엔 남미로 떠났음. 다음은 아프리카로 갈 예정이지만 일단 졸업은 해야겠다는 현실에 타협하여 방학동안 유럽이나 다녀올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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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떠났나
2.콜롬비아-남미에서의 첫 식사
3.에콰도르-거지가 된 사연

4.페루①-가방은 털렸어도
5.페루②-첫 히치하이킹
6.페루③-드디어 아마존
7.페루④-정글속 대도시
8.페루⑤-숙제같은 마추피추
9.볼리비아①-무지개가 떴다
10.볼리비아②-에보 모랄레스
11.볼리비아③-사하마의 트럭운전수
12.볼리비아④-체 게바라와 고양이
13.볼리비아⑤-크리스마스,그리고 새해
14.볼리비아⑥-신음하는 은광
15.칠레-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16.아르헨티나①-죽음보다 더 한 더위
17.아르헨티나②-그냥 가서 보시라
18.아르헨티나③-어, 민가협이?
19.아르헨티나④-여기에도 스위스가?
20.버스는 구름을 타고
21. 혼자, 진짜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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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