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지금을 위해 일단 간다, 쥐뿔도 모르고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1> 왜?
  체 게바라·파타고니아·아마존이 유혹
  한 표 차로 져서 ‘정치적 망명’ 핑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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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살면서 가장 많이 듣거나 또 많이 하는 질문이 아닐까. 사람들은 항상 어떤 일에 대한 원인이나 동기, 그리고 그 후의 결과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혹은 자신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다지 남에게 호기심이 없는 나로서는 왜 그렇게 나에게는 “왜?”라는 질문을 많이 던지는지 모르겠다. 아, 지금도 “왜”라고 묻고 있다. 
  
  밥은? 살려고. 돈은? 살려고. 여행은? 글쎄, 이것도?
 
 한국 생활에서도 많이 듣던 이 질문은, 여행을 떠나서도 끊임이 없다. 계속해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는 여행길에선 이 “왜”라는 물음의 답으로 상대를 파악하고 교류와 교감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나를 주위에서 봐왔던 사람들도 내가 남미에 가겠다고 하니 ‘유럽이나 가까운 동남아 등을 놔두고 왜 하필이면 남미냐’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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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6.jpg 하물며 날 아는 사람들도 그러는데 처음 만난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나. ‘왜 여행을 하느냐’에서부터 ‘왜 남미냐, 왜 혼자냐’ 등등. 대체로 비슷한 대답이 나올 텐데 굳이 그런 뻔한 질문들을 한다.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과 만날 때마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물어보면 성실하게 대답하고 나도 똑같이 되돌려 줘야 할 것 같은 타인에 의한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지만….
 나는 이런 질문을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만 들을 줄 알았는데 여행 중에 더더욱 많이 들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끝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설명해야 되는 일이 꽤나 많다. 약간은 귀찮은 작업이다. 한 얘기를 계속 똑같이 해야 하니까. 그래서 조금은 다행이다, 이렇게 글을 쓰게 되어서. 이제부터는 ‘왜 남미냐, 왜 여행 하냐, 여행 얘기 들려달라’는 사람들한테 살짝 링크나 걸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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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은 왜 먹지? 살려고. 돈은 왜 벌지? 살려고. 여행은 왜 하지? 글쎄, 이것도 살려고 한다고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여행에 “내가 살아가는 이유” 뭐 이런 손발이 오그라드는 말귀 같은 것은 갖다 붙이기도 쑥스럽다. 그렇다고 딱히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처음엔 “이제 곧 졸업이라는 것을 눈앞에 두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혼자 떠나 찬찬히 생각해 보고 싶다”는 명분으로 이번 여행을 계획했던 것 같다. 다녀와 보니 생각은 개뿔, 5개월 동안 탱자탱자 놀면서 살이나 덕지덕지 쪄오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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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찾아 떠나는’  따위의 제목은 개나 줘버리고
 
 현실도피라고 생각한 적도 적지 않다. 취업을 위해 어학연수를 가고, 열심히 토익성적을 올리고, 각종 자격증과 공모전, 인턴을 하는 주위 사람들을 보며 노력하기 싫어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 싫어서 일단 피하고 보자는 일종의 도피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이것은 우선순위의 문제인 것 같다.
 다른 이들이 미래의 안도감을 위해 투자할 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후회 없이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남들과 얘기를 해 보면 여행을 떠나고 싶지만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그렇다고 내가 시간과 여유가 남들보다 넘쳐나서 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선순위가 다른 것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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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번 여행은 꽤나 고민해서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토익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취직할 마음은 없었지만 왠지 해야 될 것 같아서. 그런데 과 학생회장 선거에 나갔는데 쪽팔리게도 한 표 차이로 져서, 정치적 망명(?)을 위해 떠나게 된 것이다. 눈 감으면 인도 배낭여행 시절의 추억이 아른거려 잠을 설치기도 했고. 한번 떠난 사람은 계속 떠나게 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가 보다. 수많은 사회적 규제에 억눌려 티격태격 날마다 싸우듯 살아가다 잠시의 일탈에서 느끼는 그 자유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쾌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역시 중독이고 일탈이다.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도피한다고 해도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러나 그냥 난 지금을 위해 여행을 계획 한 것일 뿐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따위의 제목은 개나 줘버리고 그냥 놀고 싶은 영혼임을 인정하자. 물론 여행을 하며 얻게 되는 것들은 구태여 인식하려 애쓰지 않아도 많다. 이런 건 차차 이야기하도록 하고, ‘왜 남미냐’라는 물음에는 사람마다 늘어놓을 수 있는 대답들이 다르다. 
 
  그저 등산복 메이커인 줄로만 알았는데 가슴이 철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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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미, 꽤나 멀다. 아니 무진장 멀다 -_-;; 그런데 그렇게 한국에서 먼 곳임에도, 한국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특히 여자 혼자 배낭여행을 온 사람들이 많아 조금 놀랐다. 나는 이런 당찬 여자가 나밖에 없을 줄 알고 은근 영웅심리 같은 게 있었는데 웬걸. 그래도 남미에 오게 된 이유가 같은 여인들은 한 번도 못 만난 것 같아 왠지 모르게 뿌듯하다ㅋㅋ 다들 마추피추 등을 얘기하거나, 그냥이라고 답하는데, 그냥이라는 대답은 가장 정확한(?) 답이기도 하지만 질문자를 김빠지게 만드는 대답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야심차게 대답하는 남미에 오게 된 이유는 “체 게바라”다. 그렇다, 체 게바라가 날 남미로 이끈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대답을 하면서 나는 꼭 내가 입고 있는 체 게바라 셔츠를 보여준다. 쌩뚱맞은 대답과 ‘개그스러운’ 티셔츠에 포복절도한 칠레 여자아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21살 때 체 게바라 자서전과 평전,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읽고 당시 타고 다니던 스쿠터로 대한민국 일주를 계획(했으나 무산) 할 정도의 ‘빠순이스러움’이 있었다. 그래, 일단 동기는 체 게바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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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로 날 이끈 것은 파타고니아다. 나는 2007년 겨울 즈음까지 파타고니아는 그저 등산복 메이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 브랜드의 옷을 좋아하기도 했고.(하지만 비싸서 못 샀다) 그러던 중, 알바를 하러 간 모 방송국 외부제작업체의 사무실 벽에 크게 걸려있는 캔디바 색깔의 빙하 사진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사진 밑에는 ‘patagonia’라고 적혀 있었다. 이건 가야해! 마음속에서 울부짖었다. 일년 내내 강풍이 휘몰아 치는 땅 파타고니아, 이런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디스커버리 채널이나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단골손님인 아마존까지. 체 게바라와 파타고니아, 아마존이 내가 남미행을 생각하고 결정하게 만든 이유이자 여행의 포인트가 되었다.
  일단 가자. 스페인어도 쥐뿔도 모르고 영어실력도 의심스럽지만, 일단 배낭이나 싸고 보자. 돈이 없으면 벌어 쓰면 되고 말을 못하면 말을 하게 되면 되지!
 글·사진 황라연
 
P2.jpg ◈ 황라연=호랑이띠. 이름인 라연을 굴려서 발음하면 Lion. 온순하나 속은 맹수와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음.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함. 한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섬에 청승 떨러 감. 좋아하는 섬은 관매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학교에 거저 먹기라는 특례로 입학.(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했음)

 새내기 때 “학고 한번 맞아줘야 간지”, “시험기간에 먹는 술은 꿀맛” 등의 고학번 선배들의 유혹에 넘어가 평점 0.15를 기록. 그 뒤론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 촛불집회 때 미친듯이 시위하느라 성적 말아먹고 정치에 눈뜨게 됨. 2007년엔 인도로 떠났고 2009년엔 남미로 떠났음. 다음은 아프리카로 갈 예정이지만 일단 졸업은 해야겠다는 현실에 타협하여 방학동안 유럽이나 다녀올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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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