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산 가난한 광부, 광산 관광 부끄러웠다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14화> 신음하는 은광
광부 평균 수명 40살…14살 꼬마까지 ‘곡괭이’
그건 그거고 여행은 여행, 밤새 놀며 새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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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스를 떠나 다시 남쪽으로 향했다. 다음 행선지는 볼리비아 헌법상의 수도, 수크레였다. 원래 일정은 수크레를 거쳐 포토시로 가는 것이었는데, 체크아웃을 하고 짐을 싸들고 버스터미널에 갔더니 수크레로 가는 버스가 없단다! 이럴 수가. 지금까지 예약 없이 다녀서 예약이라는 개념이 뇌 안에 없던 나에게 새로운 개념이 ‘퐁!’ 하고 솟아나는 순간이었다.
 

함부로 하얀 궁둥이 발랑 깔 수도 없고…
 
다음날 버스를 예약하고 하루 더 라파스에 있을 수도 있었지만 벌써 라파스에서만 3주 넘게 있어서 일단 어디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포토시로 가는 버스가 있어서 바로 탔는데, 일처리를 허둥지둥하다 보니 푯값을 덤터기 썼다. 보통 45볼리비아노 이하인 라파스-포토시 구간의 버스를 무려 75볼리비아노를 내고 탄 것이다. 어느 정도 남미 여행에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해 긴장을 풀고 있는 사이에 또 당했다.


투덜대며 뒤로 젖혀지지도 않는 의자에 앉아 옆자리 원주민 아저씨의 씻지 않아 풍기는 시큼한 냄새를 맡으며 가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화장실이 급해 부스스 눈을 뜨고는 언제쯤 버스를 세워 주려나 초조한 마음으로 목을 길게 빼고 앞을 보고 있었다. 새벽 4시께, 새로 지은 듯 불빛이 번쩍이는 터미널에 도착했다. 일단 화장실부터 가야겠다 싶어 터미널에 냉큼 들어갔다.

하지만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화장실 문은 죄다 잠겨있었다. 터미널을 왔다 갔다, 1층에서 2층까지 다 둘러보았지만 열려있는 화장실이라곤 단 한군데도 없었다. 화장실이 해결되면 터미널에서 침낭을 깔고 자다가 슬슬 도심으로 가려 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어 택시를 타고 방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상방뇨 할 곳이 없나 두리번거리기도 했지만 아무리 급해도 다 큰 처녀가 아마존도 아니고 허연 궁둥이를 발랑 깔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택시를 타고는 일단 메인광장으로 가달라고 했다. 차가운 새벽공기를 맞으며 본 창밖 풍경은 너무나도 휑해서 공기를 더욱 싸늘하게 만들었다. 고만고만한 낮은 건물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빈 건물, 벽에 붙은 오래된 포스터들. 볼리비아의 도시들이 어딘들 그렇지 않겠냐만, 포토시 만큼은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야말로 버려진 도시였다. 포토시는 걸어만 다녀도 숨이 턱턱 막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도시 (4,090m) 라는 수식어 외에 한 가지 수식어가 더 있다. 남아메리카 착취의 상징적인 도시, 그곳이 바로 포토시이다.
 

3세기에 걸친 식민지 약탈…은 바닥 나 썰물의 도시로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걸친 서구 침략자(보통은 정복자라고 하지만 나는 침략자라 하고싶다) 들의 무자비한 약탈과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행위는 이곳 포토시에서도 예외 없이 이루어졌다. 포토시가 식민지하 약탈과 착취의 대명사가 된 것은, 불행하게도 포토시의 상징과도 같은 산, 바로 “cerro rico(부유한 산)“ 이 있기 때문이었다.


포토시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멀리 보이는, 원만한 라인으로 완벽한 삼각형을 그리는 우뚝 솟은 붉은 산, 그것이 바로 cerro rico 이다. 그 부유한 산은 16세기에 은맥이 발견 된 뒤, 아메리카 대륙 최대의 은 생산지로서 식민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정확한 수치는 나와 있지 않지만, 3세기에 걸친 약탈의 결과 포토시 광산에서 캐낸 은은 4만 톤이 넘고, 당시 은은 아메리카 광물 수출량의 99% 정도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포토시 이름의 유래 또한 원주민 언어로 굉음을 뜻하고, 그것은 광물을 망치로 쳤을 때의 소리라고도 한다. 은맥의 발견 이후, 포토시는 은을 손에 넣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대도시를 형성하게 되었고, 1650년대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포토시의 인구는 16만 명에 달했으며, 밤낮으로 파티가 열리는 부유한 대도시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의 포토시는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하고 쓸쓸한 도시가 되었다. 개미굴처럼 이리저리 구멍이 뚫린 부유한 산에서 150년 동안 은을 죽어라고 파낸 결과,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은도 거의 바닥나고 인구 또한 6분의 1로 감소했다고 한다. 내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남미 여행에서 돌아와 뒤늦게 남아메리카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책을 찾아본 후의 일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포토시는 나에게 더더욱 의미 있는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몰랐던 것이 더 다행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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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찾은 유스호스텔, 그곳마저 묵묵부답

 
아무튼, 일단은 화장실이 문제였다. 라파스에서 받은 간단한 정보만을 손에 쥐고 숙소를 찾아 헤맸건만 택시기사는 내가 가려던 숙소의 위치를 알지 못했다. 택시에 타고 광장 주변을 빙빙 돌며 경찰에게 물어봐도 숙소는 보이지 않았다. 일단은 스스로 찾아보려고 내렸다. 무거운 짐을 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새로운 도시에서 숙소를 찾는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원래 가려던 숙소를 포기하고 광장 주변을 배회하며 숙소란 숙소 문은 다 두드려 봐도 돌아오는 건 방이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가까스로 발견한 유스호스텔은 종을 울려봤지만 안에는 사람이 없는지 묵묵부답이었다. 문이 열려 있기에 살며시 들어가 보니 바로 화장실이 있었다! 얼씨구나 하며 짐을 내려놓고 드디어 문제를 해결했다. 정말이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나이 24살에 멀쩡한 정신으로 실례할 뻔했다.


그렇게 화장실에서 나오니 다시 힘이 불끈 솟아 원래 가려던 숙소를 한 번만 더 찾기로 했다. 그 숙소에 그렇게 집착한 건 라파스의 지인이 꼭 가라고 추천해 준 숙소라 왠지 가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배낭을 앞뒤로 메고 북까지 들고 씩씩하게 걷다가 조금 지쳐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마침 이른 아침 가게 문을 여는 아주머니가 날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기회를 놓칠 새라 숙소를 아냐고 물었더니, 그 천사 같은 여인은 나에게 정말 자세히 숙소의 위치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닌가!


덕분에 나는 그 숙소를 찾게 되었다.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아직 방이 나지 않아 짐만 내려놓고 12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고 9시쯤 되어서 시내를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작은 광장을 주변으로 관광객 취향의 작은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 지금까지도 많이 봐온 풍경이었다. 타 도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곳곳에 광산투어 상품을 파는 여행사들이 들어서 있다는 점이었을까.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포토시에 오면 광산투어를 한다. 나 또한 포토시에는 광산 투어를 하러 온 것이었기에, 여행사가 보이는 대로 들어가 설명을 듣고 가격 흥정을 했다. 이곳저곳 둘러본 끝에, 가장 싼 가격을 불렀던 곳에서 예약을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짐을 옮긴 뒤 라파스에서 사온 한국라면을 끓여먹고는 행복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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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0시간 중노동, 배고픔 잊기 위해 코카잎 씹어
 
광산투어는 4시쯤 여행사 앞에 모이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같이 투어를 하게 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아르헨티나 친구들이었는데, 당시 아르헨티나 대학생들의 방학이 시작되어 볼리비아 관광지는 아르헨티노들이 점령한 상태였다. 수많은 아르헨티노들과 독일인 한 명, 페루인 한 명, 영국 부부, 그리고 나를 태우고 봉고차는 구불구불한 길을 달려가다 어느 집 앞에서 멈췄다. 그 집에서 우리는 광부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는 헬멧을 썼다.


그렇게 멋진 차림으로 가이드는 우리를 어느 상점으로 데려가 음료수 몇 병과 코카잎, 90도짜리 알콜, 그리고 다이너마이트를 만들 재료를 사게 했다. 음료수와 코카잎은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에게 선물 할 것이었다. 광부들은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광산에서 일하면서 배고픔을 잊기 위해 코카잎을 씹는다. 코카잎은 그들에게 필수품임과 동시에 신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평소 코카차를 자주 끓여먹어서 대량의 코카잎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따로 사지는 않고 내가 가지고 있던 코카잎 중 절반을 가져갔다. 코카잎과 함께 생강과 레몬을 넣고 끓인 특제 코카차를 병에 싸들고 광산에 갔다. 코카잎은 그냥 씹으면 너무 쓰기 때문에 이렇게 차를 끓여 설탕을 넣어서 자주 마셨다. 그 덕분인지 나는 한 번도 고산병 증세에 시달린 적이 없다.

 
내가 간 광산은 cerro rico가 아닌, 저 멀리 cerro rico가 보이는 다른 광산이었다. 광산 입구에 도착해서 아르헨티나그룹과 영어 가이드그룹으로 나뉘었는데, 내가 속한 영어 가이드그룹은 영국 부부와 나, 이렇게 세 사람뿐이었다. 단란한 우리 그룹은 아르헨티나 그룹보다 먼저 광산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밑바닥이 질척이는 광산으로 들어가니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공기가 탁했다. 가이드는 영어로 우리에게 광산의 역사, 규모 등에 대해 설명해 줬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도 예전엔 그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였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지금은 가이드 일만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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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끓인 특제 코카차 주니 비로소 온기 도는 눈길
 
광산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평균 수명은 40살이라고 한다. 매캐한 공기, 굶주림을 이겨가며 폐광이나 마찬가지인 그곳에서 제국들이 훑고 간 광물 부스러기들을 캐내기 위해 하루에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는 것이다. 개미집처럼 패인 길을 따라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며 일하고 있는 광부들을 만날 때마다 가이드는 음료수와 코카잎을 주며 “이 친구들이 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아직 앳된 얼굴의 광부들은 그럴 때마다 우리 쪽을 힐끔 보며 건조한 표정으로 그저 고맙다는 한마디만 할 뿐이었다. 이상하게 나는 그런 가이드의 행동과 그 상황에 왠지 모를 수치심을 느꼈다. 그저 포토시라는, 은광투어로 유명한 곳에 와서 남들 다 하는 ‘관광’을 하고 있을 뿐인데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저 그들보다 여유롭게 산다는 이유만으로 돈을 지불하고 투어상품을 사서는 음료수나 코카잎 나부랭이를 그들에게 선심을 베푸는 척 주고 있는 내 꼴이란. 타인의 삶에 지나친 동정심을 갖는 것 자체가 오만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들의 건조한 눈길에 그저 고개를 숙여 눈을 피했을 만큼 부끄러웠다. 동정심이 아닌 수치심. 그 수치심을 더욱 키우는 싸구려 음료수와 코카잎. 코카잎을 받아 그 쓰디쓴 것을 우물우물 씹는 광부에게 나는 조심스레 코카차를 건넸다.


처음엔 이게 뭐냐는 식의 눈빛이었지만, 한 모금 마신 뒤 그는 약간 놀란 표정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정말 맛있다고 했다. 뭐랄까, 흑백 사진이 총천연색 컬러사진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내가 끓인 거라고, 코카에 설탕과 레몬, 생강을 넣고 끓이면 이렇게 맛있어 진다고 설명을 했다. 광부는 앞으로 자기도 집에서 그렇게 끓여 먹어야겠다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우리에게 이번엔 건조한 “gracias(고맙다)” 가 아닌 물을 머금은 듯한 미소로 “graicas” 라 인사했다.
 

그 독한 90도짜리 공업용 알콜 홀짝홀짝
 
광산에서 만나는 광부들은 다들 젊은 청년들이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그 광산에서 가장 오래 일 한 사람이 37살이라고 한다. 가장 어린 사람은 14살. 아이들도 방학 동안에 학교 몰래 광산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번다고 한다.


좁은 갱구에 아무렇게나 매달아 놓은 사다리를 타고 몇십 미터나 내려갔다 올라오기를 반복하면서, 가이드는 광맥을 보여주고 다이너마이트를 꽂았던 작은 구멍 등을 보여주며 광부들이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장소로 데려갔다. 그 장소에는 온몸이 붉게 칠해진, 도깨비같이 생긴 신상이 우뚝 세워져 있었고, 그 신상 앞에는 코카잎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코카잎과 함께 있는 것은 90도나 되는 그 알콜의 빈 병들이었다.


사방에서 지린내가 나는 그곳은, 광부들이 일을 시작하기 전 모여 별 탈 없이 하루가 시작되기를 빌고, 하루를 마무리 할 때 큰 사고 없이 하루를 마치게 된 것을 자축하며 피로를 잊기 위해 그 독한 알콜을 마시는 자리라고 했다. 가이드는 호들갑을 떠는 영국 부부 앞에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 알콜을 마셨고 우리에게도 마시겠냐며 권했다. 나는 마시지 않고 그 냄새만 확인해 봤는데, 정말이지 공업용 알코올냄새가 확 올라와 코끝이 찡 해졌다.


그렇게 가이드가 준비한 광산안내는 끝이 나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깜깜하고 미세한 먼지 속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사다리를 타는 것은, 관광객들에겐 그저 몇 시간 안에 들어가서 투덜거리면 끝나는 일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일을 그만둘 때까지 매일 계속되는 일이다. 지상으로 올라와서 그 영국 부부는 참담한 표정으로 무언가에 대해 화내고 있었다. 착취로 인해 형성된 조국의 부에 관한 분노일까, 그 부를 당연하듯 누리고 살아온 자신에 대한 분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나와 같은 수치심을 느꼈을까?
 

못 말리는 아르헨티노들, 놀고 놀고 또 논다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거려 피곤해진 몸과 지친 마음을 담고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광장에 도착했다. 차 안에서 말을 걸어 친해진 아르헨티나 친구들과 함께 시내에서 밥을 먹고 이야기하던 중, 그들이 내 숙소에 묵는 여자아이들을 안다며 밤에 숙소로 놀러 오겠다고 했다. 난 참 어딜 가나 놀기는 정말 잘 노는 것 같다.


남미에 처음 도착해서는 그렇게 찌질하게 방구석에 처박혀 눈물이나 질질 흘리고 있었건만, 이제는 못 놀아서 안달 난 것처럼 매일 매일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바람에 잠이 부족 할 지경이다. 숙소에서 더러워진 몸을 씻고 나왔는데, 내가 묵는 숙소 또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점령했다.


아르헨티노들은 친해지면 정말 즐겁지만 그렇지 않으면 잠을 못 자게 하는, 마치 이스라엘 단체 여행자들과 같은 존재이다. 이미 테라스를 그들이 점령해서는 술을 마시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놀고 있었다. 알고 보니 투어에서 만난 친구들이 아는 여자아이들이란 게 바로 그 그룹이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놀고 있자니, 심기가 불편해진 호스텔 주인은 그 호스텔에 묵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다 나가라고 소리를 질러대며 테라스에서 놀고 있던 나를 포함한 무리들을 내쫓았다.


결국 그 무리가 그대로 근처의 바 건물에 들어갔는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던 그 바를 아르헨티노 수십 명과 한국인 한 명이 점령해버렸다. 바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바글거려서 지나다니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숙소에 있던 사람들이 다 왔나 보다. 바 주인은 갑자기 몰아닥친 손님에 싱글벙글하며 칵테일을 재빨리 만들어 내놓았다. 우리는 그 바를 점령한 채 원을 만들어 한 사람씩 중간에서 춤을 추고 놀았다.


여기서 잠깐, 포토시는 걷는데도 숨이 턱턱 막힌다는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도시이다. 그런 곳에서 미친 듯이 뛰어 놀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는 벌써 지쳐 앉아 있는데도 아르헨티노들은 지칠 줄도 모른다. 내가 피곤해 하는 걸 눈치채고, 투어에서 만난 두 명의 아르헨티나 친구들인 산티아고(이 친구도 이름이 산티아고이다)와 파블로는 나가서 맥주나 마시자며 날 데리고 나갔다. 우리는 맥주를 한 병씩 사들고는 숙소 앞 길바닥에 주저앉아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에도 같이 돌아다닐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도둑에 가방 찢긴 나보다 더 열받아 하는 따뜻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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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은 수크레행 버스표를 예매하기 위해 터미널로 향했다. 콜렉티보를 타고 버스 터미널까지 가는데, 어느 콜렉티보가 안 그렇겠냐마는 그날따라 꽉꽉 차서 옆 사람과 밀착해야만 했다. 나는 가방을 메고 그대로 등받이에 등을 받치고 있었는데, 차비를 내려고 가방을 봤더니, 아뿔싸, 가방 한쪽이 칼로 부욱 찢겨있었다. 다행히 내 가방 속에는 온갖 잡것들이 다 들어있어서 누군지 모르는 범인이 귀중품을 훔쳐가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찢긴 내 가방을 보고 맞은편 좌석에 앉아있던 원주민 여인이 놀라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보니까 찢겨져 있었다고, 타기 전에는 멀쩡했다고 했다. 그러자 그 차 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어떤 나쁜 놈이냐며 나보다 더 화를 냈다. 아마도 직전에 내린 내 옆의 젊은 남자였을 거라고 욕을 하며 화를 내는 그들을 보니 그냥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가방은 찢겼지만 마음은 따듯해지고, 도둑맞은 물건도 없어서 울상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표를 예매하고 시장에 가서 가죽제품을 취급하는 작은 구멍가게에 들어가 찢겨진 가방을 들고 웃음을 지어보였더니 주인은 걱정 말라며 가방에 어울릴 만한 가죽을 찾아다가 감쪽같이 덧붙여 주었다. 처음보다 되레 튼튼해진 가방을 매고 산티아고와 파블로를 만나러 갔다. (포토시에서 당했다는 제보가 많이 들어왔다. 어딜 가나 위험은 도사리고 있지만 볼리비아에서는 라파스와 포토시를 여행할 때 더 각별히 조심하시기 바란다!)

  
 ‘쏘 쿨’할 줄 알았던 그들도 길거리 키스엔…
 
저녁쯤에 다시 만난 두 친구들은 내가 좋아할 만한 카페를 찾았다며 데려갔다. 그 카페는 예술가들이 운영하는 갤러리 카페인데, 홈메이드 케이크와 직접 블랜딩해서 내려주는 원두커피를 파는 곳이었다. 벽에는 주인이 그려놓은 그림들이 걸려있고, 낮에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화방과도 같은 곳이라고 한다. 딱 봐도 ‘아트스피릿’이 뿜어져 나오는 주인은 마찬가지로 예술가스러운 젊은이들과 앉아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의 새로운 아르헨티나 친구들은 정말이지 센스 만점이다. 뚱~해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아이들을 너무 좋아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파블로와 웃는 얼굴이 너무 선량한 산티아고는 하루 만에 내 취향을 파악했나 보다. 이 둘은 같이 다니면서 티격태격 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혼부부 같다. 그 둘은 남자이다. 확실치는 않지만 동성애자인 것 같았다. 


마침 그날따라 카페에서는 라이브 공연을 했다. 남미 전역을 돌아다니며 안데스음악이나 원주민 전통음악을 연주하는 잘생긴 네 명의 아르헨티나 젊은이들의 연주가 시작되자, 카페의 모든 사람들은 같은 자리에 앉아 서로 즐기며 음악에 맞춰 몸을 들썩였다. 분위기도 너무나 화기애애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도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추며 어울리게 되었다.


아이 어른 남녀 할 것 없이 정말이지 한데 어우러져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악을 연주 하던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던 손님들과 함께 전통 탭댄스를 추었고, 춤을 추느라 자리를 비운 연주자들 대신 그 악기를 다룰 수 있는 손님이 그 자리에 앉아 연주를 했다. 또 그 높은 포토시에서 밤새 춤을 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은 더욱 심했다. 좁은 공간에 있다 보니 쉴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일어서서 빙빙 돌고, 흥겨운 피리소리에 맞춰 땀 흘리며 팔짱을 끼고 춤을 췄다. 너무 즐겁고 신이 나서 모두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게다가 나는 가게 밖으로 나가서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 함께 축제를 즐기자며 끌어들였다.


그렇게 새벽 4시까지 쉬지 않고 뛰고 놀았더니 서있어도 눈이 감기는 지경이 됐다. 졸음 때문에 반쯤 감긴 눈으로 숙소에 가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같이 춤을 추다가 눈이 맞은 젊은이들이 뜨거운 뽀뽀를 나누고 있었다. 그걸 보고 다른 친구들은 킬킬대며 웃었는데, 그 모습이 조금 의외였다. 외국인들은 그런 것에 쏘 쿨해서 전혀 신경을 안 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이것도 하나의 고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포토시에서 이틀 밤 연속으로 춤을 추고 뛰어 논 내 체력에 경의를 표하며 숙소에 도착해서는 거의 기절하듯 쓰러져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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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계속하게 하는 힘은 만남과 헤어짐의 인연
 
예정대로라면 포토시에서 3박4일을 있어야 했지만, 숙소가 꽉 찬 바람에 2박3일만 있고 수크레로 떠나기로 했다. 게다가 하루 더 있다가 또 밤새 뛰어 놀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떠나는 날 오전에는 볼리비아 대통령인 에보 모랄레스가 광장에서 연설을 하러 온다고 해서 냉큼 뛰어갔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모랄레스를 보기 위해 모인 인파로 광장은 가득 메워져 있었다. 파블로와 산티아고도 그를 보려고 같이 서서 두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


이윽고 대통령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1미터 거리에서 봤는데, 그는 체구가 작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전형적인 원주민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앞줄의 사람들과 악수를 하고 그들을 얼싸안는 등, 권위주의적인 이미지의 대통령과는 다른 행동을 보였다. 약 1분 정도 그렇게 사람들과의 접촉을 하고, 대통령은 연설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 뒤를 광장에 모인 인파가 다 같이 따라갔는데, 나는 또 이 망할 화장실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산티아고와 파블로는 인파를 따라갔고, 나는 숙소에 잠깐 들렀다가 연설하는 곳으로 가겠노라고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하지만 숙소에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광장으로 갔을 때, 이미 사람들은 어디론가 이동을 해버려서 나는 혼자 이리저리 방황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모랄레스가 연설하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이미 연설은 끝났다는 것이었다. 삼 일 동안 정든 친구들에게 주려고 딴 팔찌를 전해줘야 하는데 결국은 다시 찾지 못하고 쓸쓸한 표정의 포토시를 떠나게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잠시 스쳐가는 인연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 중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만나고 싶지만 다시는 못 만나는 경우도 있다. 여행은 인연 맺기와 헤어짐을 반복하는 작업이다. 그 헤어짐이 마냥 슬플 때도 있고, 시원섭섭할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다. 그 모든 경우가 다 다르다 하더라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과정이 여행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여행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글 사진 황라연 
 

 
P2.jpg ◈ 황라연=호랑이띠. 이름인 라연을 굴려서 발음하면 Lion. 온순하나 속은 맹수와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음.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함. 한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섬에 청승 떨러 감. 좋아하는 섬은 관매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학교에 거저 먹기라는 특례로 입학.(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했음)

 새내기 때 “학고 한번 맞아줘야 간지”, “시험기간에 먹는 술은 꿀맛” 등의 고학번 선배들의 유혹에 넘어가 평점 0.15를 기록. 그 뒤론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 촛불집회 때 미친듯이 시위하느라 성적 말아먹고 정치에 눈뜨게 됨. 2007년엔 인도로 떠났고 2009년엔 남미로 떠났음. 2010년 여름방학에는 유럽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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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떠났나
2.
콜롬비아-남미에서의 첫 식사
3.에콰도르-거지가 된 사연
4.
페루①-가방은 털렸어도
5.
페루②-첫 히치하이킹
6.페루③-드디어 아마존
7.
페루④-정글속 대도시
8.페루⑤-숙제같은 마추피추
9.볼리비아①-무지개가 떴다
10.볼리비아②-에보 모랄레스(선거일 풍경)
11.볼리비아③-사하마의 트럭운전수
12.볼리비아④-체 게바라와 고양이
13.볼리비아⑤-크리스마스,그리고 새해
14.볼리비아⑥-신음하는 은광
15.칠레-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16.아르헨티나①-죽음보다 더 한 더위
17.아르헨티나②-그냥 가서 보시라
18.아르헨티나③-어, 민가협이?
19.아르헨티나④-여기에도 스위스가?
20.버스는 구름을 타고
21. 혼자, 진짜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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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