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털터리인 내게 쨍하고 ‘볕든 날’들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9> 라파스에 무지개가 떴다
음치도 노래 불러 돈 벌어…한글 써주며 숙식 해결
바다도 없는데 해군이 있다? 그리고 웬 마녀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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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쿠스코를 떠나 푸노에서 티티카카 호수를 보고 가지만,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여행자들은 푸노가 아닌 볼리비아의 코파카바나에서 티티카카를 즐긴다. 흔히 티티카카를 하늘과 가장 가까운 호수라고 하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배가 다닐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호수이다. 티티카카는 잉카 이전시대인 티와나쿠 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하늘호수는 어떤 풍경일까, 기대를 품고 도착한 코파카바나, 그곳에서 본 티티카카는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게 호수라고? 바다가 아니고? 끝없이 펼쳐진 파란색 물과 부두엔 배 몇 척이 묶여있었다. 호수라면 건너편에 뭐라도 보여야 하는데, 지금까지 봐 왔던 호수와는 차원이 다른 크기였다. 볼리비아에는 바다가 없지만 해군이 있다고 하던데, 티티카카를 보니 과연 그럴 만하다. 
 
냄새 난다는 말에 기어이 한밤에 찬물 샤워
 
쿠스코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친구를 찾아 저녁식사를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스위스, 노르웨이친구들까지 합세해 다음날 아침 태양의 섬을 투어하기로 했다. 아침 7시에 출발하는 투어는 섬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트레킹을 하는 코스였다. 우리는 섬에서 1박을 하기로 하고 트레킹 코스를 따라 천천히 남쪽을 향해 걸어갔다. 트레킹 도중  현지인들이 불쑥불쑥 나타나 통행료를 요구했다. 그럴 줄 모르고 최소한의 현금만 가지고 왔던 우리는 돈이 없어 결국엔 코스를 이탈해 염소 떼와 함께 거닐기도 했다. 쿠스코에서 코파카바나까지 씻지도 못한데다 코파카바나 숙소는 우리 돈 2000원 정도의 싸구려 숙소라 저녁엔 물도 안 나왔다. 결국 3일 정도 못 씻었는데, 일행이던 프랑스 여자가 나한테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뭐라고! 이 망할 것이. 결국 밤에 숙소를 잡고는 숙소 여인이 춥다고 말리는 데도 기어이 혼자 찬물로 씻었다. 태양의 섬에서 본 일몰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눈 덮인 안데스의 고봉들이 우뚝 솟아있고 강렬한 오렌지색 하늘은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웠다. 저 멀리 라파스 쪽에서부터 달려온 비구름이 일몰이 끝나자 이쪽에도 굵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간단히 맥주를 마시고 우리는 다음날 라파스로 향했다.
 
코파카바나에서 라파스로 가기 위해서는 또 한 번 호수를 건너야 한다. 호수를 건널 때 재미있던 광경이 있었다. 사람들을 태운 버스를 실은 배가 맞은 편에 도착하면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린다. 그리고 버스는 다시 배에 태워 반대편으로 보내진다. 두둥실 보트를 타고 이동하는 빈 버스가 엉뚱하나 재미있었다.
 
다시 반대편에서 버스를 타고 달렸다. 그 날은 2009년 12월 4일이었다. 라파스의 북쪽 엘알토에서 버스를 타고 미끄러지듯 라파스를 향해 내려갔다. 그 길에서 본 라파스의 광경은, 마치 우리를 반겨주듯 쌍무지개가 도시 전체에 걸쳐 떠 있었고, 그 아래엔 기괴한 안데스의 돌덩이들을 손으로 파낸 듯한 구덩이에 옅은 갈색의 건물들이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타고 있던 버스가 점점 라파스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가까운 커다란 도시에 차차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누가 시작하든 ‘삘’이 닿으면 3시간 넘게 ‘폭풍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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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스는 웅장한 안데스 산맥 속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수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해발 3600m 가 넘는 이 도시는 눈 덮인 흰머리 산들이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오르막길을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곳이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안데스의 기괴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뼈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의 고충과 의지에 감탄하고야 만다. 5개월 동안의 남미 여행에서 가장 사랑해 마지않던 곳, 혼자 하는 여행에 외로워 질 때면 꼭 그리워지는 곳,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였다. 이번 남미 여행에서 나는 라파스만 네 번 갔다. 길지도 않았던 여행에서 한 곳에 두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가는 바람에 정말 가고 싶었던 파타고니아 지방을 못 가고 말았지만.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볼 것도 없는 라파스를 도대체 왜 그렇게 좋아하냐고 물었다. 글쎄, 이 할 일 없는 도시가 왜 내 마음속에 남았는지 모르겠다. 쿠스코가 나에게 있어 떠나기 힘들었던 첫 도시라면 라파스는 본격적인 내 여행의 시작이자 마지막이고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던 곳이다.
 
라파스에 도착해서 코파카바나에서 받은 정보를 가지고 “el carrtero”라는 숙소를 찾아갔다. 라파스가 사랑스러웠던 것 중 가장 큰 이유는 이 숙소였다. 숙박비가 우리 돈 4천 원 정도인데, 볼리비아에 여행 온 각국의 자유로운 영혼들이 모이는 곳이다. 비교적 큰 숙소의 한가운데는 마루 비슷한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 모두 모여 무료함을 달랜다. 다들 재주를 가지고 돈을 벌며 여행하는 여행자들이어서 마루에만 있으면 심심할 날이 없다. 한쪽에서는 실로 온갖 액세서리를 만들고, 한쪽에서는 서커스 연습을 하고 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공간이었다. 겉보기엔 다가가기 힘든 개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다들 너무나 맑고 좋은 사람들이었다. 이곳에서 나는 실로 액세서리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을 배웠고, 친구들에게 한글로 이름을 써주곤 했다. 밤에는 다 같이 옥상에 올라가 맥주 한 잔씩 하면서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는데, 누군가 한 명이 기타를 잡으면 방에서 피리, 팬플룻, 템버린, 잠베 등등 온갖 악기를 다 끄집어내와 ‘삘’이 닿는 대로 하모니를 만든다. 그 울림이 얼마나 짜릿하고 감동적인지는 겪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한번은 한 방에 모여 3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음악만 연주했는데, 말은 통하지 않아도 서로의 표정으로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새벽까지 무언가에 홀린 듯 미친 듯이 연주를 하다가 숙소 주인이 시끄럽다고 해서(숙소 스태프들은 가족 같지만 매우 까칠했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숙소 친구들이랑은 더 가까워지고 음악으로 하나 되는 세상을 느낄 수 있었다. 
 
 
라파스 여행 즐기기 제1장 제1절, 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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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라파스도, 두 번째 라파스도 다 이 숙소와 함께했다. 저 밑에까지 내려갔다가 이 숙소에서의 나날이 너무 그리워 다시 라파스로 올라가기도 했다.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주는 스태프들과 전에 있던 친구들과는 다르지만 금방 친해지는 친구들이 있는, 항상 음악이 끊이질 않는 그곳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 
 
이 밖에 라파스에서 할 게 뭐가 있냐고 묻는 사람들을 위해 라파스 알차게 즐기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일단 쇼핑을 해야 한다. 볼리비아는 남미에서 가장 물가가 싼 나라이다. 라파스에서 쇼핑으로 도대체 얼마를 썼는지 모르겠다. 남미 하면 떠올리는 안데스의 이미지들을 싼 가격에 잔뜩 살 수 있는 곳이 볼리비아이다. 게다가 볼리비아 중에서도 라파스가 쇼핑하기엔 천국이다. 쇼핑스트리트라고 불리는 사가르나가에는 관광객을 상대로 한 점포들과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많은데 다른 도시는 이런 곳이 별로 없다. 게다가 가격도 싸고 종류도 많다. 재미있는 프린트의 티셔츠, 안데스스러운 온갖 잡화들, 인디오들의 상징인 왈리팔라, 등등 하나하나 열거하다가는 책 한 권 되겠다.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의 선물을 다 라파스에서 해결했다. 덕분에 집에 소포를 두 번이나 부쳤다. 쇼핑은 무조건 라파스에서! 
 
시장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라파스는 정복 대상이다. 물론 시장을 논할 때, 도시 전체가 시장이 아닌가 싶은 시장 도시 코챠밤바를 빼놓으면 안 되겠지만 라파스의 시장 또한 어마어마하다. 끝났나 싶으면 또 나오고, 여기가 끝이겠지 싶으면 길 하나 건너 또 시장이다. 시장도 분산되어 있는데 무지하게 많다. 네구로 시장, 엘알토 시장, 마녀 시장 등등, 한곳만 가도 하루가 다 끝나버린다. 특히 조금 그로테스크하지만 재미있는 곳은 마녀 시장인데, 근처에만 가도 특유의 이상한 향내가 풍기고 가게 밖에는 새끼 야마의 미라를 팔고 있다. 처음엔 이게 도대체 뭔가, 참 이상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구나 싶었는데, 궁금증에 못 이겨 물어보니 해가 바뀔 때, 이 미라를 놓고 제사를 지내 액운을 떨치고 행운을 비는 풍습이었다. 배가 고프면 시장에서 밥도 먹는다. 시장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던 것은 따뜻한 스프였는데, 우리나라 콩국수와 똑같은 맛이었다. 우리 돈으로 단돈 300원밖에 안 하는 이 스프 한 그릇이면 배가 빵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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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식당 소개해줬더니 3일 내내 밥 사줘
 
시장이 많다 보니 길거리음식이 많다. 그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아침에만 파는 “파스텔”이라는 것이다. 얇게 저민 파이지 안에 치즈를 넣고 튀긴 것에 슈가파우더를 뿌려 먹는데, 쌀음료(인 것 같은) “아피”와 함께 먹는다. 볼리비아 하면 “살테냐”를 꼭 먹으라 하지만, 나는 살테냐보다는 다른 길거리 음식들이 더 마음에 들었다. 살테냐는 안에 감자와 양파, 고기가 들어있고 약간 달달한 맛의 일종의 구운 만두 같은 것인데, 볼리비아의 어딜 가나 아침식사로 쉽게 맛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튀긴 음식인 “투쿠마나”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살테냐보다 투쿠마나를 더 선호한다. 투쿠마나에 온갖 소스를 쳐서 먹는 그 맛이란…. 생과일주스까지 더하면 훌륭한 아침식사가 된다. 생과일주스도 과일을 보는 앞에서 바로바로 갈아주는데 싸고 맛있다. 게다가 자기가 원하는 과일을 고르면 섞어서 갈아주고, 우유를 넣거나 꿀을 넣는 등의 옵션도 있다. 볼리비아는 길거리음식의 천국이다! 
 
길거리음식뿐이랴, 물가가 싼 덕에 큰 접시 만한 스테이크도 아주 싸게 먹을 수 있다. 아니 잠깐만! 먹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신나서 거침없이 쓰고 있는데 이밖에도 할 말이 많다. 일단 먹는 이야기는 라파스의 한국식당이 굉장히 맛있고 친절하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겠다. 라파스에 있는 동안 적어도 이틀에 한 번씩은 한국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외국인 친구들을 이곳에 데려오면 항상 눈이 뒤집혀서 정신 없이 먹어대곤 했다. 한 친구는 나에게 이런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줘서 고맙다며 3일 내내 그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돈을 다 지불해주기도 했다. 
 
음식 얘기를 그만 하려고 했는데…, 라파스에서는 카페도 자주 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볼리비아가 무지 후지다며 무시하지만 (물론 다른 도시에 가면 그렇지만 T.T) 라파스는 그렇지 않다. 곳곳에 분위기 좋은 카페가 있고 가격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싼 편이다. 볼리비아의 커피 체인점인 “알렉산더 카페”에서는 에스프레소도 즐길 수 있고 디저트도 참 맛있다. 특히 머핀과 치즈케익은 한국에서 먹는 맛과 비슷하다. 
 
 
가난한 여행자들의 천국, 넉넉한 인심으로 속아 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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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돈을 몽땅 털리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돈이 없는 거지들에게 라파스는 천국이다. 물가도 싼데다가 길거리에서 뭔 짓을 해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꼬마는 막춤을 추고, 한 소년은 정말 음치 같은데도 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물론 그 앞에 작은 동전 통과 함께. 다른 나라라면 코웃음 치며 그게 돈이 될까 싶어도 볼리비아에서는 된다. 남미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인 볼리비아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넉넉한가 보다. 그래서 내가 한 일.
 
이름을 써줬다. 색종이에 곱게 곱게 한글과 한자로 이름을 써 주었다. 예를 들어 이름이 “메시”라면 한글로 적고 옆에 한자로 “每時”라고 적어준다. 한자의 뜻과 함께. 원피스를 입고 평소엔 하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는 길거리에 앉아 “당신의 이름을 한국어로 써드려요”라고 쓴 종이만 앞에 두고 앉아 있자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본다. 한 장에 5볼리비아노(당시 1달러=7볼리비아노)를 받고 써주었는데, 이런 사기성 짙은 ‘사업’으로 하루의 방값과 식비는 너끈히 벌었다. 이름 써주고 사진 같이 찍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돈 버는 이 일은 최고의 일이엇다. 
 
라파스에서 갈 수 있는 곳 중 비교적 유명한 곳은 티와나쿠 유적지와 달의 계곡이다. 티와나쿠 유적지는 아직도 발굴이 한창인 곳이며 알려진 것이 그리 많지 않다. 티와나쿠는 티티카카 호수를 중심으로 발달한, 잉카 이전의 문명으로, 볼리비아에서 가장 오래된 고고학 유적이라고 한다. 볼리비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각형의 귀여운 태양신의 그림들이 모두 티와나쿠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석조상들이다. 티와나쿠는 페루, 볼리비아, 칠레 북부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번성했던 문명이며, 티와나쿠의 건축기술은 잉카의 건축기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티와나쿠에는 태양신을 형상화한 거대한 석상들이 많고 그 정교함 또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또한 태양의 움직임과 티티카카의 물을 이용한 농경기술의 발달도 그 당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 문명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직 발굴이 한창이라 알려지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입장료는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인데 비해 싸다고 느껴지는 80볼리비아노(11달러). 가이드를 고용하는 데는 70볼리비아노(10달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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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에서 흐르는 팬플룻 멜로디, 취한다 
 
남미에서 달의 계곡(Valle de la luna)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한번은 남미 지도를 놓고 같은 이름을 가진 곳을 체크해 봤는데, 한 6군데쯤 있었던 것 같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칠레 아타카마와 라파스의 달의 계곡이다. 라파스에서 갈 수 있는 달의 계곡은 콜렉티보를 타면 왕복 4볼리비아노 정도로 갈 수 있다. 입장료도 그리 비싸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이곳이 달의 계곡이라 불리는 이유는 모래가 비와 바람에 침식되어 이 세상이 아닌, 달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이 기괴한 지형은 겉보기엔 바위로 만들어진 것 같지만 발로 스윽 문질러보면 후두두둑 하고 모래가 떨어지며 부스러진다. 들쑥날쑥 제멋대로 이루어진 달의 계곡의 입구에는 몇 개국의 국기가 걸려 있는데, 그 중 태극기는 중간에 있다. 달의 계곡은 한 30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다. 나와 일행이 코스를 따라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el condor pasa”의 구슬픈 멜로디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얼마 없는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행사인지, 그냥 부는 것인지 몰라도 달의 계곡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전통의상을 입은 현지인이 팬플룻으로 그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잠시 멈춰 달에서의 연주에 취했다. 사람이 없는,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장소에서 애처로운 멜로디를 듣고 있자니, 정말 지구가 아닌 다른 공간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라파스의 매력 중 하나는 아름다운 야경과 전망이다. 흰 눈이 덮인 안데스의 높은 산들이 라파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라파스는 그 산들을 보호막으로 삼아 움푹 패인 곳에 위치해 있다.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서 라파스의 야경을 바라본다면 다른 남미 도시의 야경과는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지형이 지형인 만큼, 라파스가 만들어 내는 모든 풍경에는 다른 도시가 가지지 못한 ‘라파스스러움’이 있다. 한 번은 일출을 보기 위해 현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 오빠와 숙소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산에 올라갔는데, 안개가 껴서 전망이고 나발이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눈앞의 일행들밖에 없었다. 하지만 날이 밝고 서서히 안개가 걷히자 나타난 라파스는 내가 사랑에 빠지기엔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였다. 목적인 일출은 못 봤지만 라파스를 떠올리면 그때의 풍경이 함께 떠오르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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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꺼진 침대와 싸구려 숙소마저 사무치게 그리운…

 
내가 여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그 나라의 풍경과 문화보다 사람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받았다면 그곳은 좋은 여행지로 기억되지 않는다. 내가 라파스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도 사람들이다. 숙소 근처의 구멍가게 할머니, 항상 투쿠마나를 사먹던 키오스크의 모자, 길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 피시방을 지키는 꼬마. 항상 반갑게 인사하며 라파스를 떠날 때 아쉬워하던 사람들. 내가 저 멀리에 있어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적당한 수다를 떠는 사람들…. 볼리비아 사람들은 차갑지도, 그렇다고 과도하게 친절하지도 않다. 남미는 콜롬비아서 밑으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사람들이 불친절해진다는 소리가 있다. 몸소 느껴본 바로도 그렇다. 하지만 과도한 오지랖을 발휘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볼리비아의 친절이 딱 적당했다. 라파스를 떠날 때면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아쉬웠고, 라파스에 다시 가기로 마음 먹으면 그 사람들이 떠올라 혼자 배시시 웃기도 했다. 
 
라파스는 여행자들에게 미운오리새끼인 것 같다. 볼리비아 자체가 매력적이지 않은지, 사람들은 우유니만 보고 바로 떠나버리곤 한다. 라파스는 우유니에 가기 위한 거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여행에서 어느 나라가 가장 좋았냐고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볼리비아를 꼽는다. 남미에서 유일하게 비자가 필요한, 외국인에게 불친절한 나라이지만 나는 거금을 주고 비자를 연장해서까지 볼리비아에 남았다. 예정했던 귀국 날짜를 늦추고 수강신청을 친구에게 부탁하고 여행의 동기가 되었던 파타고니아를 포기하면서까지 눌러앉았던 나라가  볼리비아다. 그런 나라의 수도 라파스는 나에게 너무나도 특별한 곳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라파스의 찬 공기가 폐에 들어오는 느낌을 떠올리며 라파스를 그리워한다. 숙소로 돌아가는 오르막길, 앉아서 돈을 벌던 극장 앞, 숨이 턱턱 막히도록 높은 곳에 위치한 시장, 수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또 헤어진 싸구려 숙소, 그 숙소의 가운데가 꺼진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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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황라연

 
P2.jpg ◈ 황라연=호랑이띠. 이름인 라연을 굴려서 발음하면 Lion. 온순하나 속은 맹수와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음.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함. 한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섬에 청승 떨러 감. 좋아하는 섬은 관매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학교에 거저 먹기라는 특례로 입학.(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했음)

 새내기 때 “학고 한번 맞아줘야 간지”, “시험기간에 먹는 술은 꿀맛” 등의 고학번 선배들의 유혹에 넘어가 평점 0.15를 기록. 그 뒤론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 촛불집회 때 미친듯이 시위하느라 성적 말아먹고 정치에 눈뜨게 됨. 2007년엔 인도로 떠났고 2009년엔 남미로 떠났음. 다음은 아프리카로 갈 예정이지만 일단 졸업은 해야겠다는 현실에 타협하여 방학동안 유럽이나 다녀올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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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떠났나
2.
콜롬비아-남미에서의 첫 식사
3.에콰도르-거지가 된 사연
4.
페루①-가방은 털렸어도
5.
페루②-첫 히치하이킹
6.페루③-드디어 아마존
7.
페루④-정글속 대도시
8.페루⑤-숙제같은 마추피추
9.볼리비아①-무지개가 떴다
10.볼리비아②-에보 모랄레스
11.볼리비아③-사하마의 트럭운전수
12.볼리비아④-체 게바라와 고양이
13.볼리비아⑤-크리스마스,그리고 새해
14.볼리비아⑥-신음하는 은광
15.칠레-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16.아르헨티나①-죽음보다 더 한 더위
17.아르헨티나②-그냥 가서 보시라
18.아르헨티나③-어, 민가협이?
19.아르헨티나④-여기에도 스위스가?
20.버스는 구름을 타고
21. 혼자, 진짜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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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