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처럼 가방이 없어졌다, 아뿔싸! 황라연의 남미 배낭여행

<3> 거지가 된 사연
잠깐 짐을 놓고 멍해 있는 사이 순식간에
4천 달러·카메라 2대 등…돌아가야 하나

 
콜롬비아를 거쳐 에콰도르에 3주 조금 넘게 머무른 뒤, 나와 일행은 에콰도르의 휴양지 빌카밤바라는 곳으로 가기 위해 아름다운 도시 쿠엔카를 거쳐 페루 국경과 가까운 로하로 갔다. 아니 잠깐, 여행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 대한 내용을 날려먹냐고? TV 드라마도 아니고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것에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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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아팠다, 긴장이 풀어졌나 보다
 
앞으로 나올 페루와 볼리비아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 나머지, 연재분의 절반을 이 두 나라에 대한 이야기로 채울 생각이다. 물론 콜롬비아와 에콰도르에서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지만, 나의 여행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에콰도르 로하 이전과 로하 이후. 즐겁고 편하고 정든 한국 일행들과의 시간도 소중했지만, 나에게 진짜 여행은 로하 이후였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궁금증이 유발되시나?

때는 2009년 10월 말이었다. 빌카밤바에 가기 위해 우리 일행은 로하의 버스 터미널에서 티켓을 샀다. 버스 시간까지는 30분 가량 남아있었고, 짐을 바닥에 풀어놓은 뒤 이동을 대비하여 화장실에 다녀왔다. 나는 그 전날부터 속이 안 좋아 시름시름거렸고, 당일에는 아침식사를 하다가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기도 했다. 여행을 시작하고 한 번 크게 앓은 뒤 별 탈이 없었는데, 여행에 나름대로 익숙해 졌는지 긴장이 풀어졌나 보다.
 
일행들은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에 갔다. 나는 나의 짐을 모두 일행들의 짐과 함께 내려놓고 그 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일행들이 돌아와 버스를 타려고 짐을 챙길 때,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내 작은 배낭이 없다.
아까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이상하다. 어딜 봐도 없다.

 
다행히 여권은 큰 배낭에 빼놨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정말 미련 곰탱이라고 말해도 시원찮은 게, 8개월 동안 일한 돈을 현금으로 다 들고 왔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나같이 멍청한 여행자도 없을 것이다. 평소엔 돈을 큰 가방과 작은 가방에 나누어서 넣는데, 이상하게 그날 아침은 작은 가방에 모든 돈과 귀중품을 챙겼다. 그런데 그 가방이 없어진 것이다.
 
정말이지 혼돈 그 자체였다. 금방 울상이 되어버린 날 보고 현지 여인이 “혹시 가방을 찾느냐. 그 까만 가방이라면 어떤 남자가 아까 들고 사라지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버스 터미널을 뛰어다니며 애타게 찾았건만 있을 리가 있나. 언제 가져갔는지도 모르겠고, 바로 내 옆에 있었던 것을 어떻게 가져갔는지도 깜쪽같이 몰랐다. 마법과도 같은 것이었다.
 
곧바로 한국의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대충 설명하고 각종 카드의 분실신고를 부탁했다. 나도 지금 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도저히 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일단은 버스 터미널 근처의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를 쓰기로 했다. 우리의 사정을 들은 한 현지인 남성이 자신도 여행을 하다가 다 털린 적이 있다며 성심성의껏 우리를 도와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경찰서의 딱딱한 의자에 앉아서 도둑맞은 가방 속에 든 물품을 빼곡히 적어내려갔다. 여권도 그 가방 안에 있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여권은 큰 배낭에 빼놨었다.
카메라 두 대, 지금까지 찍은 필름 5통, 가이드북, 인도에서 산 유용한 담요, 아껴 쓰느라 코딱지만큼 짜서 쓰던 나의 디올 아이크림T_T(두고두고 생각났다), 비싼 기초화장품들, 그리고 현금 4000천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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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서 온 남미여행인데…

 
한국으로 돌아갈까. 이대로 여행은 아무래도 무리겠지. 지금까지 여기에 오고 싶어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도난 품목을 술술 써내려간 지 한 30분쯤 지났을까, 초조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고 어떻게든 여행을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그만 둘 순 없다, 얼마나 바랐던 여행인데. 일행들은 나보다 더 걱정을 해주었지만, 나는 이상할이만큼 침착했다. 
 
종이쪼가리에 지나지 않는 돈이라는 물건에 나를 구속하고 싶지 않았다. 돈 없이도 여행하는 사람들도 있고, 부모님이라는 든든한 백도 있고. 물론 최대한 손을 안 벌릴 생각이었던 처음의 신념은 깨졌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일단은 부모님께 원조요청을 하기로 했다.
 
도둑맞은 물건과 돈이 진짜 내 것이라면 나에게 돌아오겠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그건 내 물건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가방을 훔쳐간 사람은 가방을 열어보고 금액에 놀라 거품 물고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4000천 달러라는 돈이 에콰도르 생활수준을 감안하면 엄청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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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일행 뒤로하고 재출발 위해 다시
 
돈에 대한 애착은 없었지만, 그동안 찍었던 필름들, 내가 봤던 아름다운 풍경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돈은 벌면 생기는 것이지만 사진이라는 기록물과 셔터를 누를 때 느꼈던 감정들은 되살아나지 않기에.
 
이런 나를 동행인 아저씨께서 위로해 주시며 럼주와 콜라를 사와 숙소 방에서 술판을 벌였다. 평소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 그날따라 어찌나 맛있던지.
 
다음날 아침, 정든 일행들은 예정대로 빌카밤바로 향하고, 금전적으로 많은 여유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 일행들이 조금씩 모아준 약간의 돈을 들고 나는 재정비를 위해 수도인 키토를 떠나기 전 묵고 있던 한인 민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미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하는 장거리 버스여행이었다. 
 
로하를 떠나 쿠엔카에서 잠시 쉬면서 한국 돈으로 약 200원인 커다란 빵을 사서 12시간 동안 연명하며 키토에 도착 한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다. 동행들과 함께 탔던 익숙한 트롤레(노면전차)를 타고 익숙한 숙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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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라연, 사진 윤은혜 성균관대 재학


 
P2.jpg ◈ 황라연=호랑이띠. 이름인 라연을 굴려서 발음하면 Lion. 온순하나 속은 맹수와도 같은지는 잘 모르겠음. 혼자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걸 좋아함. 한국에서는 주기적으로 섬에 청승 떨러 감. 좋아하는 섬은 관매도.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중앙대학교에 거저 먹기라는 특례로 입학.(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했음)

 새내기 때 “학고 한번 맞아줘야 간지”, “시험기간에 먹는 술은 꿀맛” 등의 고학번 선배들의 유혹에 넘어가 평점 0.15를 기록. 그 뒤론 정신 차리고 공부하다 촛불집회 때 미친듯이 시위하느라 성적 말아먹고 정치에 눈뜨게 됨. 2007년엔 인도로 떠났고 2009년엔 남미로 떠났음. 다음은 아프리카로 갈 예정이지만 일단 졸업은 해야겠다는 현실에 타협하여 방학동안 유럽이나 다녀올 생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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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떠났나
2.콜롬비아-남미에서의 첫 식사
3.에콰도르-거지가 된 사연

4.페루①-가방은 털렸어도
5.페루②-첫 히치하이킹
6.페루③-드디어 아마존
7.페루④-정글속 대도시
8.페루⑤-숙제같은 마추피추
9.볼리비아①-무지개가 떴다
10.볼리비아②-에보 모랄레스
11.볼리비아③-사하마의 트럭운전수
12.볼리비아④-체 게바라와 고양이
13.볼리비아⑤-크리스마스,그리고 새해
14.볼리비아⑥-신음하는 은광
15.칠레-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16.아르헨티나①-죽음보다 더 한 더위
17.아르헨티나②-그냥 가서 보시라
18.아르헨티나③-어, 민가협이?
19.아르헨티나④-여기에도 스위스가?
20.버스는 구름을 타고
21. 혼자, 진짜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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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