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장대깃발 오르면 현찰 박치기 흥정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서해의 황금시대, 파시 ⑦
재주는 선주가 넘고 큰 돈은 상회주인이 챙겨
휘파람 불거나 칼·신발 바다 빠뜨리는 건 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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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 때면 어선뿐만 아니라 시선(柴船) 배와 상고선도 떴다. 땔감을 실어 나르는 배가 시선(柴船)이었다. 마포 나루에서 장작이나 식량, 생필품 등을 싣고 온 시선들이 물건을 조기와 맞바꿔 가기도 했다. 조기잡이 어장에서 어선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 배가 운반선인 상고선(商賈船)이다. 상고선은 짐배, 화식기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뭍에서는 곡물을 실어오고 어장에서는 생선들을 운반했다. 상고선은 운반선이자 중간상이었다. 조기잡이 선단 대부분이 돛단배(帆船)일 때부터 상고선은 기계배였다. 어장에서 잡은 조기는 즉석에서 매매됐다. 그물을 걷어 올린 배는 호기(虎旗)를 찔렀다. 장대에 호랑이 그림 깃발을 매단 것이 호기다. 그러면 가장 먼저 발견한 상고선이 달려오고 흥정이 이루어졌다. 해상시장, 말 그대로 파시가 섰다. 상고선이 도착하면 어선에서는 호기를 넘어뜨렸다. 흥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호기를 세웠다. 상고선은 목포, 인천, 영광 등 사방에서 왔다. 파시 내내 어선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조기 값은 무조건 ‘현찰 박치기.’ 상고선은 다량의 현금을 싣고 다니며 거래가 성사되면 즉석에서 대금을 건넸다. 어선과 상고선 간에 더 받고 덜 주기 위한 흥정은 뭍의 시장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유리한 쪽은 상고선이었다. 어선들은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풍선(帆船)이 대부분이었으니 조기를 싣고 뭍까지 팔러 갈 수가 없었다. 가격이 불만족스러워도 팔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선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넘겨주는 경우”가 많았다. 상고선은 깃대가 선 것을 보면 “저기 조기 있다” 외치며 달라왔지만 어부들은 상고선을 도둑놈들이라고 욕했다. “그놈들이 다 도둑놈들이다. 조금만 주자하면서 달려와. 그냥 때려잡아요. 때려잡아.”
 
선장 위에 영자, 원로로 자잘한 일 도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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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배들이 늘어나면서부터는 상고선의 역할이 줄어들었다. 어선들은 조금 때가 되면 7~8시간 거리의 인천으로 직접 싣고 나가 하인천 부두의 어물상에 조기를 넘겼다. 하지만 어물상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어들선은 상회에게도 약자였다. 상회에서는 선주들에게 전도금(출어비용)을 대주기 때문이다. 상회는 조기를 넘겨받아 ‘깡’(수협 공판장)에서 위판을 대행해 주고 수수료를 챙겼다. 선주들은 수수료와 상회에서 빌린 전도금을 떼고 난 금액을 손에 쥐었다. 60년대 자루그물로 잡은 안강망배의 조기는 크고 작은 것들이 뒤섞여서 한 동에 쌀 한 가마, 그물코가 균일한 자망 배에서 잡은 조기는 씨알이 굵어서 한 동에 쌀 두 가마정도를 받았다. 조기 한 동, 천 마리가 쌀 한두 가마 값밖에 안될 정도로 조기 값이 쌌으니 선주들은 웬만해서는 큰 이익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자본이 없는 선주들은 상회주인인 객주의 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상회 주인만 좋은 일 시켰다.” 중간상들만 큰 이익을 취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연평도에는 본토박이보다도 해주의 대수압도, 소수압도, 육섬, 거첨도 등지에서 피난 나오며 배를 끌고 온 선주들이 더 많았다. 조기잡이 배는 풍선이나 기계배를 막론하고 평균 8명이 승선했다. 조업 가능한 최소 인원이었다. 선주가 선장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고용 선장을 썼다. 선주는 배임자 혹은 뱀자라 했고 선장은 사공 혹은 사궁이라 했다. 일반 선원은 뱃동사 혹은 뱃동서라 불렀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동사(同事)라 한 것이다. 선원들에게는 역할에 따라 이물사공, 고물사공, 화장 등의 직책이 주어졌다. 뱃머리인 이물에서 일하는 이물 사공은 가장 경험이 많은 ‘영자’가 맡았다. 화장은 평상시에는 조업을 거들다 밥 때가 되면 밥 짓는 일을 하는 배의 막내였다. 선원들 중 선장을 했거나 배를 탄 경험이 많은 나이든 선원을 ‘영자(永者)’라 했다. 길게 앉은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이어서 영자라 불렀으며 특별대우를 했다. 선장보다 대접을 더 받는 영자도 많았다. 선장도 경험 많은 영자의 말은 들었다. 영자는 원로였지만 배안의 자잘한 일은 도맡아 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배의 구조나 어구에 대해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스스로가 미리 대처한 것이다. 영자는 한시도 쉴 틈 없이 배를 수리하고 어구들을 손 봤다. 신입들은 무엇을 해야 할 줄 몰라서 움직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뱃사람들은 대부분 영자를 존중했지만 개중에는 “저 놈의 영자 영감탱이” 하며 영자를 무시하는 젊은 선원도 있었다.
 
두세 시간 일하고 두세 시간 자고, 또 틈틈이 쪽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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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주가 선장을 겸하지 않는 배에는 임시 선주인 ‘이목 배임자’를 세웠다. 선주는 자신의 형제나 친척 등이 선원으로 승선했을 경우 그를 ‘이목 배임자’로 임명하고 배의 금전 관리와 사무를 맡겼다. 친인척이 승선하지 않았을 때는 대게 사공이 ‘이목 배임자’ 역할까지 겸했다. 배임자가 사공인 경우에도 거들먹거리면서 어른 노릇하려 들면 선원들이 잘 따라주지 않았다. 주인이 몸 노릇해야 뱃사람들도 따르고 일을 잘했다.
 
뱃사람들은 한번 조업을 나가면 보통 열흘에서 보름 동안 배에서 생활했다. 그때는 쌀과 식수, 간장, 된장, 고추장, 김치, 술, 담배 등의 식료품과 기호품, 화덕, 장작 등을 가득 실었다. 선상생활에서 쌀만큼이나 귀한 것이 물이었다. 물을 담는 탱크는 스기나무(삼나무)로 만들어 배에 싣고 다녔다. 보통 세 드럼 분량의 크기였다. 하지만 탱크의 물은 음식을 하거나 식수로만 사용됐다. 배안에서 탱크 물로 씻는 것이나 세탁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물탱크는 연평도에 입항 했을 때 보충했다. 선상에 있는 동안 선원들은 옷을 갈아입지 못했다. 그래서 선원들 몸속에는 늘 이가 득실거렸다. 세수는 바닷물로 했고 세탁은 섬에 내렸을 때 개울에 가서 했다. 안강망 배의 경우 선상에서 잠은 늘 쪽잠이었다. 6시간 간격으로 그물을 거둬야 하니 두세 시간 일하고 두세 시간 자고, 또 틈틈이 잠을 잤다.
 
식당은 선실 뒤에 붙어 있었다. 식당에는 솥이 걸린 아궁이가 있었고 화장은 하루 세끼 그곳에서 장작불을 때 밥을 하고 국을 끓였다. 대부분은 조기들 틈에 걸려든 잡어로 매운탕을 끓이거나 소금을 뿌려 구웠다. 생선은 물리도록 먹었지만 김치는 항시 부족했다. 출어 때 싣고 온 김치는 일찍 떨어져 버리기 일쑤였다. 더러 생것을 회로 떠서 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민어와 준치회가 가장 별미였다. 귀항 무렵이면 가장 먹고 싶은 것이 김치였다. 조기는 반찬으로도 잘 먹지 않았다. 하나라도 더 팔아야 자신들의 몫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생선이 흔해서 꽃게나 아귀 따위는 생선 취급도 안하고 버렸다.
 
가장 그리운 건 가족 다음 김치…꽃게나 아귀는 천덕꾸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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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선상생활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시기도 했다. 지나친 음주는 안전이나 조업에 지장을 주는 까닭에 출어할 때 배에다 한말들이 탄자(오지독)이나 퍼런 댓병 ‘와룡’ 소주 몇 병 정도만 실었다. 조기 거래가 이루어지면 상고선에서 소주 한 되 씩을 건네주기도 했다. 돛단배들은 호야불(가스불)로 등을 밝혔고 기계배들은 발전기를 돌려 전깃불을 켰다. 억센 남자들끼리 좁은 공간에서 몇 달 씩 생활하다보면 사소한 일 때문에 크게 다투는 일도 잦았다. 다 같이 고생하는데 힘들 일을 기피하는 약삭빠른 사람들이 한 둘은 꼭 있었다. 그 것을 참다못한 선원이 시비를 걸면 싸움이 커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같은 고향 사람들이라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조업 중에도 금기가 많았다. 휘파람을 불거나 칼을 바다에 빠뜨리면 안됐다. 신발을 바다에 빠뜨리면 사고가 날 징조로 여겼다. 칼을 바다에 떨어뜨리는 것은 용왕신의 등에 칼을 꽃는 불경으로 여겨졌다. 그때는 아애 조업을 접는 배도 드물게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정풀이를 해서 부정을 씻어낸 다음 조업을 계속했다.
 
선상 생활에서 유일한 취미생활은 라디오. 배마다 라디오가 한 대씩은 있었다. “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해질녘 라디오에서 고향 노래라도 흘러나오면 남녘에서 온 선원들은 노을보다 얼굴이 더 붉어 졌다. 떠나온 고향 두고 온 가족들, 그리움에 목이 메었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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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