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는 ‘선‘을 잃고 명사십리는 ‘명사’를 잃다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강제윤 시인의 섬기행] 고군산 군도 <상>

 

평사낙안 장자어화 등 8경 하나 둘씩 사라져

허허벌판에 항구만 달랑, 이토록 황망할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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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우주에서 가장 귀한 실체인 지구를 파손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우리가 달에서 태어나 장엄한 지구에 쳐들어와서 파괴시키고 또 다시 달로 돌아가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보인다."(토마스 베리 신부)

 

5차례 간척 섬 12개 사라져…뿌리는 친일파 이완용

 

섬들이 사라지고 있다. 지나간 100년 동안 군산 연안에서만 모두 12개의 섬이 사라졌다. 1880년대 71개였던 군산 연안의 섬이 현재는 59개에 불과하다. 섬을 없애버린 것은 사람들의 욕망이다. 1890년대 초반 선혜청 당상관 이완용에 의해 만경강 인근 바다에서 간척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군산 앞바다에서만 5차례의 대규모 간척이 있었다. 간척의 시작이  매국노의 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오식도, 내초도, 입이도, 무의인도, 가내도, 조도, 비응도, 장산도 등 앞선 네 번의 간척으로 사라진 섬들은 대부분 섬의 존재를 증거할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다. 근래의 새만금 간척으로 사라진 섬은 야미도와 신시도, 북가력도와 남가력도 등이다.

 

이 시대는 두 세대가 공존한다. 고향을 가진 세대와 고향을 상실한 세대. 국토의 급격한 도시화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었다. 태어난 땅은 있어도 더 이상 고향은 없는 시대. 도시화 시대, 실향민들에게 섬은 잃어버린 고향의 원형이다. 사람들이 노스탤지어를 간직하고 섬으로 향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의 시원을 찾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섬들의 시대도 저물어 간다. 마침내 섬들이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사람들은 어디에서 또 고향을 찾을까. 

 

바다의 포식자 문어만 살판났다

 

군산에 왔다. 12년 만의 선유도행. 그 사이 장미동 군산 여객선 터미널이 폐쇄되었다. 금강 하구언 둑을 막으면서 토사가 쌓여 수심이 얕아졌다. 장미동의 구 여객선 터미널 일대 바다는 썰물 때면 갯벌이 드러나 더 이상 배가 다닐 수 없게 된 것이다. 소룡동에 새 여객선 터미널이 들어섰다. 허허벌판의 항구, 터미널 건물만 달랑 외롭다. 인근에는 인가나 식당 건물 하나 없고 온통 공장들뿐이다. 이토록 황망한 항구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다.  

 

12년 전, 하루 두 번 뿐이던 여객선이 이제는 수시로 다닌다. 두 시간 넘던 항해 시간도 쾌속선이 출항하면서 절반으로 단축됐다. 고군산 군도를 운항하는 유람선도 수시로 뜬다. 선유도는 유명 관광지로 변신했다. 섬을 찾는 사람 대부분이 중·노년의 단체 관광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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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선착장도 전형적인 단체 관광지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배에서 내리자 사발이(사륜 오토바이)가 손님을 기다리고 골프카와 민박집 봉고차들이 그 뒤를 이어 대기중이다. 횟집도 줄지어 늘어섰다. 선유 1번지 마트 횟집, 선유 횟집, 터미널 횟집, 선유 팔경 횟집, 평사낙안 횟집…. 횟집들은 수족관 외에도 큰 고무 대야에 물고기와 해산물들을 가득 담아놓고 호객에 열심이다. 낙지, 문어, 소라, 해삼, 도다리, 광어, 우럭, 놀래미, 숭어, 굴, 전복, 홍합, 멍게 등이 손님을 기다린다.

 

대야에 전시된 물고기들은 새만금 공사 이후 빈약해진 서해바다 어족의 모습을 날것으로 보여준다. 어종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전에 비해 많이 잡히는 것은 문어뿐이다. 횟집마다 산 문어가 가득하고 널어 말리는 문어는 더 많다. 문어가 많이 잡히는 것이 어민들에게는 결코 달가운 일만은 아니다. 포식자 문어의 대량 출현으로 전복, 소라, 해삼 등 고급 해산물의 수확이 급감했다. 문어가 특히 좋아하는 돌게는 거의 잡히지 않는다. 

 

물고기와 해산물의 씨가 말라가도 선유도 횟집들은 한창 호황을 누린다. 몰려드는 관광객들 덕택에 작은 횟집 하나가 주말이면 하루 수백만 원의 매출을 쉽게 올린다. 마른 멸치와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조개젓 등이 특산물로 육지 손님들에게 팔려 나간다. 이곳도 한동안 바가지요금이 극성이었나 보다. 마을 공지판에는 마을 주민들이 정한 '선유도 해수욕장 협정 가격 안내' 플래카드가 큼직하게 걸려 있다. 숙박비 2인1실 3만5천원~6만원, 백반 5천원, 생선탕류 1인분 1만원, 회 1kg에 4만~6만원. 맥주 한 병, 과자 한 봉지까지 협정 가격이 정해져 있다. 

 

신이 만든 ‘자연 정원’이 인공에 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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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의 행정 중심은 선유 2구다. 선유 2구에는 전에 없던 해안도로가 생겼고 새로 갯벌을 매립한 땅에는 파출소와 보건소, 우체국 등이 들어섰다. 갯벌을 가로질러 해안도로가 직선으로 생기면서 선유 2구 해안의 풍광도 바뀌었다.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이 오가며 새 도로 사이에 생긴 갯벌을 매립하느라 소음이 심하다. 전에는 중앙민박이나 선유초등학교 대문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다. 이제 호수같이 평온한 풍경은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바로 건너 새만금 바다에서는 간척 공사로 4만ha나 되는 광대한 갯벌이 사라져 버린 마당에 저 작은 갯벌쯤 사라지는 것이 무슨 이야기 거리나 되겠는가. 그래도 옛 선유 포구의 비경을 기억하는 나그네는 그저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나그네는 평사낙안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맸다. 새로 생긴 관공서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렵게 다시 찾은 평사낙안도 더 이상 예전의 평사낙안은 아니다. 망주봉 아래 바다에 형성된 모래톱이 모래사장으로 날아드는 한 마리 기러기 모습과 같다 해서 평사낙안이라 했다. 해안 도로를 만들며 섬을 둘러친 시멘트 옹벽 덕분에 평사낙안은 이제 그저 평범한 모래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선유 8경중 또 한 경치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조기떼가 떠나면서 옆 섬 장자도 밤바다를 밝히던 '장자어화'도 사라져버렸으니 먹을 것 없는 바다에서 기러기가 떠나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어째서 이 나라는 '자연 유산'을 망치는 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것일까. 어째서 신이 만든 '자연 정원'이 사람 손으로 만든 인공 정원이나 건축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일까. 만인의 것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일까.

 

원래 군산인 선유도, 장삿배 구름처럼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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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 주변의 섬들이 고군산 군도로 이름 지어진 것은 선유도의 옛 이름이 군산도였기 때문이다. 조선 태조 때 군산도에 수군진이 설치됐다. 세종 때 지금의 군산 땅, 옥구군 북면 진포로 진을 옮기면서 이름도 가져가 진포가 군산포진이 되었고 군산도는 고(古)군산도가 되었다. 본래 군산이란 이름은 바다 한 가운데 산들이 무리지어 있다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택리지는 군산도가 옛적부터 산들이 많고 부유한 섬이었다고 소개한다.

 

"군산도는 전라도 만경바다 복판에 있으며 역시 첨사가 통할하는 진영이 설치되어 있다. 온통 돌산이고 뭇 봉우리가 뒤를 막았으며 좌우를 빙 둘러 앉았다. 그 복판은 두 갈래진 항구로 되어 있어 배를 감출 만하고 앞은 어장이어서 매년 봄여름에 고기잡이철이 되면 각 고을 장삿배가 구름처럼 안개처럼 몰려들어 바다 위에서 사고 판다. 주민은 이것으로 부유하게 되어 집과 의식을 다투어 꾸미는데 그 사치한 것이 육지 백성보다 심하다."(이중환, 택리지)

 

백사장 길을 지나 선유 3구로 간다. 과거 선유 3구는 선유도의 영적 중심이었다. 선유도의 주산인 망주봉과 신당인 오룡묘가 있다. 선유 2구와 선유 3구를 이어주는 모래톱을 사람들은 명사십리 해변이라 부른다. 백사장 길이는 5리도 못돼는 1.5킬로미터에 불과하니 지명은 비유적이다. 아마도 옛날에는 선유 2구와 3구가 서로 다른 섬이었을 것이다. 오랜 세월 모래가 쌓여 두 섬은 하나로 이어졌을 것이다. 

 

바다와 나무와 햇빛보다 그저 ‘오락’에 바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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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래 톱 위에도 전에 없던 해안도로가 생겼다. 그 길로 자동차와 사발이와 오토바이와 전동 골프카가 쌩쌩 달린다. 하지만 찻길의 편리함을 얻은 대신 명사십리 해변은 '명사'를 잃었다. 모래사장은 바닥을 드러내 군데군데 자갈밭이다. 해안 도로를 내면서 만든 시멘트 옹벽 탓에 더 이상 모래가 쌓이지 않고 유출되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에 도로를 만드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관광수입으로 먹고사는 해수욕장에 도로를 낸 것은 치명적이다. 여름 피서 철에는 인천 등지에서 모래를 사다가 뿌리는 일이 해마다 반복된다. 그래야 해수욕장이 유지된다. 그나마 남아 있는 모래밭도 갯벌화되고 있으니 모래를 보충하지 않으면 명사십리 해변은 머잖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어장에서 떨어져 나온 통발 하나가 파도에 휩쓸려 백사장에 뒹군다. 통발 안에서는 불가사리와 꽃게, 벌떡게 시체 몇이 썩어간다. 해안도로를 따라 청춘 남녀들이 전동 골프카를 타고 달리며 괴성을 지른다. 청춘은 머나먼 작은 섬에 와서도 바다와 나무와 햇빛을 느끼고 해변을 산책하기보다는 오락을 즐기느라 여념이 없다. 섬은 놀이 공원이다. 머리 보다 몸이 앞서는 세대. 누가 사유의 부재를 탓하랴. 생각 없이 사는 것도 고통스런 한 세상 건너는 지혜일 수도 있는 것을.

 

Untitled-4 copy.jpg선유 3구 남악마을 가는 길가에 새 한 마리, 처참히 죽어 있다. 골프카 앞 유리에 부딪히고 깔려 죽은 듯하다. 사람에게 요긴한 통유리가 새들에게는 무덤이다. 유리를 분간 할 수 없는 새들이 수도 없이 날아가다 부딪혀 죽는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이 자주 인간 아닌 것들에게 해롭다. 물이 빠진 선유 3구 갯벌에서도 아낙네들은 바지락을 캐고 남정네들은 낙지를 잡는다.

 

 

외래신에 쫓겨난 오룡묘, 가여운 토착 신들

 

선유 3구 '밭 너머' 마을 부두에 철부선이 들어온다. 차량을 실은 철부선은 선유 2구가 아니라 선유 3구가 종점이다. '밭 너머' 마을에서 망주봉을 돌아가면 새터 마을이다. 이 마을 망주봉 중턱에 선유도의 신당 오룡묘가 있다. 예전에는 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숲이 울창해져 길이 사라지고 없다. 바위에 매달린 밧줄을 잡고 암벽등반을 한 뒤에야 간신히 오룡묘에 이를 수 있다. 오룡묘는 1990년, 신당을 돌보던 마지막 무당이 죽은 뒤부터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 

 

오룡묘 신당을 비롯한 선유도의 전통 신앙은 이 섬에 유입된 기독교의 탄압으로 소멸되고 말았다. 오룡묘에는 아직도 두 개의 신당 건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아랫당에 봉안되었던 오구유왕, 명두 아가씨, 최씨 부인, 수문장, 성주 등 다섯 토착신의 화상은 도난당하고 없다. 당에는 근자에도 공을 들이고 간 흔적이 남아 있다. 규모가 작은 윗당은 임씨 할머니 당이다. 윗당에 모시던 산신과, 칠성님, 임씨 할머니 세 분의 화상도 도난당한 지 오래다. 윗당은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마루는 뜯겨져 아주 폐허가 되고 말았다. 허물어져가는 당집은 노거수 그늘에 파묻혀 소멸의 시간을 기다린다. 가여운 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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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섬의 수호신으로 살아온 토착 신들. 신당은 오랜 세월 섬의 안전을 지켜주고 풍어를 도와준 토착 신들을 모시던 신전이다. 지금 당집에 살던 신들은 외래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쫓겨나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지만 그 신들이야말로 섬사람들의 현세 삶에 복을 주던 신들이 아닌가. 이미 간곳 모를 신들을 다시 모셔오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그러나 신들이 살던 집을 신들의 공덕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만드는 일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외래 신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더 이상 조상의 신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글·사진/강제윤(http://blog.naver.com/bogil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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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