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의 짐승같은 욕정에 몸 날린 절망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사량도 옥녀봉
비극적 사랑 품은 남매바위는 애틋하기나 하지…
뭍에서 불과 30분, 한려수도 수려한 풍경 한눈에

 
img_01.jpg

통영시 사량도 유스호스텔 뒷길로 옥녀봉에 오른다. 등산로 길바닥이 닳을 대로 닳아 윤이 반질반질하다. 얼마나 많은 등산객들이 다녀간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겠다. 왜 아니겠는가. 뭍에서 불과 30분 거리의 섬, 한려수도의 수려한 풍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산길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수십만명이 천년 걸려도 못할 일을 단 며칠 만에 뭉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분재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가고, 난과 야생화를 뽑아가느라 산을 훼손시키지만 않는다면 산마루가 닳고 등산화 바닥이 닳도록 다닌들,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다닌들 이 섬의 산이 쉽게 없어지거나 바다 속으로 꺼져버리기야 하겠는가. 등산객들 중 일부 철부지들이 산보다 산에서 얻어갈 것을 찾아 산을 헤집고 다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등산객들은 그저 산을 호흡하고 느끼다 갈 뿐이다.  
 
육지의 산이나 섬의 산이나 산을 훼손하는 범인은 등산객들이 아니다. 돈에 눈먼 토목업자들, 지방세수 증대를 핑계로 골재 채취와 석산 개발 따위 허가를 쉽게 내주는 자치단체들이야말로 파괴의 주범이고 공범들이다. 그들이 산 하나 잘라내고 섬 하나 들어내는 것은 순식간이다. 그렇게 사라진 산과 섬들이 부지기수다. 등산객 수십만명이 천년 걸려도 못할 일을 그들은 단 며칠 만에 해치운다.
 
그러므로 등산객들이 참으로 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산을 즐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토목업자들에 의해 파괴되는 산을 지키는 데도 앞장서야 마땅하다. 그래야 그들에게 비로소 산에 올라 머물 수 있는 영주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골프장이나 골재 채취, 도로 건설 등으로 파괴되는 산을 지키기 위해 산악인들이 앞장섰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의무를 행하지 않으면서 권리만 누려온 것이다.
 
img_02.jpg
 

이 산하에 그렇게 살다 간 처녀들이 어디 옥녀뿐이랴

 
오늘 나그네는 옥녀봉에 올라 사량도 앞바다를 본다. 생래적인 섬의 슬픔을 엿본다. 옛날 사량도에 옥녀라는 처녀가 아비와 둘이 살고 있었다. 어미는 옥녀를 낳은 지 얼마 안 돼서 죽었다. 옥녀는 자라면서 점차 죽은 어미를 쏙 빼닮아갔다. 어느 순간 옥녀에게서 여자를 느낀 아비는 욕정을 참지 못하고 딸인 옥녀를 겁탈하려 들었다. 옥녀는 한사코 도망쳤지만 아비는 점점 더 무섭게 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옥녀는 아비에게 말했다.
 
 “아버지가 하려는 것은 차마 사람으로서 할 도리가 아닙니다. 짐승이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먼저 산에 올라가 있겠습니다. 아버지도 오늘 밤 자시까지 산으로 올라오시면서 소 울음소리를 내십시오. 그러면 제 몸을 허락하겠습니다.”
 
옥녀는 슬픈 마음으로 산에 올라가 아비가 잘못을 깨닫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한 시간이 되자 산 아래서 “음머 음머~” 하는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짐승으로 돌변한 아비의 모습에 절망한 옥녀는 바위에서 풀쩍 뛰어내렸다. 옥녀가 죽음으로 치욕스런 삶에 저항했던 바위가 지금의 옥녀봉이라 전한다. 이 산하에 옥녀처럼 살다 간 처녀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남매 사이의 비극적인 연애를 전해주는 소매물도의 남매바위나 백아도의 선단여 전설은 애틋함이라도 있으나, 옥녀의 전설은 그저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대체 저 ‘수컷’인 아비들을 어찌할 것인가.
 
 시인·<섬을 걷다> 저자 bogilnara@hanmail.net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