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파시 (11)
 
 
  소연평 꼭대기 실안개 돌고 우리 집 문턱엔 정든님 들고
  돈 실러가세 돈 실러가세 연평 바다로 돈 실러가세
  뱀자네 아주마이 인심이 좋아서 막뚱딸 길러서 화장이 줬다네
  백년을 살자고 백년초를 심었더니 백년초가 아니라 이별초드라
  바람아 강풍아 불지를 말아라 고기잡이 간 님 고생하네
 (후렴) 니나 니나 깨노라라 아니 놀고 무엇할 소냐
                                           <연평도 니나나 타령>

 
 
연평도 여자들은 뱃일 나간 남자들의 무사귀환과 풍어를 기다리며 물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바가지 장단을 치며 즉석에서 매김 소리를 넣고 부르던 그 노래가 <니나나 타령>이다. <니나나 타령>은 연평도의 아리랑이었다. 뱃사람의 아낙들은 언제 남편을 잃을지 모르는 불안을 노래를 통해 잊으려 했다.
 
정월 대보름이면 아이들은 달마중을 나갔다. 말린 풀을 자기 나이 수만큼 작은 단으로 묶어 들고 뒷동산에 올랐다. 보름달이 떠오르면 풀단에 불을 붙여 달님에게 운수와 건강을 빌었다. 달집태우기. 달이 떠오르는 것을 가장 먼저 본 아이가 그해 운수가 가장 좋다고 믿었지만 장난하고 노느라 아이들은 달이 떠오르는 순간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달이 떠오르면 아이들은 달을 쳐다보며 기원했다.
 
1960년대 연평도의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살림살이가 다들 고만고만했다. 배를 부리는 연평도 사람 중에는 한 4~5년 조기잡이를 해서 돈을 벌면 뭍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충청도 지방으로 나가 논을 사서 농사를 지었지만 인천 등지에 상점을 여는 사람도 있었다. 연평도에는 조기만이 아니라 굴과 조개, 새우(白蝦)도 많이 났다. 1936년 8월에는 연평도에 몰려든 새우잡이 어선이 600여 척에 달하기도 했다. 연평도 사람들은 굴을 깨거나 새우젓을 담아두었다가 연백에 나가 쌀이나 조 등의 곡식과 바꿔왔다. 한번 굴 장사 갔다 오면 벼나 조가 몇 가마씩 쌓였다. 그것으로 일 년치 양식을 했다. 굴은 쩍이 하나도 없이 깨끗하게 씻은 뒤 볏짚으로 엮은 ‘굴 오재비’에 담아 가서 팔았다. 방수가 되는 굴 오재비에는 바닷물을 채워 굴의 신선도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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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동이 이고 물장사 하던 연평도 여자들

 
조기잡이 배들이 들어오면 연평도의 여자들도 바빠졌다. 연평도에 정박한 배들은 물과 식량, 장작 등을 보급받았다. 여자들은 이때를 틈타 물을 팔기 위해 물동이를 이고 갯가에 늘어섰다. 동쪽의 된진몰 해안부터 서쪽의 소상개 해안까지 물동이를 인 여자들이 물을 이어 날랐다. 여자들은 허벅지까지 바닷물에 빠져가며 한 통이라도 더 팔기 위해 이 배에서 저 배로 옮겨다녔다. 수천 척의 배가 보통 열흘 넘게 마실 물을 저장해야 했으니 동네의 큰 우물이 자주 말랐다. 한 배당 3~5드럼(50~60동이)의 물이 필요했다. 물은 주로 초등학교 앞 큰 우물이나 천주교회 앞 우물에서 길러 날랐다. 밤에 물을 퍼놨다가 아침에 조기 배들이 들어오면 내다팔았다. 물 값은 돈으로도 받고 생선으로도 받았다. 배에서는 조기 외에도 홍어, 민어, 도미 등의 잡어를 말려 놨다가 물과 바꿔먹기도 했다. 어느 해 봄에는 물 때문에 연평도 청년들과 일본 어선 간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가사키에서 온 일본 선원들이 연평도 여자들에게 물을 사지 않고 함께 배를 타고 왔던 일본 여자들을 시켜 우물에서 물을 직접 길러 간 것이 발단이었다. 그 때문에 연평도 청년들이 정박해 있는 일본 어선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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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가 번성해도 대부분의 주민들에게는 별다른 이익이 돌아가지 못했다. 1957년 국립박물관 조사단이 흑산파시를 조사하고 남긴 기록으로 미루어 연평파시 또한 일부 선주를 제외한 지역주민들의 이익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평파시 때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간통에 조기를 저리고 굴비 말리기 등의 품팔이로 작은 소득을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품팔이를 나간 주민들은 대체로 글이나 숫자를 몰라 임금을 받을 때면 조약돌을 쌓아가며 셈을 했다. 조기 임자에게 돈을 받아 조약돌 숫자대로 나눠가졌다. 파시 때면 아이들도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다. 용돈벌이에 조기를 이용했다. 어른들 곁에서 배운 대로 어른들 흉내를 냈다. 외상으로 빵을 사서 배를 돌아다니며 선원들에게 팔았다. 선원들은 조기를 주고 빵을 사줬다. 그것으로 용돈벌이가 됐다. 연평도 땅이 온통 널어 말리는 조기천지였으니 아이들은 또 조기를 슬쩍 주어다 엿이나 호떡을 바꿔 먹기도 했다. 큰 조기 두 마리를 가져가야 호떡 한 개를 줄 정도로 조기 값이 쌌다.
 
당구장, 빵집, 야바위꾼까지 몰려들던 파시
 
Untitled-3 copy.jpg일제시대부터 파시 때면 백조환과 녹두환 등 두 척의 연락선이 인천과 해주에서 연평도까지 매일 운항할 정도로 연평도에는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파시 때 연평어업조합 하루 출납고가 조선은행의 출납고보다 많다고 할 정도로 연평도는 돈이 넘치는 황금의 땅이었다. 조기가 그대로 현금이었다. “돈 실러가세, 돈 실러 가세, 황금바다 연평바다로 돈 실러 가세”라고 부른 노래는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민요였다.
 
파시가 서면 수많은 상점들이 새로 생겼지만 색시 집과 함께 가장 많은 소득을 올린 곳은 선구점이었다. 연평도의 선구점은 외지인뿐만 아니라 김동문, 박홍표 씨 등 이재에 일찍 안목이 트인 몇몇 연평사람들도 경영했다. 선구점에서는 어구는 물론 쌀과 장작 등 선상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물품을 팔았다. 사람들이 넘치는 파시 때는 모든 장사꾼들이 바가지를 씌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짧은 순간에 한몫을 잡아야 했으니 정상적인 상도덕이나 질서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법이야 완전 무법이야, 무법천지” 파시 때면 쌀을 사러가도 제대로 무게를 달아 주지 않았다. 주인이 담아주는 것이 한 가마고 한 말이었다. 무게를 달아보자고 하면 “그럼 딴 데 가서 사”라며 배짱을 부렸다. 물건이 부족하니 속는 줄 알면서도 속았다. 해상이나 지상이나 파시의 주인은 어부들이 아니었다. 장사꾼들이었다. 파시 때면 잡화점, 약국, 목욕탕, 이발소, 당구장, 옷가게, 고무신 가게, 빵집, 과일 가게 등 없는 것 없이 다 생겼다. 색시를 두지 않고 자기 집에서 막걸리만 빚어 파는 주민들도 있었다. 강변 자갈밭에는 엿장사와 호떡장사, 야바위꾼도 몰려들어 판을 벌였다.  
 
그때는 ‘뺑뺑이’라 부르는 야바위도 성행했다. 뺑뺑이는 번호 매긴 표적을 세우고 총으로 맞히면 건 돈의 두 배를 가져가는 도박이었다. 노점에서는 붕어빵이나 찐빵도 팔았다. 주민들도 엿이나 묵, 두부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연평도 주민 강순환 씨가 하는 냉면집도 인기가 좋았다. 시장통에는 떡집, 국수집도 즐비했다. 낮에 시장에 나가면 물건을 사려는 색시들이 즐비했다. 잡화점에서는 색시들이 옷도 사고 분도 사고 신발도 사갔다. 파송 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어부들이 아이들 옷가지며 신발 등속을 사갔다.
 
해방 전까지는 일본 사람도 여러 집 살았다. 배를 만드는 스기목(삼나무) 수입상을 하던 ‘하마다’라는 일인은 황해도 전역에 대한 삼나무 공급 허가권을 갖고 있었다. 그의 집은 ‘갱변’ 쪽의 2층 목조주택이었는데 선주들은 그의 집 앞에서 어선을 지었다. 인천이나 해주의 선주들도 그에게 삼나무를 사기 위해 연평도를 찾아왔다. 파시가 서면 하마다는 선구점도 크게 열었다. 일본에서 물품을 직접 가져다 팔았다. ‘이께다’는 파시 때 목욕탕을 했다. 장작불로 물을 끓여 목욕물을 댔다. 그는 연평도에 처음으로 포도원을 열고 포도를 재배하기도 했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기획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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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