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널린 조기…돈 실러 가세”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연평도 파시 ⑥
일본서 온 안강망 그물, 아귀 닮은듯
물살 흐름 빠른 사리 때 기다려 조업

 Untitled-18 copy.jpg
 
돈 실러 가세 돈 실러 가세
연평 바다로 돈 실러 가세

 
연평바다에 널린 조기
양주만 남기고 다 잡아 들이자

 
뱀자네 아즈마이 정성덕에
연평바다에 도장원 했네

 
나갈적엔 깃발로 나가고
들어올 적엔 꽃밭이 되었네

 
연평장군님 모셔 싣고
연평 바다로 돈실러 가세  

 
(연평도 배치기 소리) 
 

 
1904년경 나가사키지방 어선들 연평 진입
 
구한말 안강망(鮟鱇網) 어선이 도입된 이래 연평도에서는 1960년대 초까지도 조기잡이 어선은 안강망어선이 주류였다. 안강망은 물살이 빠른 곳에서 자루그물을 조류에 밀려가지 않게 고정해 놓고 물고기들을 조류의 힘에 의하여 강제로 함정에 빠뜨려 잡는 함정 어법이다. 연평도 조기 파시 때 안강망 어선들은 바람을 동력으로 가는 풍선(돛단배)이 대부분이었다. 일제 시절에도 기계배들이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고 6·25 이후에야 안강망 어선들의 기계화가 진척되었다. 1960년대, 어선들이 본격적으로 기계화하면서 안강망어선들도 대부분 기계배로 바뀌었다. 안강망 어선의 본 고장은 일본의 나가사키(長崎) 지방이었다. 나가사키에서 출어한 어선들이 연평 어장에 안강망을 처음 들여온 것은 1904년 경. 하지만 빠른 물살 때문에 그물이 자주 파손 되어 손해가 많았다. 나가사키 어선들은 한동안 안강망을 철수했다가 서해안의 조류에 맞게 개량한 뒤 1908년 무렵부터 다시 안강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후 안강망 어법은 급속히 조선의 어선들로 퍼져 나갔다. 안강망(鮟鱇網)은 일본어 ‘앙꼬(鮟鱇)’에서 왔다. 그물 모양이 ‘앙꼬어’(아귀)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Untitled-19 copy.jpg

안강망 배는 50발(한발은 1m 60cm) 쯤 되는 자루그물의 끝을 닻에 매달아 바다 속으로 던져 바닥에 고정시킨 뒤 조류에 떠밀려 그물 입구로 들어온 조기떼를 포획했다. 사람 입술 모양의 그물 입구는 암해의 침력과 수해의 부력에 의해 열고 닫힌다. 암해는 참나무로 묶어 돌을 매단 뒤 밑으로 가라앉히고 수해는 굵고 긴 통대를 십여 개씩 묶어서 위로 띄웠다. 물에 뜨는 수해를 만들기 위해서는 굵은 참대를 일본에서 수입해 썼다. 조업은 조금 때를 빼고 내내 계속됐다. 닻에 고정시킨 안강망 그물은 주야로 하루 네 번씩 “물이 벙벙한 ‘감참’(간조, 만조) 때 물을 봤다.” 조류의 흐름이 멈추는 때라야 물살의 저항 없이 작업을 손쉽게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망선에서 안강망, 자망, 유자망 어선으로 변천
 
풍선(風船)인 안강망 배는 두 폭의 돛을 달고 다녔다. 안강망 배는 흔히 중선(中船) 배라고도 했는데 대선과 소선의 중간 크기 배란 뜻이다. 경기지방에서는 네발에서 다섯 발 반까지 길이의 배를 중선이라 했다. 돛은 배 중심의 허릿대에 큰 돛을 달았고 배 앞쪽 이물대에 작은 돛을 달았다. 철저히 바람에만 의지해야 했으니 남쪽 바다에서 올라온 배들이 소연평도까지 왔는데도 남풍이 안 불어 주면 꼼짝없이 몇 날이고 연평도로 가지 못하고 붙들려 있어야 했다. 배에는 큰 노가 두 개 있었지만 “안타까워서 노질을 할뿐” 덩치 큰 배가 움직일 리 만무했다. “바람 길이 터지기를 기다리면서 그냥 닻 주고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Untitled-20 copy.jpg

안강망 배와 함께 연평어장을 누빈 또 하나의 주인공은 걸그물을 사용한 자망(刺網) 배와 흘림 걸그물을 사용한 유자망(流刺網) 배였다. 60년대 들어 면사그물을 대신한 나이론 그물의 보급으로 자망(刺網)과 유자망 어선들이 늘어났다. 자망은 수건 모양의 그물을 물속에 수직으로 펼쳐서 닻으로 고정 시킨 뒤 물고기들이 그물코에 꽂히게 하는 어법이다. 자망 배는 새벽에 그물을 놨다가 오후 3~4시경에 거둬들였다. 유자망은 그물을 닻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물결을 따라 흘려보내서 그물코에 물고기들이 꽂히게 하여 잡아들이는 어법이다. 안강망 어선이 도입되기 전 연평도에서 조기잡이 배는 망선(網船)이었다. 선수가 뭉툭하고 규모가 큰 망선은 이동이 쉽지 않았다. 돛은 허릿대와 이물대 외에도 뱃머리에 야거리대라는 작은 돛까지 세 개를 달고 다녔다. 새끼줄과 칡넝쿨로 만들어진 그물은 너무 무거웠다. 그래서 망선에는 보통 삼사십 명이나 되는 선원들이 승선해야 했다. 그에 비해 안강망 어선은 가벼운 면사 그물을 사용한 덕에 7~8명의 선원으로도 충분히 조업이 가능했다. 1930년경에는 안강망 배에 밀려 망선은 자취를 감췄다. 
 
산란직전 울어대는 조기들의 소리로 추적
 
Untitled-17 copy.jpg

바다에서의 조업은 물때에 좌우된다. 밀물과 썰물의 들고 남이 큰 때를 사리(大潮)라 하고 작은 때를 조금(小潮)이라 한다. 바닷물이 들고 나는 것은 달의 인력 때문이다. 태양과 달, 지구가 일직선을 이루는 음력 보름과 그믐에 조차가 가장 큰 것은 달의 인력과 태양의 인력이 합해지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이 직각을 이루면 태양의 힘 때문에 달의 당기는 힘이 약해진다. 조수가 거의 없는 이때를 조금이라 한다. 보름 간격으로 조금과 사리가 교차한다. 일반적으로 조금은 음력 5~9일 사이와 20~24일 사이의 물때다. 나머지 기간은 사리 물때로 본다. 조수의 활동이 활발한 사리 때는 물살이 빠르고 조수의 활동이 미약한 조금 때는 물살의 흐름이 약하다. 조기잡이 어선들의 조업은 대체로 사리 물때에 이루어졌다. 물살의 흐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안강망어선의 조업은 조수의 흐름에 크게 좌우된다. 안강망 어선은 물살의 흐름이 거의 없는 조금 때는 조업을 할 수 없다. 물살이 빠른 사리 때를 기다려 조업에 나섰다. 자망이나 유자망 배는 조금 때도 조업이 가능했지만 조금 때는 조기가 잘 잡히지 않는 탓에 조업에 거의 나가지 않았다. 물살이 약해 조기들이 그물에 꽂히지 않았던 것이다. 
 
현재와 같이 어군 탐지기가 없었던 과거 조기잡이 배들은 울대(대통)를 바다에 넣어 조기 우는 소리를 듣고 조기떼를 쫓았다. 조기는 산란 직전에 울었다. 같은 종의 물고기들끼리는 소리로 의사전달을 하는 능력이 있다. 민어는 개구리처럼 꽉꽉 울었지만 조기우는 소리는 바람이나 소나기 퍼붓는 소리처럼 들렸다. 조기를 비롯한 민어과의 어류들은 부레의 벽에 있는 근육을 이용해서 소리를 내는데 위협을 느꼈을 때나 산란 시기에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낸다. 조기 철이면 연평도가 조기떼 우는 소리에 잠 못 이룬 것은 그 밤, 조기들이 무리지어 교배와 산란을 하며 고통과 환희의 울음을 울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쟁기 준다’는 말이 ‘그물 내린다’는 뜻
 
Untitled-21 copy.jpg

어선들은 조기떼를 찾으면 ‘쟁기’를 줬다. 그물을 내리는 것을 ‘쟁기 준다’고 했다. 조기가 많을 것 같은 해역을 찾은 사공이 닻을 내리고 “여기주자”하면 뱃동사들은 합심하여 “쟁기”를 줬다. 쟁기를 준다는 표현은 농사를 제일로 치는 농경사회의 뿌리 깊은 관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강망 배들은 그물을 걷어 올려 그물 끝에 묶은 줄을 풀어내 조기를 털었고, 자망 배들은 그물을 올린 뒤 걸려든 조기를 하나씩 따냈다. 자망 배들이 하루 한번 물을 보는데 비해 안강망 배들은 하루 네 번 물이 들고 나가는 때마다 물을 봤다. 안강망 그물에 든 고기가 너무 많아 자루를 들어올리기 어려우면 자루가 긴 뜰채인 ‘테’로 퍼 날랐다. ‘테’는 젊은 선원들 서너 명이 달라 붙어야했다. 운이 좋으면 안강망 배 한척이 한 물 때에 백이삼십 동까지도 잡았다. 조기 배들은 십여 일을 바다위에서 생활하다 조금 때가 되면 연평도로 귀항했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