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 초파일은 연평도 조기 생일”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2009.06.17 17:13 너브내 Edit
연평도⑤
“정월 보름 밥 먹으면” 흑산도까지 원정
씨알 굵고 기름진 조기들이 그물 한가득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의 바다물고기다. 조기(助氣)란 이름은 사람의 원기 회복을 돕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조기의 머리에는 돌 같은 이석(耳石)이 두 개 들어 있어 석수어(石首魚)라고도 한다. 산란을 위해 회유한다 해서 유수어라고도 불렀다. 민어과의 조기는 전 세계의 바다에 160여종이 살아간다. 미국 연해에 80여종, 한국의 바다에는 5속 13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수심 40~160미터의 펄 지대나 모래 바닥에 살며 새우, 멸치나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이로 한다. 1년이면 15cm, 5년이면 40cm까지 자란다. 동의보감에는 복통이나 설사, 위장병에 특효라는 기록도 있다.

흑조기, 꽃조기, 참조기, 백조기, 보구치, 수조기, 부세, 눈강달이, 황강달이, 민어, 민태 등이 모두 조기류의 물고기다. 참조기는 황금조기, 노랑조기로 불린다. 황강달이는 지방마다 황세기, 황석어, 황실이 등의 다양한 이름이 있다. 참조기는 조기류 중에서 육질이 쫄깃하고 가장 맛이 뛰어나다. 참조기는 별칭처럼 몸 빛깔이 회색을 띤 황금색이다. 과거 연평 어장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것은 참조기떼다. 일반적으로 조기라하면 이들 참조기를 일컫는다.
동지나해에서 월동한 뒤 흑산도 앞바다로
회유성 어종인 조기떼는 해마다 거대한 군집을 이루어 기나긴 산란 여행을 떠난다. 조기떼는 한반도 서해 산란군과 함께 중국 산동반도 연안, 양자강 북부, 남부 산란군 등 4개의 산란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의 산란군은 겨울에는 동지나해에서 월동을 한 뒤 봄이면 산란장으로 회유 한다. 한국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서해 산란군은 2월 초 부터 북상하는데 2월 하순이면 흑산도 근해에 도달한다. 그래서 흑산 바다는 가장 먼저 형성되는 조기어장이었다. 어선들은 흑산도, 가거도, 홍도, 비금, 도초도 인근의 바다를 넘나들며 조기를 잡았다.
연평도의 조기잡이 배들도 조기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돛단배(風船)들도 조기떼를 쫓아 흑산도 어장까지 내려갔다. 보통 “정월 보름 밥 먹으면” 출어가 시작됐다. 하늬바람을 기다려 순풍에 돛달고 남으로 향했다. 바람이 제 때만 불어주면 연평도에서 흑산도까지도 이삼일이면 충분했다. 더러 바람 운이 나쁘면 열흘 이상씩 걸리기도 했다. 바람이 배를 잘만 밀어주면 당일에 흑산도까지 직행하는 일도 있었다. 기계배가 생기면서부터는 뱃길이 단축됐다. 1960년대 연평도의 기계배들은 흑산도까지 27~8시간이 걸렸다. 흑산 어장에는 전국 각지의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었다. 1967년에는 연평도 선적 수길3호가 흑산도에 조업 나갔다가 큰 파도를 만나 “한결(한물결)에 엎어져버린” 적도 있었다. 선원 8명 중에 3명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조기잡이 배엔 분과 술 냄새가 코를 찌르고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오면 흑산도에 파시가 서고 색주 집들은 어부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부두에 배가 정박하면 술집색시들이 뱃고사를 빙자해 고사 술이란 것을 들고 배에 올라왔다. 분단장한 색시들이 따라 주는 술을 거절할 수 있는 사내들은 없었다. 그것이 “쥐약”이었다. 색시들은 서로 자기 술집으로 오라고 어부들을 유혹했다. 손님을 못 모셔오면 주인에게 혼이 난다고 하소연도 했다. 분 냄새에 회가 동한 선원들은 못이기는 척 색시들 손에 이끌려 술집으로 향했다. 흑산도에서는 주먹만 한 주전자에 청주를 담아 담아내는 순배 술이 유명했다. 한 순배에 얼마씩 계산 했다. 바가지는 기본. 목숨 걸고 머나먼 바다까지 조업 나왔지만 많은 어부들은 주색에 빠져 돈을 모을 수 없었다. “너나없이 적자가 안 나면 다행”이라 했다. 집에 가져다주는 것은 출어 전에 선주에게 선도지로 받은 쌀 두세 가마가 전부였다. 아내는 찬바람 속에 굴 깨다 살림 사느라 고생하는데 돈 벌러 나간 서방들은 어렵게 번 돈을 색주가에서 다 탕진했다. “술을 마실 때는 좋은데 돌아 나올 때는 늘 아쉽다”고 후회하면서도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조기떼 도착 알려주는 철쭉꽃과 살구꽃
조기잡이 배들은 흑산도 어장에서 두 달 정도 조업을 하다가 음력 3월 초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이면 조기떼도 칠산 어장에 도착해 산란을 시작했다. 영광의 칠산이나 위도 어부들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조기떼의 도착을 알아챘다. 칠산 어부들은 철쭉꽃이 피면 조기가 칠산 바다에 도달한 것을 알았고 위도 어부들은 마을의 살구나무 고목에 살구꽃이 활짝 피면 위도 앞바다에 조기떼가 나타난 것을 알아챘다. 조기는 밀물 때 연안을 향해 몰려드는데 그때는 바다의 바닥에 붙어서 이동한다. 썰물 때면 조기는 다시 바다로 빠져나가는데 그때는 수면에 가깝게 이동한다. 이러한 조기의 습성을 익히 잘 아는 어부들은 조기떼의 이동로를 따라 밀물 때는 바다 속 깊이 그물을 놓고 썰물 때면 해수면 가까이 그물을 쳤다.
위도 근해를 통과해 북상한 조기들 중 이른 놈들은 3월 하순이면 벌써 연평도 앞바다에 당도했다. 조기잡이 배들도 조기떼를 쫓아 칠산어장과 위도, 안마도, 어청도, 석섬 바다로 올라오며 조기를 잡았다. 늦은 무리도 4월 초파일이면 모두 연평도 해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연평도에서는 4월 초파일을 ‘조기 생일’이라 불렀다. 청(靑)골은 조기가 연평어장으로 들어오는 문턱이었다. 5월 초, 중순의 입하, 소만 사리 무렵이면 남쪽에서 올라온 조기떼가 안흥 바깥의 ‘멍디기’를 지나 청(靑)골 바다를 통해 연평 어장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망종 때까지 4 사리, 두 달 남짓 연평 어장에서의 조기잡이가 이어졌다. 청골로 들어오는 조기는 금방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많이 잡기는 어려웠지만 처음 잡는 조기라 가격이 높았다. 연평 바다로 들어오는 조기들은 씨알이 굵어졌고 하나같이 기름지고 살이 올랐다. 연평 조기를 최상품으로 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입하 사리 무렵이면 조기떼가 구월이 안골까지 들어갔다. 가장 좋은 조기어장인 구월이 안골 바다에서는 자리다툼도 심했다. 쟁기(그물)를 먼저 줬는데 다른 배가 와서 앞을 가로막고 쟁기를 주면 어선들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황해도 구월반도 아래가 산란장 최적지

연평 바다로 북상한 조기떼는 4월 하순에서 5월 하순까지 연평도 인근 바다에서 산란을 하며 머물렀다. 연평도 조기의 주 어장은 연평도 북서쪽 4~5km 인근 바다였다. 연평보다 북서쪽으로 돌출한 황해도 구월반도 아래 바다와 등산이(등산곶) 앞 바다가 황금어장이었다. 구월이 안골이나 등산이 바다는 작은 여와 모래 갯벌이 발달해 산란장으로 최적지였다. 해주만과 옹진반도, 연백의 수래 포구 등지에 씻겨 내려오는 토사가 조기의 주식인 동물성 플랑크톤의 풍부한 먹이가 돼주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조기떼는 닭섬 바깥 골이나 밭새, 고래안골, 물발이 세서 무서운 용호도 근처의 학골 바다, 거첨도, 뱅여섬(뱅여골) 등지에서도 많이 잡혔다. 운이 좋은 배들은 닭섬 바깥 골에서 한 물때에만 무려 “130동을 잡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구월이 안골 바다 등 북쪽 바다에는 넘어 갈 수 없도록 통제 됐지만 군함들이 감시하고 있어도 많은 어선들이 몰래 넘어갔다. “죽고 사는 게 문제냐. 못 벌고 못 먹으면 죽는 판에” 하는 심정이었다.
6월 초면 다시 머나먼 남쪽 바다로
망종 무렵(6월초)이면 다시 조기떼의 이동이 시작됐다. 조기떼가 연평 어장으로 들어올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알을 까고 나갈 때는 “하늘에서 천둥만 빵빵거리면 없어져 버렸다.” 한마디로 천둥번개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이다. 조기떼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쫓아가 잡을 엄두도 못 냈다. 그와 동시에 연평 어장의 조기잡이도 끝났다. 산란장에서도 살아남은 조기떼는 평북의 운무도, 서차도, 대화도를 지나 신의주 앞바다 사자도 해역까지 북상해 마지막 조기 어장을 형성했다. 거기서 더 북상한 조기들은 중국 대련(大連)앞 바다를 거처 산동성 근해를 돌아 남하했다. 또 한 차례 남쪽 머나먼 바다로의 기나긴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정월 보름 밥 먹으면” 흑산도까지 원정
씨알 굵고 기름진 조기들이 그물 한가득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의 바다물고기다. 조기(助氣)란 이름은 사람의 원기 회복을 돕는 물고기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조기의 머리에는 돌 같은 이석(耳石)이 두 개 들어 있어 석수어(石首魚)라고도 한다. 산란을 위해 회유한다 해서 유수어라고도 불렀다. 민어과의 조기는 전 세계의 바다에 160여종이 살아간다. 미국 연해에 80여종, 한국의 바다에는 5속 13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수심 40~160미터의 펄 지대나 모래 바닥에 살며 새우, 멸치나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이로 한다. 1년이면 15cm, 5년이면 40cm까지 자란다. 동의보감에는 복통이나 설사, 위장병에 특효라는 기록도 있다.

흑조기, 꽃조기, 참조기, 백조기, 보구치, 수조기, 부세, 눈강달이, 황강달이, 민어, 민태 등이 모두 조기류의 물고기다. 참조기는 황금조기, 노랑조기로 불린다. 황강달이는 지방마다 황세기, 황석어, 황실이 등의 다양한 이름이 있다. 참조기는 조기류 중에서 육질이 쫄깃하고 가장 맛이 뛰어나다. 참조기는 별칭처럼 몸 빛깔이 회색을 띤 황금색이다. 과거 연평 어장을 황금빛으로 물들인 것은 참조기떼다. 일반적으로 조기라하면 이들 참조기를 일컫는다.
동지나해에서 월동한 뒤 흑산도 앞바다로
회유성 어종인 조기떼는 해마다 거대한 군집을 이루어 기나긴 산란 여행을 떠난다. 조기떼는 한반도 서해 산란군과 함께 중국 산동반도 연안, 양자강 북부, 남부 산란군 등 4개의 산란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의 산란군은 겨울에는 동지나해에서 월동을 한 뒤 봄이면 산란장으로 회유 한다. 한국 서해안으로 올라오는 서해 산란군은 2월 초 부터 북상하는데 2월 하순이면 흑산도 근해에 도달한다. 그래서 흑산 바다는 가장 먼저 형성되는 조기어장이었다. 어선들은 흑산도, 가거도, 홍도, 비금, 도초도 인근의 바다를 넘나들며 조기를 잡았다.
연평도의 조기잡이 배들도 조기가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돛단배(風船)들도 조기떼를 쫓아 흑산도 어장까지 내려갔다. 보통 “정월 보름 밥 먹으면” 출어가 시작됐다. 하늬바람을 기다려 순풍에 돛달고 남으로 향했다. 바람이 제 때만 불어주면 연평도에서 흑산도까지도 이삼일이면 충분했다. 더러 바람 운이 나쁘면 열흘 이상씩 걸리기도 했다. 바람이 배를 잘만 밀어주면 당일에 흑산도까지 직행하는 일도 있었다. 기계배가 생기면서부터는 뱃길이 단축됐다. 1960년대 연평도의 기계배들은 흑산도까지 27~8시간이 걸렸다. 흑산 어장에는 전국 각지의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들었다. 1967년에는 연평도 선적 수길3호가 흑산도에 조업 나갔다가 큰 파도를 만나 “한결(한물결)에 엎어져버린” 적도 있었다. 선원 8명 중에 3명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조기잡이 배엔 분과 술 냄새가 코를 찌르고
조기잡이 배들이 몰려오면 흑산도에 파시가 서고 색주 집들은 어부들의 주머니를 노렸다. 부두에 배가 정박하면 술집색시들이 뱃고사를 빙자해 고사 술이란 것을 들고 배에 올라왔다. 분단장한 색시들이 따라 주는 술을 거절할 수 있는 사내들은 없었다. 그것이 “쥐약”이었다. 색시들은 서로 자기 술집으로 오라고 어부들을 유혹했다. 손님을 못 모셔오면 주인에게 혼이 난다고 하소연도 했다. 분 냄새에 회가 동한 선원들은 못이기는 척 색시들 손에 이끌려 술집으로 향했다. 흑산도에서는 주먹만 한 주전자에 청주를 담아 담아내는 순배 술이 유명했다. 한 순배에 얼마씩 계산 했다. 바가지는 기본. 목숨 걸고 머나먼 바다까지 조업 나왔지만 많은 어부들은 주색에 빠져 돈을 모을 수 없었다. “너나없이 적자가 안 나면 다행”이라 했다. 집에 가져다주는 것은 출어 전에 선주에게 선도지로 받은 쌀 두세 가마가 전부였다. 아내는 찬바람 속에 굴 깨다 살림 사느라 고생하는데 돈 벌러 나간 서방들은 어렵게 번 돈을 색주가에서 다 탕진했다. “술을 마실 때는 좋은데 돌아 나올 때는 늘 아쉽다”고 후회하면서도 해마다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조기떼 도착 알려주는 철쭉꽃과 살구꽃
조기잡이 배들은 흑산도 어장에서 두 달 정도 조업을 하다가 음력 3월 초부터 이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이면 조기떼도 칠산 어장에 도착해 산란을 시작했다. 영광의 칠산이나 위도 어부들은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조기떼의 도착을 알아챘다. 칠산 어부들은 철쭉꽃이 피면 조기가 칠산 바다에 도달한 것을 알았고 위도 어부들은 마을의 살구나무 고목에 살구꽃이 활짝 피면 위도 앞바다에 조기떼가 나타난 것을 알아챘다. 조기는 밀물 때 연안을 향해 몰려드는데 그때는 바다의 바닥에 붙어서 이동한다. 썰물 때면 조기는 다시 바다로 빠져나가는데 그때는 수면에 가깝게 이동한다. 이러한 조기의 습성을 익히 잘 아는 어부들은 조기떼의 이동로를 따라 밀물 때는 바다 속 깊이 그물을 놓고 썰물 때면 해수면 가까이 그물을 쳤다.
위도 근해를 통과해 북상한 조기들 중 이른 놈들은 3월 하순이면 벌써 연평도 앞바다에 당도했다. 조기잡이 배들도 조기떼를 쫓아 칠산어장과 위도, 안마도, 어청도, 석섬 바다로 올라오며 조기를 잡았다. 늦은 무리도 4월 초파일이면 모두 연평도 해역에 도착했다. 그래서 연평도에서는 4월 초파일을 ‘조기 생일’이라 불렀다. 청(靑)골은 조기가 연평어장으로 들어오는 문턱이었다. 5월 초, 중순의 입하, 소만 사리 무렵이면 남쪽에서 올라온 조기떼가 안흥 바깥의 ‘멍디기’를 지나 청(靑)골 바다를 통해 연평 어장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망종 때까지 4 사리, 두 달 남짓 연평 어장에서의 조기잡이가 이어졌다. 청골로 들어오는 조기는 금방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많이 잡기는 어려웠지만 처음 잡는 조기라 가격이 높았다. 연평 바다로 들어오는 조기들은 씨알이 굵어졌고 하나같이 기름지고 살이 올랐다. 연평 조기를 최상품으로 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입하 사리 무렵이면 조기떼가 구월이 안골까지 들어갔다. 가장 좋은 조기어장인 구월이 안골 바다에서는 자리다툼도 심했다. 쟁기(그물)를 먼저 줬는데 다른 배가 와서 앞을 가로막고 쟁기를 주면 어선들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황해도 구월반도 아래가 산란장 최적지

연평 바다로 북상한 조기떼는 4월 하순에서 5월 하순까지 연평도 인근 바다에서 산란을 하며 머물렀다. 연평도 조기의 주 어장은 연평도 북서쪽 4~5km 인근 바다였다. 연평보다 북서쪽으로 돌출한 황해도 구월반도 아래 바다와 등산이(등산곶) 앞 바다가 황금어장이었다. 구월이 안골이나 등산이 바다는 작은 여와 모래 갯벌이 발달해 산란장으로 최적지였다. 해주만과 옹진반도, 연백의 수래 포구 등지에 씻겨 내려오는 토사가 조기의 주식인 동물성 플랑크톤의 풍부한 먹이가 돼주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조기떼는 닭섬 바깥 골이나 밭새, 고래안골, 물발이 세서 무서운 용호도 근처의 학골 바다, 거첨도, 뱅여섬(뱅여골) 등지에서도 많이 잡혔다. 운이 좋은 배들은 닭섬 바깥 골에서 한 물때에만 무려 “130동을 잡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구월이 안골 바다 등 북쪽 바다에는 넘어 갈 수 없도록 통제 됐지만 군함들이 감시하고 있어도 많은 어선들이 몰래 넘어갔다. “죽고 사는 게 문제냐. 못 벌고 못 먹으면 죽는 판에” 하는 심정이었다.
6월 초면 다시 머나먼 남쪽 바다로
망종 무렵(6월초)이면 다시 조기떼의 이동이 시작됐다. 조기떼가 연평 어장으로 들어올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알을 까고 나갈 때는 “하늘에서 천둥만 빵빵거리면 없어져 버렸다.” 한마디로 천둥번개처럼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이다. 조기떼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쫓아가 잡을 엄두도 못 냈다. 그와 동시에 연평 어장의 조기잡이도 끝났다. 산란장에서도 살아남은 조기떼는 평북의 운무도, 서차도, 대화도를 지나 신의주 앞바다 사자도 해역까지 북상해 마지막 조기 어장을 형성했다. 거기서 더 북상한 조기들은 중국 대련(大連)앞 바다를 거처 산동성 근해를 돌아 남하했다. 또 한 차례 남쪽 머나먼 바다로의 기나긴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