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선과 어부는 바다에 늙고 섬은 뭍으로 뭍으로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2008.08.21 18:03 너브내 Edit
[강제윤시인의 섬기행] ④ 항일의 섬 소안도
동학 뿌리…북청 동래와 함께 독립운동 ‘곳집’
한때 노화·보길과 한 생활권…해수욕장 썰렁
완도 화흥포항에서 소안도행 여객선에 오른다. 본격적인 휴가철이지만 피서객들은 많지 않다. 그래도 모처럼 여객선은 활기차다. 뱃전에서 웃고 장난치고 신이 난 아이들. 휴가철이 끝나면 여객선은 다시 고요해질 것이다. 선실 바깥 나무 의자에 섬 노인들이 나와 앉았다. 노인들은 뛰어 다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다음 주에 오기로 한 당신 손주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휴가철이 와도 고향에 올 수 없는 자식들 걱정을 하는 걸까.
안개 속에서 횡간도의 사자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 정상의 바위가 사자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 나그네는 저 동물이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아니면 늑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사자면 어떻고 호랑이면 또 어떠랴. 무엇이건 움직일 수 없는 돌 사자, 돌 호랑이에 불과한 것을.
포구 들머리 ‘항일 성지’ 비석에 긍지
과거 소안도는 인근의 노화, 보길과 한 생활권이었다. 완도와의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소안도는 자연히 육지가 된 완도 생활권으로 편입됐다. 고립된 섬이 육지 사람들에게는 때때로 낭만적 흥취를 자아내지만 섬사람들은 늘 육지를 지향한다. 섬의 육지에 대한 열망은 가히 절대적이다. 과거 섬사람들은 고립으로 인해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육지와 교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보길도, 노화도, 소안도 사람들은 스스로 남 3면(완도 남부에 있는 세 개의 면)이라 부르며 연대 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교통이 좋아진 지금은 그런 공동체 의식이 거의 사라졌다. 그것이 되살아나는 것은 오직 선거 때뿐이다.
소안항에 내리면 섬의 역사를 알리는 비석 하나가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항일 성지 소안도.' 비석에서는 어떤 긍지 같은 것이 느껴진다. 소안항에서 2㎞ 남짓 들어가면 면소재지인 비자리다. 비자리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비석 세 기가 서 있다. 영세 불망비. 두 기는 제주 목사의 것이다. 제주 목사는 부임길에 소안도에 들러 어떤 치적을 남겼던 것일까.
비자리 선창머리에는 늙은 어부 한 사람이 낡은 목선을 수리중이다. 어부는 부서진 배 후미에 각목을 대고 못질을 한다.
"통발을 막을라고, 배가 없으께 우선 이놈을 고치요. 보길도에다 쌔내기 한 대를 사 놨는데 아직 못 갖고 왔소."
기관이 배 바깥에 달린 선외기를 여기서는 보통 '쌔내기'라 부른다. 일반 기관 배는 경유를 쓰지만 모터가 달린 선외기는 휘발유로 가는 고속선이다. 노인은 낙지 통발 어업을 한다. 어부들은 비자리 앞바다 갯벌에 줄지어 서 있는 '마장'에 통발을 매달아 낙지를 잡는다. 낙지 통발에는 장어도 들고, 게도 들고, 볼락 같은 작은 물고기도 든다. 노인은 못질한 각목을 배 후미에 맞춰 톱으로 자르고 대패로 다듬는다. 노를 저어서 가는 배, 섬 사람들이 '노전배'라고 부르는 작은 목선을 아직껏 부리는 어부는 드물다. 목선과 어부는 바다에서 함께 늙어 버렸다. 펄쩍, 망치질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목선 바로 앞에서 숭어가 뛴다.
낙지 통발이 주업 “아이고 생활하기 힘들어요. 힘들어”
"내다 버릴 것인디, 우선 바닥(바다)에 나가서 일할 배가 없어논게. 낼부터 낙지 통발 들어 가께. 이라고(이렇게) 고처 쓰요. 이 배만 한 이 십년 썼소."
비자리 어민들은 7월 말부터 11월까지 마을 앞 바다에서 통발 어업을 한다. 수협의 입찰이 시작되면 도시의 중간상들이 들어와 낙지를 사간다. 작년(2007년)에는 1㎏에 4500원까지 갔다.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작은 것 1㎏이면 10마리 남짓. 어부가 마리당 450원 정도에 파는 낙지를 소비자들은 두세 마리 한 접시에 이삼 만원씩 주고 사먹는다. 어부의 손을 떠나면 낙지의 몸값이 열 배 스무 배 뛰는 것은 시간문제다. 통발을 매는 마장은 해마다 제비뽑기를 통해 새로 분배한다. 낙지가 잘 드는 곳이 있고 덜 드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디가 있고 나쁜 디가 있고, 잘 난 디가 있고 안 난 디가 있지라우. 그래 제비뽑기를 안 하요. 그래야 무법천지가 안되지라우."
노인은 낙지 통발이 끝나면 바다에서는 별달리 해먹을 것이 없다. 젊은 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양식으로 큰돈을 벌지만 노인들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인들은 비교적 힘이 덜 드는 낙지 통발에 기대고 산다. 노인은 통발이 끝나는 철이면 건축판에 막노동을 나간다. 섬에서도 노인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하다.
"아이고 생활하기 힘들어요. 힘들어."
동학군 군사훈련소…인구 6천명에 ‘불령선인’이 800명
소안면 소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 항일운동 기념탑과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일제시대 소안도는 함경도의 북청, 부산의 동래와 더불어 독립운동이 가장 강성했던 곳 중 하나였다. 1920년대에는 6천여 명의 주민 중 800명 이상이 불령선인으로 낙인 찍혀 일제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소안도 항일해방운동의 뿌리는 갑오년의 동학혁명에서 시작된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의 접주 나성대가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다. 이 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다. 동학군의 군사 훈련 때 소안도 주민들은 군사들의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김옥균을 살해했던 홍종우의 밀고로 이순보, 이강락 등 몇몇 주민들이 청산도로 끌려가 관군의 손에 총살당했다. 이준화는 동학군과 함께 도피한 뒤 살아남아 1909년 1월 의병들을 이끌고 소안도 인근의 당사도 등대를 습격해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한다.
일제하 소안도에서의 항일 운동은 소안 출신 송내호와 김경천, 정남국 등에 의해 주도됐다. 이들에 의해 조직된 수의위친계, 배달청년회, 소안노농대성회, 마르크스주의 사상단체 살자회, 일심단 등의 항일운동 조직이 소안도와 완도 일대의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후일 송내호는 서울청년회와 조선 민흥회, 신간회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했고 정남국은 일본으로 건너가 재일 조선인노동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외딴 섬 소안도에 항일운동의 씨앗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화 학원'과 '사립 소안학교'란 텃밭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화 학원'은 1913년 송내호, 김경천 등에 의해 설립됐다. '중화학원'이 '사립 소안학교'의 모태가 됐다.
토지 강탈 맞서 13년 투쟁… 뭍에서 유학생들 몰려들어
1905년, 궁납전이던 소안도의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한 것은 사도세자의 5세손 이기용 자작이었다. 소안 주민들은 토지를 되찾기 위해 1909년 '전면 토지소유권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한 뒤 무려 13년 동안이나 법정투쟁을 해 1922년 2월에 승소했다.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소안 사립학교를 세웠다. 당시 소안학교에는 인근의 노화, 청산은 물론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들이 몰려올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924년, 2차 소안 노농대성회 사건을 시작으로 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을 큰집처럼 드나들었었다. 1920~1930년, 소안도 관련 신문보도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백 명에 달한다. 기록만으로도 뜨거웠던 항일의 열기가 짐작된다. 그때 감옥으로 끌려간 주민들을 생각하며 섬사람들은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 않고 잤으며 일제의 경찰에 말을 하지 않는 '불언 동맹' 등으로 일제의 폭압에 맞섰다. 1927년, 마침내 일제는 해방운동의 저수지였던 소안학교를 강제 폐쇄시켰다.
하지만 해방 후에도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져 있었다. 친일파가 득세한 해방 조국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항일 운동가들은 숨죽여야 했다. 송내호 선생은 1963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지만 그것은 그가 1928년, 일제하에서 34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안도 항일운동의 역사는 1990년 소안면 비자리에 항일 독립운동 기념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복권됐고 해방 60년이 넘은 최근에야 독립운동 기념관이 들어섰다.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다.
'완도 향교지'는 "다른 지역에 비해 기개가 용맹하므로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어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所安)이라 했다"고 소안도의 지명 유래를 기록하고 있다. 소안도 사람들의 그러한 기질이 소안도를 항일운동의 메카로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피서객들 흔적 치우다보니 짜증만” 주민들 시큰둥
한창 휴가철이지만 소안도의 미라리 해수욕장은 한가하다. 피서객은 20여명 남짓이나 될까. 주민들이 차린 계절 음식점에는 손님 하나 없다. 대부분이 먹을 것을 차에 싣고 오기 때문에 피서객들이 섬에서 쓰고 가는 돈은 거의 없다.
"주민들은 관광객들 별로 안 반가워해요. 갈아주는 것도 없고. 흔적이 너무 커요. 그런 흔적 치우다보니까 짜증만 나는 거죠. 전복, 김발 해서 안 그래도 먹고 살 만한디."
주민들은 섬에 보탬이 되지 않는 피서객들이 마뜩치 않은 듯하다.
"지금은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서울서 싣고 와요. 물 한 병도 안 사먹고. 보리차물 끓여와 빌고."
설령 관광객들이 섬에 와서 돈을 쓰고 간다 해도 이익을 보는 것은 일부 숙박업자나 상인들뿐이다. 나머지 주민들에게는 털끝 만한 이익도 없다. 오히려 고달플 뿐이다. 피서철이면 마을 도로변의 풀을 베고 피서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모두 주민들 몫이다. 해수욕장을 나와 미라리 마을 안길로 들어서니 마을 할머니들 몇이 모여 앉아 걱정스런 한숨을 짓고 있다.
"여그까지 와 갖고 죽을라고 그랬으까."
"아따, 아따, 아따 아그들."
간밤에 마을 방파제에서 낚시하던 사내가 실종됐다. 데리고 온 아이들은 차에서 잠이 들고 사내는 밤낚시를 하다 실족사한 것이다. 아직 시신을 찾지 못했다.
"아따, 아따 뭔 일이까잉."
"아따, 아따 아그들은 얼마나 미치가까잉."
사내는 어떤 사연이 있어서 아이들만 데리고 이 먼 섬까지 왔던 것일까. 이제 아이들은 어찌 살아야 할까. 할머니들은 모두 자기 일이라도 되는 양 안타까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그란블로, 그란블로, 아들네, 아들네 불쌍해서 어짜가이."
문득 세계가 낯설어진다. 우리는 결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각기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 하나의 세계가 소멸했지만 다른 세계는 변함이 없다. 나그네는 여전히 숨을 쉬고 홀로 길을 간다. 푸른 바다, 어선들, 김 양식 준비를 하는 어민들, 집과 자동차들, 두런거리는 노인들, 부모 손을 잡고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해변의 아이들 깔깔거리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온다.
글·사진 강제윤(http://blog.naver.com/bogiln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