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오고 밀려나는 게 바닷물뿐이랴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② 교동도


왕성 바다관문으로 ‘평양보다 더 짜임새 있는 곳’
고려 때부터 왕족 전용 유배지…왜구 침탈 극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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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창후리에서 교동도의 월선포 간․직선 항로는 느린 배로 건너도 20분 거리다. 하지만 항해 시간은 물때에 따라 차이가 크다. 간조 때는 평소의 두 배가 넘는 50분이 걸린다. 오늘 오후 배는 간조 물때에 걸렸다. 썰물은 두 섬 사이의 바다를 개울처럼 얕게 만들어 직항로를 끊어 놓는다. 바로 앞에 목적지를 두고도 여객선은 길게 돌아간다. 강화 본섬 해안을 따라 남하하던 여객선이 석모도 섬돌모루 부근에서 급히 뱃머리를 돌려 북진한다. 

 

경기 황해 충청 해군사령부 주둔…왜구 한때 소작까지

 

Untitled-3 copy 5.jpg교동도는 민간인 출입 통제선(민통선) 안의 섬이다. 휴전선을 기점으로 남북이 각각 2킬로미터씩 뒤로 물러난 남방 한계선과 북방 한계선 안의 지역이 비무장 지대다. 민통선은 비무장 지대 남방 한계선에서 다시 남쪽으로 5~20킬로미터 사이에 그려져 있다. 민통선은 1954년 2월, 미 육군 8군 사령관이 직권으로 그어놓은 선이다. 미국 군인이 한국 땅에 임의로 그어놓은 선에 불과하지만 한국인들에게 민통선은 법보다 무서운 강제력을 가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전장(戰場)에서 무력은 법보다 우위에 있다.

 

교동은 북의 황해도 연백과 강화도를 사이에 두고 드넓다. 연백과는 불과 5킬로미터 거리. <택리지>에서 "깊고 넓으며 한없이 크다"고 한 곳이 바로 교동과 강화 일대다.

 

"교동도와 강화도 두개의 큰 섬이 바다 가운데 일자로 가로 뻗어 남쪽으로는 바다를 막았고, 북쪽으로는 한강 하류를 담아, 은연중에 앞 산 너머를 둘러싸서 깊고 넓으며 한 없이 크다. 동월(董越)이 '평양과 비교하여 더욱 짜임새 있다'고 한 곳이 바로 여기다."(택리지 '산수')

 

지금은 면단위 행정 관청이 있는 한적한 섬이 되었지만 오랜 세월 교동은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교동에 경기, 황해, 충청의 수군을 관할하는 해군 사령부, 삼도통어영까지 있었다. 교동과 강화는 오랜 세월 고려의 도읍지인 송도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관문 역할을 했다. 왕성의 관문이었던 교동은 강화와 함께 서남해의 어느 섬보다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에 시달려야 했다. 남부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선과 세곡선의 길목이었던 때문이다. 

 

1360년 왜구는 강화에서 백성들 300여명을 살해하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해 갔고 1371년에는 고려의 병선 40여척을 불태우는 등 끊임없이 약탈과 살륙을 자행했다. 왜구의 침략에도 기울어 가던 고려의 조정은 무능했다. 정규군이 맞섰지만 제대로 전투 한 번 치러보지 못하고 전멸 되거나 도주하기 일쑤였다. '교동군지'에 따르면 심지어 왜구들이 교동도에 장기간 주둔하며 주민들의 토지를 강탈해 소작을 주고 소작료를 받아가기까지 했다 한다. 고려 왕성을 코앞에 두고 왜구들이 섬을 직접 통치한 것이다.

 

특급 유형수 감시 안성맞춤…역사 유적은 흔적조차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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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은 연산군의 유배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아니더라도 유독 많은 왕족들의 유배지이기도 했다. 교동이 왕족 전용 유배지가 된 것은 늘 대규모 군대가 주둔해 있고 송도나 한양과 가까운 섬이었기 때문이다. 특급 유형수들을 감시하기에 교동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1221년 고려 무신정권 하에서 21대 왕 희종이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조선 시대 들어서는 세종의 아들이자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이 그의 아들 우직과 함께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됐다. 광해군의 형이었던 임해군 또한 진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으로 이배된 뒤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 7년에는 인조의 동생인 능창대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뒤 불태워져 죽었다. 그 외에도 광해군의 왕비였던 유씨와 왕족이었던 은언군, 익평군, 영선군 등이 교동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유배 온 조부 은언군을 따라왔던 철종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교동도에 살았다.

 

하지만 이 땅 어느 곳처럼 교동 또한 역사 유적은 거의 자취가 없다. 과거 관청이 있었던 읍내리에는 교동읍성 성문 한 곳의 홍예문만이 간신히 남아 있다. 이 읍내리에 조선 10대 왕 연산군의 유배지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연산군이 교동으로 유배된 것은 중종 반정이 있던 1506년 9월이었다. 연산군은 교동에서 3개월 남짓 유배 생활을 하다 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大臣)·대간(臺諫)·시종(侍從)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에 옮기고 연산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총서)

 

패악한 권력이 있는 게 아니라 권력 속성 자체가 패악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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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중종의 '실록'은 연산군 폐위부터 유배, 사망까지의 일들을 속보로 전한다. 반정의 순간까지 기미도 못 채고 주연에 빠져 있던 연산의 처신은 초라했다. 그는 왕위를 뺏기고도 목숨을 살려준 동생 중종의 성은에 그저 감읍할 뿐이었다. 온갖 호사와 권력을 다 누려본 자라도 삶에 대한 미련은 쉽게 버릴 수가 없는 것인가.

 

"전왕을 교동(喬桐)에 안치(安置)하였다. 밤 2고(鼓)에 봉사(奉事) 안윤국(安潤國)이 와서 아뢰기를, "폐주는 갓[笠]을 쓰고 분홍 옷에 띠를 띠지 않고 나와서, 땅에 엎드려 가마에 타며 말하기를, '내가 큰 죄가 있는데, 특별히 상의 덕을 입어 무사하게 간다.' 했으며....."( 중종 1년, 1506년 9월 2일)

 

반정의 핵심 인물 박원종은 연산군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의 동생이었다. 연산군은 큰어머니 박씨 부인을 겁탈했고 박씨 부인은 목을 매 자결했다. 박씨 부인의 동생 박원종이 집안에 치욕을 준 '왕'을 폐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박원종 등이 의논하여, 전왕을 봉하여 연산군으로 삼았다."(9월 3일)

 

기사는 연산군이 교동에 유폐되는 순간과 유배지의 풍경을 스틸 사진처럼 정교하게 전한다. 유배지 교동에서도 연산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겨운지 연신 감격한다.

 

"폐왕이 말을 전하기를, '나 때문에 멀리 오느라 수고하였다. 고맙고 고맙다'라고 하였다."(9월7일)

 

새 임금은 '패악'한 전 왕에 대해 혈육의 정마저 끊기 어려웠던가 보다. 물품을 보내고 가시 울타리를 3미터쯤 뒤로 물리게 하는 성은을 베푼다. 하지만 중종 또한 머지않아 조카들을 죽인 패악한 삼촌이 될 터였다. 패악한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속성이 패악한 것이다. 삼촌은 우환거리를 없애기 위해 조카들을 몰살시킨다. 

 

"폐세자 이황·창녕대군 이성(李誠)·양평군 이인(李仁) 및 이돈수(李敦壽) 등을 아울러 사사(賜死)하였다."(9월24일)

 

연산군의 외가였던 고을과 왕후 신씨의 고향 마을은 반정의 피해를 입고 강등 당하고 연산군이 좋아하던 물품의 교역도 금지된다. 연산군은 스스로의 목숨을 그토록 귀히 여겼으나 유배지에서 목숨의 보전은 쉽지 않았다. 교동 유배 삼 개월만에 죽음을 맞이하자 왕은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러 준다. 

 

영욕 지켜본 400살 ‘우주목’ 물푸레나무엔 어떤 신령이…

 

Untitled-3.jpg면 소재지에서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고구리 마을이다. 마을은 교동의 너른 들에 물을 대는 저수지가 있다. 교동은 강화에서 논이 가장 많은 면이다.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2만여 평에 이른다.

 

고구리 저수지를 지나 마을 숲으로 들어선 것은 물푸레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디선가 천년목이라는 소문을 들었던 터였다. 확인해보니 물푸레나무는 400년 수령의 보호수다. 천년목이 아니어도 물푸레나무는 신령스런 숲의 주인이다. 이 땅에서는 물푸레나무가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북유럽 신화의 이그라드실 물푸레나무는 '하늘과 땅, 지구의 중심까지 삼계를 이어주는 우주목'이다. 북유럽 신화에서는 주신인 오딘까지도 물푸레나무에게 지혜를 얻어가곤 한다.

 

불과 백 년을 살기 어려운 인간에게도 세월의 경륜이 쌓이면 지혜가 생기고 혜안이 열리는데 하물며 수 천 년을 사는 나무들에게 어찌 신령이 깃들지 않을 까닭이 있겠는가. 유럽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는 우주목 신화가 널려 있다. 중국의 <산해경>에도 우주목이 등장한다.

 

"건목(建木)이 있는데 태로가 하늘을 오르내렸고 황제가 가꾸고 지켰던 나무다."(산해경, '해내경')

 

오에 겐자부로는 그의 소설을 통해 어려서 들었던 '나의 나무'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을의 숲에는 사람들마다 '나의 나무'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은 뿌리를 통해 모두 '나의 나무'에게로 돌아간다. 사람은 세속에 있으나 나무는 신령한 세계에 속한다.

 

한국의 우주목 신앙은 마을마다 산재해 있었다. 당산나무는 사람의 기도를 전해 듣고 신에게 전해주는 중간자이지만 지혜 깊은 나무는 더러 사람들의 추대로 신이 되어 마을의 안녕과 사람의 안전을 보살피기도 했다.  

 

하지만 유일신교의 유입 이후 당산 신앙을 비롯한 이 땅의 토착 신앙은 초토화 되었다. 당집이 헐리고 당산나무가 베어진 것은 이 땅의 정신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우주목이나 당산나무 신앙 등의 토착 신앙은 결코 미신이 아니다. 그것을 미신이라 배척한다면 세상에 배척당하지 않을 종교는 없다. 본디 미신 아닌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선정의 유일한 증거는 선정비를 세우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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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 시대 교동과 강화는 마한의 옛 땅이었다. 후일 백제에 점령되었다가 광개토대왕 대에는 고구려의 점령지가 됐다. 고구려 때 처음으로 현(縣)이 설치되어 중앙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그 때의 이름이 고목근현(高木根縣))이었고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점령 된 뒤에는 교동현이 되었다. 조선조 말엽까지도 교동은 다섯 개의 면을 거느린 군이었다.

 

본래 교동은 화개산, 수정산, 율두산을 중심으로 한 세 개의 각기 다른 섬이 간척공사 등을 통해 하나의 섬으로 연결 되었다. 교동을 비롯한 인근의 강화도나 석모도 등에 유난히 '떠내려 온 섬'에 대한 전설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산기슭에서 발견되는 화석이나 조개껍질 등은 교동의 옛 지형을 말해 주는 증거다. 조선 개국 초에는 개성의 왕씨들을 다른 섬으로 이주시킨다고 속여 교동 앞바다에 수장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곳이 청지펄이다.

 

읍내리 교동 향교로 가는 길목에 비석들이 군집해 있다. 조선 시대, 교동을 다스리던 통치자들을 기리는 비석들이다. 안내판은 이 비석들을 "조선 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 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 겸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선정비인데 교동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자리에 모아 둔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직도 선정비가 선정을 베푼 자들을 기리는 비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선정을 베푼 관리들이 저리도 많은데 어찌 백성들의 삶은 온통 고통뿐이었을까.

 

많은 비석들이 수령들이 떠나기도 전에 서둘러 세워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금은 거의 소실되고 없지만 예전에는 교동 전 지역에 비석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가소롭게도 교동의 통치자들 대부분이 '자신의 손'으로 선정비나 영세불망비를 남긴 것이다. 선정비는 실상 통치자들이 자신의 악정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가 많다. 선정비를 세우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선정의 증거다. 하지만 못된 전통은 현대에 와서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어느 고을을 가나 군수, 시장 이름의 비석 하나 없는 곳이 없다.

 

공자 초상화 최초로 봉안된 ‘교동 향교’엔 태극기만 나부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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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비석군에서 직진하면 화개산 중턱에 화개사가 있고 교동향교는 그 오른 쪽 끝자락 산기슭에 자리해 있다. 교동향교는 이 땅에서 최초로 공자의 초상화가 봉안된 향교로 알려져 있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귀국 도중 교동향교에 공자의 초상화를 봉안했다. 향교는 문이 굳게 잠겨 있고 향교 안 마당에는 태극기만 나부낀다.

 

향교 대성전 건물 서쪽에는 성전 약수가 있다. 약수터 물이든 샘물이든 땡볕에 바가지로 땀을 쏟은 나그네에게는 모두가 감로수고 약수다. 안내판에는 '위장병 환자가 마시면 단기간에 완쾌된다고 전해진다'는 안내판이 서 있다.

 

학전(學田)이었을까. 향교 입구 논에서는 벼가 막 피기 시작했다. 향교 서쪽에는 논에 물을 대는 물방죽, 즉 작은 저수지가 있다. 고무호스가 논으로 연결되어 있다. 예부터 향교에 딸린 논에 물을 대던 저수지였을 것이다. 양반 유생들이 공부하던 향교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지만 유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노비와 농민들이 농사 짓던 논이나 저수지는 아무런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다. 향교는 죽은 교육 기관이지만 저수지와 논은 여전히 살아있는 유물이다. 실상 저런 저수지나 논이야말로 이 땅 농업 문화의 귀중한 유적이고 문화재가 아닌가. 저 논이 사라지면 저 작은 저수지도 순식간에 매워지고 말 것이다. 그렇게 사라져간 이 땅의 문화 유적이 얼마였을까.

 

강제윤 시인(http://blog.naver.com/bogil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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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