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에 모래가 서걱서걱 “이게 샌드(모래)위치”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모로코 보즈도르~모리타니아 노악초트/09.01.25~31
현지 동포 만나 금쪽같은 라면 3개 선물 받아
나무나 풀 조금씩, 2천㎞ 사하라 구간 끝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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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5일 오전 7시 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보즈도르에서 145㎞ 거리의 에초칸을 향해 출발하였다. 바람은 북풍이 불어 사하라의 길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도로는 자갈이 드러난 거친 길이었으나 사막을 달리며 바다를 볼 수 있고 또 차량 소통이 적어 한적한 길이었다.
 
먼 바다에서 돌고래 두 마리가 물장난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곳 해안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은회색의 모래사장과 거친 절벽 그리고 소리 내어 불어오는 바람과 흰 파도가 몰려오는 바다만이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자전거를 살펴보니 앞 타이어의 한쪽이 불룩 튀어나온 게 보였다. 그리고 자전거를 탔을 때 곧 타이어는 “펑”소리를 내며 터져버리고 말았다. 두 번째 타이어 펑크였다. 나는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GPS는 깜박깜박 타이어는 뻥, 결국 차 신세
 
오전 11시 반, GPS상으로 70㎞를 진행한 시점에서 나는 도로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GPS는 수시로 전원이 꺼져서 몇㎞는 더 진행한 시점이었다.
 
처음으로 손을 흔들어 보인 지프 차량이 내 앞을 조금 지나서 멈춰 섰다. 운전자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자 그는 차를 태워주었다. 250㎞ 떨어진 다클라로 이동해야 했다. 다클라까지는 타이어를 구입할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클라는 바다 가운데 길쭉하게 돌출된 땅으로 들어가는 길이 아름다웠다. 다클라의 한 호텔 앞에 도착하여 차를 태워준 프랑샤스(프랑스, 57세)와 함께 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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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클라에서 자전거 점포를 찾았으나 팔고 있는 타이어는 1.95인치밖에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앞 타이어 1.50인치짜리의 자전거에 1.95인치짜리 뒤 타이어를 새로 장착하였다.
 
호텔에서 독일인 자전거 여행자를 만났다. 아가디르에서 출발한 독일인 라이먼드(48세)였다. 그와 다음날 함께 주행하기로 하였다.
 
라이먼드는 케냐~사우스아프리카, 남미 일주, 유럽 일주 등 자전거여행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다. 라이먼드가 말했다.
 
“혼자 여행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지요. 자전거를 타고 가다 보면 동행자가 생기게 되니 늘 혼자는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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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6일 8시 반 다클라에서 카페오레를 한 잔씩 마시고 바람 부는 사하라를 향해 둘은 페달을 밟았다. 차로 들어왔던 길 다클라를 빠져나오는 40㎞ 구간은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었다. 라이먼드는 앞장 서서 시속 12~14㎞로 달렸고 나는 그의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맞바람 속의 주행은 에너지 소모량이 많아 40㎞ 주행 뒤 나는 지쳐버렸다. 앞장서 간 라이먼드는 나보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으나 별로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은 독일병정 같군요.”
“독일사람은 동물처럼 자전거를 탑니다.”
 
그의 마라톤 기록은 3시간08분. 자전거와 조깅을 즐기며 윈드서핑, 인라인, 스키, 등산 등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나는 그와 주행한 첫날부터 너무 강한 상대에 대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2시경 둘은 40㎞ 지점을 통과하였고 여기서부터 구름 한 점 없는 순풍이 부는 길로 들어섰다. 순풍이 부는 길은 바람이 멈춘 것처럼 무더웠고 질주하는 그를 따라 나는 구슬땀을 흘리며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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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바위 바람막이 삼아 텐트 치고 야영
 
“Fast! Fast!”
“Slowly Slowly go!”
 
둘은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며 태양만이 이글거리는 막막한 사막 길을 질주하였다. 오후 6시 137㎞를 주행한 지점에서 질주는 멈추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화산바위 사이에 텐트 칠 자리를 찾아 둘은 야영을 하였다. 우리는 빵과 치즈 그리고 따끈한 커피를 저녁으로 먹었고 하루의 주행을 마쳤다.
 
다음날 일출 때 라이먼드는 바위 위에 올라가 장난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다시 사막의 한가운데로 난 길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고운 모래들이 바람에 날려 아스팔트 위로 물결치듯 흘렸고 나는 코와 귀를 머프로 가리고 그의 뒤를 쫓아갔다.
 
“오전에는 정이 앞장서세요. 오후에는 내가 앞장서서 갑니다.”
 
그의 제안에 따라 내가 앞장을 서자 빨리 달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힘껏 달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처지는 기색이 있으면 그가 추월하려고 하여 나는 앞자리를 뺏길 수 없다는 생각에 더 빨리 달려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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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반에 출발하여 146㎞를 진행한 오후 4시 반에 주유소와 호텔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지도상에는 Secluded Hotel(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호텔)이란 표시가 된 곳이었다. GPS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나는 이동 거리를 라이먼드의 속도계를 보고 적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갑시다.”
 
지친 내가 먼저 말하였고 우리는 식사를 한 후 호텔비를 20디람 깎아 80디람에 묵을 수 있었다.
 
물 1.5리터 페트병 4통, 빵과 비스킷 등을 준비하여 1월28일 오전 8시께 90㎞ 거리의 모리타니아 국경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순풍을 타고 ‘마리아’(라이몬드 자전거 이름)와 ‘천마’는 사하라의 긴 길을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정오에 웨스턴 사하라의 출국심사대 앞에 도착하였다. 웨스턴 사하라에서의 출국수속은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 왔습니까?”
 
반갑게 우리말로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김종호씨로 모리타니아에서 수산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여기까지 왔다면서 갖고 있던 라면 3개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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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밭 위에 듬성듬성 집
 
김종호씨와 작별인사를 하고 모리타니아 입국심사대로 향하였다. 모리타니아로 들어가는 길은 바위와 모래투성이 길이 3~4㎞쯤 이어졌다. 자전거는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입국심사대를 통과한 시간이 오후 4시. 여기서부터 40㎞ 떨어진 보라노아란 도시를 향하여 달리기 시작하였다. 길은 동쪽으로 나 있었고, 바람은 북서풍이 몰아쳤다. 힘겨운 주행이 계속되었다. 라이먼드가 말하였다.
 
“내 뒤의 오른 쪽으로 붙어서 오세요.”
 
나는 그의 뒤쪽에서 조금이라도 바람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달렸다. 바람소리가 윙윙거리며 귓가를 스쳤다. 라이먼드는 맞바람을 맞으며 지칠 줄 모르고 꾸준히 페달을 밟았다. 놀라운 힘이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와 1m 이내의 거리에서 달려야 에너지 손실이 적었다. 간혹 새카만 꼬마 아이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우리는 40㎞의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서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보라노아에 도착했다. 라이먼드도 지쳐 보였다. 달려온 아이들이 그 도시에 하나밖에 없는 호텔로 안내해줬다. 모래밭 위에 듬성듬성 집들이 있는 도시였다. 호텔은 20유로를 받았고 닭다리 한 개가 포함된 저녁식사비는 3천 오귀야(1$=250오귀야)를 받았다. 가격이 비쌌다.
 
“이런 데서 20유로나 주고 자다니 텐트에서 자는 게 좋았겠어요.”
 
그는 변변치 않은 호텔과 식사비가 비싼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준비하며 말하였다.
 
“한국 라면 먹어볼래요?”
“글쎄요, 매우면 못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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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빵과 치즈로 아침식사 준비를 하였고, 나는 김종호씨가 준 라면 2개를 끓였다. 코펠 뚜껑에 라면국물과 면을 조금 덜어서 그에게 줬다. 맛을 보더니 “오, 좀 매워도 맛있군요” 하며 맛있게 먹었다. 나는 코펠에서 라면을 더 덜어서 그에게 주어야 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라면의 맛은 최고였다.
 
대도시 한두 군데 말고는 은행 없어 애 먹을 뻔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이 도시로 들어올 때 여기서 은행에서 돈을 찾거나 달러를 환전하면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리타니아는 수도인 노악초트나 대도시 한두 군데 말고는 은행이 없었다. 유로화가 아닌 달러는 소도시에서는 아예 환전을 해주지 않았다. 쓸 돈이 없는 나는 유로화를 갖고 있는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라이먼드를 만나지 않았다면 모리타니아에서 어떻게 여행을 했을지 나는 상상이 안 되었다.
 
오전 8시 반, 우리는 다시 짐과 물병을 자전거에 싣고 출발하였다. 라이먼드가 앞장섰다. 그는 여전히 힘 있게 쉴새 없이 페달을 밝았다. 바람은 아직도 우리를 밀어주지 않았다. 앞에서 부는 횡풍으로 힘든 길이 계속되었다. 한 무리의 낙타들이 사막을 배회하고 있었고 그 중엔 흰색의 낙타도 보였다. 아스팔트에 앉아 점심으로 빵을 먹는데 날려 온 모래가 함께 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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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샌드(모래)위치군요.”
“마리아만 계속 먹네요.”
 
비스킷 이름이 마리아로, 비스킷에 마리아 영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마리아는 그의 아내 이름이기도 하였다.
 
맞바람이 강할 때는 그는 늘 앞장을 섰고 나는 그의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갔다. 오후 6시 반까지 우리는 맞바람 부는 길을 힘들게 주행하여 92㎞ 지점에 이르렀을 때 한 캠프장이 나타났다.
 
캠프장에서는 숙박비로 4천 오귀야를 불렀다. 가격이 비싸서 다른 곳에 가서 텐트를 치겠다고 하자 다른 사람이 나타나 재흥정을 하였다. 1천 오귀야에 텐트 치고 자는 조건으로 그 곳에서 하루 밤을 머물 수 있었다. 저녁으로 1천 오귀야를 주고 염소고기가 조금 들어간 볶음밥을 먹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밥에는 모래가 많이 섞여 있었다.
 
“노악초트에 도착하면 빅 피쉬를 먹읍시다.”
“좋지요, 빅 피쉬!”
 
모리타니아에선 아랍어나 불어가 통용되었다. 영어가 안 통하는 곳에서 나는 라이먼드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숙련된 여행가답게 여러 언어의 몇가지 간단한 말을 구사할 수 있었다.
 
눈물이 땀과 뒤섞여 뺨으로 흘러내려
 
다음날 1월30일 오전 8시 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보며 안장 위에 올랐다. 길은 왼쪽으로 굽어지며 순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순풍에 자전거가 가벼워졌고 6일간의 계속된 주행에 다리는 무거웠으나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라이먼드가 앞에서 속도를 못 내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나왔다. 눈물은 땀과 뒤섞여 뺨으로 흘러내렸다. 맞바람 부는 구간을 늘 앞장서서 바람막이를 해준 라이먼드, 늘 ‘빨리! 빨리!” 하며 독촉하던 그가 속도를 못 내고 있었다. 나는 라이먼드를 추월하지 않고 약간 처져서 따라갔다. 정오쯤에 주유소와 레스토랑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닭다리 요리를 먹고 물과 부식을 준비했다. 그는 돈이 떨어졌다며 유로화를 환전하였다. 나는 100달러를 라이먼드에게 주고 유로화로 교환하였다.
 
“은행이 바로 옆에 있었군요.”
 
Untitled-10 copy.jpg식사 후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보며 라이먼드는 한 시간쯤 쉬다가 출발하자고 하였다. 내가 잠시 담배를 피우는 것도 불만이던 사람이 한 시간을 휴식하자고 한 것이다.
 
휴식 후 라이먼드는 어느새 몸이 회복되었는지 다시 빨리 달리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열어준 길을 우리는 달리기 시작하였다. 오후 5시반 쯤 나는 앞장선 라이먼드를 추월하였다. 그리고 마구 달리기 시작하였다. 다리 근육에서 찌릿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라이먼드가 한참 뒤로 밀리더니 쫓아오기 시작하였다. 내리막길에서 기어를 최고단으로 하여 페달을 밟았고 오르막길도 고단으로 거침없이 올라갔다. 한 시간의 질주는 멈추었고 161㎞를 진행한 지점에서 우리는 텐트를 칠 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다음날은 141㎞를 달려 모리타니아 수도 노악초트에 도착하였다. 여기서부터는 모래뿐이던 사막에 조금씩 나무나 풀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모로코의 보이자카르네에서 시작해 웨스턴사하라, 그리고 모리타니아까지 약 2천㎞의 사하라 구간을 지나온 것이었다. 여기서 세네갈까지 200㎞ 정도의 일부 사막구간이 남아 있으나 사실상 사막을 지나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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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