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달리다 스티커 끊어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08.10.23~28
서쪽으로 갈수록 숙박비 커져 경비 절대 비중
아름다운 산길 풍경에 ‘동화 속 나라’ 온 착각
 
8 copy.jpg주판자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했다. 5㎞쯤 달렸을 때 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스티커를 끊었다. 과태료 500쿠나를 내고 5㎞ 앞의 인터체인지까지 견인되었다. 경찰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견인되기 직전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서 유럽지도를 구입해 지도를 본 뒤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빠져나와 일반도로로 갈 예정이었다. 터키에서부터 영문 유럽지도를 구입하려 하였으나 살 수 없었다. 나의 GPS에는 일반도로는 나와 있지 않았고, 고속도로만 표시돼 있어서 나는 일반도로로 가는 방법을 몰랐다. 경찰은 냉정하게 스티커를 끊어서 나에게 주었다. 어쨌건 주판자 시부터는 고속도로 진입이 안 되는 곳이었다.
 
다음 인터체인지에서 견인차 운전사로부터 가는 길 초입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노바 글라디스카를 지나 다음날은 시삭까지 빠른 속도로 달렸다. 10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날씨가 쌀쌀해지기 시작하여, 가급적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는 것이 겨울에 유럽에 머무는 기간을 줄이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90년대 초의 내전의 상처로 곳곳 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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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집들은 도로변 양쪽에 늘어서 있다. 도로와 집 사이는 5m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사이에 빗물 도랑과 다리가 있고 땅에는 잔디나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가는 길 내내 대부분의 거리가 같은 모습이었다. 도로변의 집들은 도색을 새로 한 집들이 많아서 깔끔해 보였다. 그러나 가끔씩 폐가나 허물어진 집들도 보였다. 집에는 우물이 하나씩 보였는데 물이 풍부한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무가 많아서 공기가 매우 상쾌하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한 집 앞에 멈추었다. 집 안쪽에선 아낙네가 옥수수를 다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낙네가 무슨 일인가 하고 집 안에서 나왔다.
 
“여기 모습이 아름다워서 사진 좀 찍으려고 합니다.”
그녀는 살짝 웃어 보이며 옥수수를 계속 다듬었다.
 
집 안쪽에는 보통 옥수수를 보관하는 나무나 망사철망으로 된 큰 창고가 하나씩 있었다. 이 집은 지금까지 본 중에 옥수수가 가장 많은 집이었다. 가을의 풍요로움이었다.
 
5 copy.jpg성당의 종소리가 들렸다. 동네마다 아담한 성당이 한 두개씩 있는 동네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시삭으로 가는 길에 한 산길로 들어서자 폐가가 의외로 많았다. 잡초와 수풀 속에서 오래된 기와와 허물어진 벽들이 단풍과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그러한 폐가들이 자연 속에 묻혀 있어, 자연의 일부처럼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가면서 보니 그런 집들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무거워졌다. 아마 90년대 초의 내전의 상처가 일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날 저녁 시삭에 도착해 도시 중심에 있는 호텔을 찾아갔으나, 이 호텔은 고급 호텔이었다. 그 곳에서 다른 호텔을 물어, 다시 2㎞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호텔로 가서 숙박하였다. 가격은 330쿠나였으나 300쿠나로 깎아서 묵었다.
 
현재 유럽에서의 나의 위치는 유럽의 중앙쯤으로, 서쪽으로 갈수록 호텔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나의 여행경비 중 대부분이 숙박비와 식음료비로, 숙박비 부담이 절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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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삭에서 칼로박으로 가기 위해 호텔 여직원에게 길을 물었으나 그녀는 엉뚱한 길을 알려주었다. 한 주유소에 들러 길을 다시 물었다. 주유소 직원의 말을 따라 길을 갔다. 그 길은 칼로박으로 가는 길이긴 하였으나 내가 가고자 했던 지도상에 나타난 지름길이 아니었다. 42㎞쯤 갔을 때 그리나라는 작은 도시가 나타났고, 호텔 앞을 지나게 되었다. 시간은 오후 1시, 여기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크로아티아에서 슬로베니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칼로박까지 남은 거리가 60㎞였고 오전에 몇 개의 언덕 구간에서 지체하여 시간을 써버렸다. 하늘은 비가 올 듯 회색구름이 가득히 드리워져 있었다. 호텔로 들어가 여장을 풀기로 결정했다.
 
통돼지 바비큐 유혹 겨우 뿌리치고 밟고 또 밟고
 
10월26일 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60㎞ 거리의 칼로박을 지나 국경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가는 길이 고도 600m 정도의 산자락을 끼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1차선 외길이었다. 가끔 산속에는 집들이 서너 채씩 모인 마을이 나타났다. 가을산을 만끽하기에는 좋았으나, 이날로 슬로베니아로 입국해야 하는, 장거리의 부담스러운 길이기도 하였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마당에서 식구들이 장작을 패고 있는 한 집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뒷마당에 돼지가 돌아다니는,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집이었다.
 
열심히 페달을 밟아 국경에 도달한 시간이 오후 4시께였다. 슬로베니아의 입국심사관은 나에게 어디를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패스포트를 들여다  보더니 “집에서 멀리도 오셨네요. 자전거로 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지금까지의 입국심사관하고는 말이 달랐다. 그는 상대방 입장에서 말하였다.
 
부드러운 그의 말을 듣고 유럽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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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로 들어서서 두 시간쯤 갔을 때 통돼지 바비큐의 향기가 식욕을 자극하는 한 레스토랑을 만났다. 멈춰서서 직원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호텔이 있습니까?”
“이곳에는 호텔이 없고 크르로멜에 가면 있습니다.”
 
잘 구워진 바비큐 한 점을 먹고 싶었으나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어서 물 한 모금만 마시고 다시 페달에 발을 올렸다. 슬로베니아의 거리 모습은 정말 깨끗했다. 거리에는 휴지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고, 도로는 매끈하고 나무와 초원과 산들도 깨끗이 단장한 것처럼 보였다. 집들도 이제 폐가는 보이지 않았다. 꽃으로 단장한 집들과 말끔한 집들뿐이었다.
 
도시로 진입하자 가로등이 켜졌다. 크르노멜의 중심에 있는 호텔 앞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멀쩡한 별 4개짜리 호텔은 불이 꺼진 채 문이 잠겨 있었다. 물어보니 이 도시에 호텔은 이곳 하나뿐이라고 했다. 유럽에서도 잠자리 걱정을 할 줄은 몰랐다.
 
가까운 주유소에 들러서 물었다.
 
1 copy.jpg“건너편 호텔이 문을 닫았네요. 이곳 말고 다른 호텔이 있습니까?”
“여기에 호텔은 하나뿐입니다. 여기서 15㎞ 더 가시면 메트리카에 호텔이 있습니다.”
 
메트리카는 내가 가는 방향이 아니었고 이미 밤이 되어서 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늘 몇 ㎞나 오셨나요?”
“120㎞를 달려왔고 지쳐서 더 이상 갈 수도 없습니다.”
 
그는 바쁜 와중에서도 나를 위해 어딘가에 전화를 두 번이나 해주었다. 그리고는 한 레스토랑에 방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라고 알려주며 약도까지 그려주었다.
 
찾아간 레스토랑은 분위기가 좋은 깔끔한 식당이었다. 음식의 양도 많고 맛도 좋았다.
 
개들도 자전거 지나가도 짖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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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에서는 자국 화폐를 쓰지 않고 유로화를 쓰고 있었다. 다음날 은행에서 유로화를 인출하며 크로아티아에서 쓰고 남은 약간의 돈도 유로화로 환전하였다.
 
그날은 49㎞ 거리인 코세브제까지 달렸다. 가는 도중 아름다운 산길 풍경에 취해 자주 안장에서 내렸다. 한동안 경치를 바라보면서 마치 동화 속 나라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낙엽이 날리는 길에서 보는 너무 조용하고 아담한 마을들,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 하늘을 선회하는 솔개…. 여기서는 개들도 자전거를 보고 짖지 않았다. 싸이클복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날렵하게 언덕을 넘어가던 사람과, 마주보고 오던 한 사람이 나를 보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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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 초가집 한 채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그 앞의 나무의자에 앉았다. 그때 차 한 대가 근처에 멈추어 서더니 한 남자가 내려 차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에게 사진촬영을 부탁했다.
 
“여기,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그러죠.”
 
그는 차를 손보던 일을 멈추고는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왔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그는 내게 행운을 빈다며 손을 모으고 포즈를 취했다. 유럽 한가운데서 보는 초가집은 정겨웠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나무탁자가 하나 있고 마늘이 걸려 있었다.
 
그날 오전 9시에 출발하여 오후 4시에 코세브제에 도착했는데 직선거리로 24㎞에 불과한 거리가, 굽이굽이 산길을 돌다보니 GPS 거리로는 49㎞가 나왔다.
 
12 copy.jpg며칠째 비는 안 오고 하늘은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듯 흐렸다. 코세브제에 도착한 날 저녁부터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비는 다음날도 내렸고 나는 호텔방에서 닭다리 백숙과 생선찌개를 끓여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유럽의 가을은 몬순 기간으로 비가 자주 오는 철이었다. 호텔 주인 아들인 타데이씨가 사진을 찍자고 제안했다. 그는 슬로베니아 국기를 가져왔다.
 
내가 물어보았다. “자전거 갖고 있습니까?” 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그렇게 달린다면, 아마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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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