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찍을 때 손가락을 세 개 펴는 이유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불가리아~세르비아/08. 10.12~18
“전화 NOKIA는 사람 연결, 술 RAKIA는 사람 모아”

소피아 뒷골목 집·상가 담벽엔 유난히 낙서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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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2일 프르보마이를 출발해, 파자르직을 지나 다음날인 10월13일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도착했다. GPS 거리는 229㎞가 나왔으나,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 2번 들어섰고 두고 온 물건을 찾으러 간 것을 감안하면 200㎞ 남짓한 거리였다.
 
불가리아의 고속도로는 톨게이트가 없어서 진출입이 자유로웠다. 첫번은 프로브디브시로 진입하는 도로에서 소피아 방향 표지판을 보고 우회도로라고 판단해 가보니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길이었다. 한참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길가에 있던 경찰관이 나에게 멈추라는 수신호를 했다.
 
“기타이(중국)에서 왔나요? 여기는 아우토반입니다.”
“꼬레아(한국)에서 왔습니다.”
 
그는 내 패스포트를 달라고 하여 무엇인가를 적고 돌려주었다.
“조금 더 가면 IC가 있으니 거기서 나가세요. 아우토반은 자전거가 못 다닙니다.”
 
중세 양식의 건물들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소피아
 
Untitled-1 copy.jpg나는 그의 말대로 IC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파자르직 시내로 들어갔다. 고속도로는 오히려 국도보다 많이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나는 파자르직시의 한 호텔에서 하루를 묵은 뒤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은 고도 100m에서 조금씩 높아져 해발 800m 정도까지 올라갔다가 소피아 부근에서 600m 정도로 낮아졌다. 나무들이 늘어선 한적한 숲길로, 날씨도 선선하여 자전거 타기에는 더 좋을 수가 없었다. 간혹 약수터를 만나 목을 축이며 달렸다.
 
소피아 전방 40㎞ 지점에서 국도는 고속도로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다시 고속도로를 탄 뒤 소피아 시내로 바로 진입했다. 소피아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차량이 매우 붐볐고 길가에는 고급 호텔만 눈에 띄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저녁 7시쯤 나는 다운타운 한복판에서 저렴한 호텔을 찾아 다녔다. 모텔 간판을 단 2곳은 모두 문을 닫았고, 고급 호텔은 숙박비가 100~150유로 정도여서 나로서는 너무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시내엔 바닥에 돌을 깐 우툴두툴한 도로가 많았다. 차량이 많아 정체를 빚을 땐 인도로 올라섰다가 다시 차도로 들어가기도 하며 호텔을 찾아 돌아다녔다. 오후 8시가 넘어서야 한 호텔(SHIPKA호텔)을 골라 들어섰다. 숙박비는 78레바로, 소피아 시내에서는 싼 편으로 생각됐다.
 
소피아는 세계 어느 도시 못지않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밤늦은 시간 호텔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도시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날엔 자전거를 호텔에 두고 도시 구경을 나섰다. 다운타운에는 중세 양식의 건물들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진 공원이 여러 개 있었고, 이면도로에도 가로수들이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가 울창한 도시였다. 한편, 이면도로의 집이나 상가의 담벽에 낙서가 유난히 많은 것이 이채로웠다. 모처럼 여유롭게 시내 관광을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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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판엔 레스토랑·주유소·자동차서비스점까지도
 
다음날엔 소피아에서 세르비아의 피롯시까지 다시 페달을 밟았다. 가을이 무르익어, 떨어져 흩날리는 낙엽을 헤치고 달려야 하는, 아름다운 길이었다. 세르비아 국경에 도착해 불가리아 국경사무소의 사진을 찍자, 언제 보고 있었는지 경비원이 나와 내 카메라를 확인하였다.
 
“사진이 문제된다면 사진을 지우겠습니다.”
 
그는 찍어 놓은 한 장의 사진을 보더니 “지울 필요 없다”고 하여 나는 “탱큐”라고 말하고 세르비아 입국심사대 앞으로 나아갔다.
 
참고로, 이스탄불에서 만났던 캐나다인 자전거 여행자에게서 들은 정보는 다음과 같다. 그는 불가리아를 여행한 뒤 출국 때 입국카드에 머물렀던 곳(거소)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호텔 영수증을 제시해도 무방함) 일주일간 감금돼 있었다고 했다. 불가리아 심사관은 나에겐 입국카드를 문제삼지 않았었다. 그 이유는 입국 때 “얼마나 머무를 것이냐?”라는 질문에 5일에서 1주일로 대답했는데 그때 보통 내주는 3개월짜리 관광비자가 아니라 나에겐 36일짜리 비자 도장을 찍어 주었고, 입국카드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르비아 심사관은 내게 두 가지를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와 “어디로 가느냐?”였다. 한국에서 왔고 세르비아의 수도인 벨그레이드로 간다고 대답했다.
 
세르비아에 들어서니 도로에는 안내판들이 많고 거의 평지여서 가는 길이 편했다. 그러나 이곳에도 갓길이 없어 자전거는 도로의 오른 끝을 밟으며 달려야 했다. 도로 표지판은 지명 안내뿐 아니라 몇㎞ 전방에 레스토랑과 수도와 침대가 있는 주유소가 있다거나, 레스토랑이 있는 호텔이나 자동차 서비스점이 있다는 것까지 자세히 안내되어 있었다. 길가에는 낡은 집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유럽 문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후신인 세르비아의 경제도 어렵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중소규모 도시인 피롯 시내로 진입해 이곳에서 가장 높은, 7~8층 정도의 낡은 고층건물 호텔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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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기 위해 로비에 있는 레스토랑에 내려갔다. 그곳의 한 테이블에는 중년 남자 5명이 술을 마시며 담소하고 있었다. 그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사람이 나를 불러서 통성명하게 되었다. 그들이 물은 것은 ‘어디서 왔느냐? 얼마나 걸렸느냐? 어디로 갈 것인가? 직업은 무엇인가?’ 등으로, 처음 만나면 어디서나 물어보는 것들이었다.
 
“누구나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은 극소수의 사람이지요.”
 
47살의 알렉산더 샤로빅은 그렇게 말하였다. 그가 말을 이었다.
 
“오래 전에 이 마을에서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가 말씀하시곤 했지요.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오직 두 종류가 있다.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고 늘 나에게 말했답니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펴며 “두 개는 친구의 의미”
 
Untitled-6 copy 2.jpg그날 저녁 알렉산더 샤로빅은 나에게 몇 가지 호의를 베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친구들과 어울린 술 테이블에서 일어났으며 호텔 옆 그의 사무실에 가서 인터넷을 사용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앞가슴엔 머리가 두 개인 독수리의 문양에다 세르비아어로 “S”자가 4개 새겨진 세르비아 싸인이 있고, 어깨에는 피롯 시의 싸인이, 등에는 그의 로고가 인쇄된, 그가 디자인한 티와 모자를 선물로 주었다. ‘S’자의 의미는 ‘세르비아인들이 뭉치면 구원받는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독주인 라키아(RAKIA) 술을 내놓고 세르비아 음악들을 들려주며 곡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NOKIA는 사람을 연결해 주고, RAKIA는 사람을 모으죠” 라고 말하며 라키아를 여러 잔 마셨고, 나도 더불어 두 잔을 마셨다. 그는 포스터 디자이너, 광고제작, 책 출판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있는 동안 사무실에 들어왔던 사람들은 모두 라키아를 한 잔씩 먹고 돌아갔다. 그는 라키아를 마시며 인생을 얘기하고 예술과 음악을 얘기하고 있었다. 장엄하기도 하고 경쾌하기도 한 세르비아의 음악을 들려줄 때 그는 지휘자처럼 손을 저으면서 음악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 편의 시 같은 짧은 이메일을 그 자리에서 내게 보냈다.
 
‘be good
be strong

be good from end in your mind
I want to be best in your intensions.’
 
예술은 술과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밤늦은 시간 내가 호텔로 돌아갈 때 그는 기다리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카페로 갔다. 나는 그와 헤어지며 “당신은 예술가다”라고 말하였다.
 
세르비아에서는 사진을 찍을 때 보통 손가락 3개를 펴서 보였다. 엄지는 ‘Father’, 검지는 ‘Son’ 그리고 중지는 ‘God’의 의미라고 하였다. 알렉산더 샤로빅은 다섯 손가락을 모두 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나머지 두 손가락은 친구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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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비가 올 것 같아요, Maybe”
 
다음날 아침엔 거리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나는 출발 준비를 마치고 1시간 정도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다가 니스시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길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했다. 한동안 농촌의 전원풍경 길이 점차 수려한 바위산들 사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길 아래로는 계곡물이 흐르고, 위로는 바위산이 이어졌다. 바위를 뚫어서 만든 몇 개의 터널도 통과했다. 바위산들 사이로 난 길은 전혀 여유가 없는 왕복 2차선 도로였다.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는 더욱 바짝 긴장해야 했다. 마지막 터널 안에 들어섰을 때 차량들이 내 뒤를 따라왔고, 나는 트럭에 쫓기며 굉음이 울리는 어두운 터널을 전력 질주해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휴~”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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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 구간을 지나 가을을 만끽하며 달리다가 니스시를 지나서 알렉시낙이란 곳에 도착해, 그 곳의 한 호텔로 들어섰다. 호텔에 간판은 없고 문 앞에 작은 글씨로 ‘room’이란 글자 2개만 써서 붙여놓은 곳이었다. 내부는 정상적인 호텔로, 1층 레스토랑 간판만 달려 있었다. 내가 머물렀던 세르비아 중소도시의 호텔에선 숙박비로 보통 1,600~1,800디나라를 불렀고 나는 모두 1,500디나라로 깎아서 묵었다. 보통 아침식사가 포함되었는데, 이곳 알렉시낙 시에서는 가격을 깎았다고 아침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세르비아는 지중해를 끼고 있어서 육류뿐 아니라 해산물도 풍부한 나라였다. 나는 마켓에 가서 다듬어진 오징어 500g을 사서 저녁과 아침식사로 오징어국을 얼큰하게 해먹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출발할 때 레스토랑 직원이 와서 벨그레이드(세르비아 수도)는 지금 비가 오고 있으며, 오후에 이곳에도 비가 올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하늘은 청명하게 개어 있어서 설마 비가 오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출발하였다. 터키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맞바람이 많았으나 오늘은 순풍이 불어주었다. ‘이 정도 바람이면 130㎞는 갈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35㎞쯤 신나게 달렸는데 상황이 급변했다. 앞에서 점점 먹구름이 밀려오며 도로에 떨어진 낙옆까지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순풍이 바뀌어 세찬 맞바람으로 돌변했고, 나는 기어를 저단으로 낮춰서 허리를 숙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평지의 평균 시속이 20~30㎞에서 10㎞로 뚝 떨어졌다. 옆으로 트럭이 지나가면 순간적으로 진공상태를 만들어주어 잠시 빨리 달릴 수 있었다. 10㎞ 떨어진 파라신 시에 도착할 때까지 비가 안 오길 바라며 쉴새 없이 페달을 밟았다. 파라신에 도착하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2시 타이밍 좋게 나는 호텔로 들어섰다.
 
그날 저녁 많은 비는 내리지 않았으나 날씨가 추워졌다. 다음날 아침 나는 호텔 직원에게 오늘의 날씨를 물어보았다.
 
“오늘도 비가 올 것 같아요, Maybe.”
 
알쏭달쏭한 대답이었으나, 나는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면서 호텔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 날 오후가 되자 뭉게구름이 떠다니고 하늘은 청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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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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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