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서 ‘비자 뺑뺑이’ 돌다 결국 비행기로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정종호의 자전거세계일주] 침켄트↔우즈벡 국경/08.08.21~25

 

군인 버젓이 돈 요구, 그 옆 ‘선글라스’도 ‘흥정’

애마 ‘천마’ 처음으로 택시…운전사는 ‘돈…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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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1일 오전 9시 침켄트를 출발하여 오후 3시에 카지구르트란 마을로 들어섰다. 영화 <대부>의 주제가가 흘러나오고 있는 한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는 보기 드물게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카페 뒷마당에는 풀장이 있었고 한 20명 정도가 수영을 하고 있었다. 풀장 주위의 테이블에선 10여명이 웃통을 벗고 맥주와 보드카를 마시며 흥겹게 담소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점심을 먹은 뒤였지만 빵과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사람들이 풀장에서 수영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 핸섬한 젊은 친구가 내게 다가왔다.

 

"저는 아질베크라고 하는데 어디서 오는 길입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인 피 섞인 러시아계 청소년의 환대

 

17살의 아질베크는 나를 사람들 모인 곳으로 데리고 가 소개시켜주었다. 그 중 배가 유난히 많이 나온 한 50대 후반쯤 보이는 사내가 약간 취기어린 걸쭉한 목소리로 나에게 수영을 하라고 권했다. 나는 자전거와 짐이 있어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사양했다. 그러자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자전거는 룸에 두고 걱정 말고 수영을 해요! 내가 아무 일이 없도록 자네와 자전거를 지켜줄 테니까. 누구든지 건드는 자가 있으면 내가 가만 안 둘 테니까!"

 

수영팬티만 입고 있던 그가 두 팔의 알통을 내보이더니, 큰 손으로 나를 덥석 잡아서 풀장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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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는, 그렇지 않아도 땀으로 젖은 몸이었는데 굳이 수영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점프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서너번 풀장을 왕복하고 나오자 보스 같은 육중한 남자가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그가 풀장으로 뛰어들 때는 풀장의 물 전체가 떨어지는 육중한 배의 충격으로 요동을 쳤고 주위 사람들은 깔깔대며 웃었다. 그가 바지를 입을 때는 아래가 보이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입혀주며 허리띠를 채워주었다.  

 

제법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아질베크가 음료수를 가져와 같이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는 내가 이곳에서 자고 갈 수 있도록 거들어 주었다. 그는 러시아계로 한국계의 피도 섞여 있다고 하였다. 

 

"제가 결혼하면 신혼여행으로 제일 가보고 싶은 나라가 스위스, 한국 그리고 일본입니다."

 

그는 오늘이 달갓이라는 친척 형의 20살 성인식이 있는 날이고, 지금은 친지와 이웃들이 모여 파티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또 저녁에는 친구들이 와서 파티를 할 예정이란다.

 

모두들 흥겹게 지내고 있을 때 나는 지정해준 룸으로 가서 소파에 누웠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몇 마디 큰 소리가 오고가는 잠깐의 소란이 있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나는 궁금하여 풀장으로 가봤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느새 다 사라지고 풀장도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 이상했다. 풀장 옆 타일바닥에 핏자국이 보였다.

 

"아질베크는 어디 있습니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카페 여직원이 낮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인사도 없이 가버릴 아질베크가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그에게 명함을 줄 정도로 그와 어느 정도 친해져 있었다. 그 이후에도 아질베크는 나타나지 않았다.

 

밤 11시가 넘자 카페는 쿵쾅거리는 디스코장으로


카페 안에서는 몇 사람만이 저녁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고 <대부> 음악이 리와인드되어 다시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페에서 제공한 저녁식사를 마치자 저녁파티 준비를 돕고 있던 오늘의 주인공 달갓이 노크를 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고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밤에 꽤 시끄러울 텐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이미 카페의 시끄러운 소음들에 익숙해져 있었다.   

 

역시 밤 11시가 넘자 카페는 쿵쾅거리는 디스코장으로 바뀌었다. 잠들 수가 없어서 나는 카메라를 들고 연회홀로 들어갔다.

 

젊음은 역시 좋은 것인가? 지칠 줄 모르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남녀 모습들이 흥겨웠다. 달갓이 먼저 나를 반기며 여자친구와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했다.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자 그의 친구들도 서로 사진을 찍어달라며 줄을 섰다. 나는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플래시 용량이 크지 못해서 그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지 못해 조금은 안타까웠지만.

 

여행 중 사진을 찍으면 사진을 보내주기를 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사진을 전해줄 방법이 없어서 미안하였는데 이곳에 모인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메일 ID를 갖고 있었다. 카자흐스탄을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만나는 이메일 소유자였다. 그래서 다행히 사진을 전송해줄 수가 있었다. 이곳은 벤츠, BMW, 아우디 등 고급 승용차는 거리에 넘쳐나지만, 컴퓨터를 가진 사람이나 인터넷을 하는 사람은 만나기 힘들었다. 땅은 넓고 인구는 적어서 네트워크 기반이 아직은 미약한 것 같았다.   

 

그날 밤은 너무 소란해서 결국 방에서 자지 못하고 풀장 옆의 카페 침상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시끌벅적했던 카페는 적막하기만 했다. 카페에는 아무도 일어난 사람이 없었고 카페 문은 잠겨 있었다. 내 자전거가 있는 방의 창문은 다행히 밖에서 열 수가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고 창문 밖으로 나오는데 카페의 남자 주인이 어느새 일어나 나와 나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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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뭐 하는 겁니까?"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짐을 정리했습니다만…."

 

그의 부인이 나와서 찬찬히 살펴보더니 언제 갈 것인가를 묻는다.

"9시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카페 문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잠을 깨지 않아서 그도 그의 부인도 카페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의 부인이 딸을 불러 내가 들어간 창문으로 들어가게 하여 카페 문을 열어주었다. 카페 주인은 나에게 미안한 듯 그때부터 웃는 얼굴로 대하였다. 나는 그들이 차려준 빵, 햄, 계란, 차이로 아침을 먹고 나는 출발할 수 있었다.

 

인정이 많고 손님을 대접할 줄 아는 카자흐스탄의 친절한 사람들 덕분에 나는 그때까지 큰 어려움 없이 카자흐스탄의 길고 긴 길을 따라서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로 갈까, 우즈베키스탄으로 갈까?

 

나의 여행계획 루트는 '카자흐스탄→러시아→그루지아(조지아)→터키'인데 최근 그루지아에서 내분이 일어나 러시아가 개입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조지아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침켄트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32번 국도를 타고 러시아 방향으로 계속 갈 것인가? 아니면 39번 국도를 타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방향으로 갈 것인가? 32번 국도를 타고 가면 러시아까지는 이동이 가능하다고 치더라도 조지아에서 길이 끊어진다. 그래서 나는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마침 한국에서 조사했던 우즈베키스탄 비자가 도착사증으로 노트북 파일에 기록되어 있어서 입국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정보는 틀린 정보였다. 비자가 필요했고, 그로 인해 나는 우여곡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타슈켄트는 카자흐스탄 국경과 거의 붙어 있는 곳이고 나는 바로 그 앞 국경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국경은 폐쇄돼 있었다. 출입국사무소 건물 하나만 지나면 타슈켄트인데 나는 그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택시가 다가왔다. 카자흐스탄에서는 보통 승용차가 대부분 택시 역할을 하고 있었다. 

 

"70달러면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국경까지 갑니다."

"50달러면 타겠습니다."

 

나는 50달러에 가기로 합의를 보고 자전거를 트렁크에 실었다. 나의 자전거 '천마'가 처음으로 택시를 타는 순간이었다. 택시는 내가 온 길로 몇 십㎞를 가더니 어떤 출입국사무소 같은 건물 앞 도착했다. 그때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이 두 손으로 X자 표시를 하며 '폐쇄됐다'는 신호를 했다. 이곳이 아니었다.

 

운전사는 여기서 200㎞를 더 가야 한다며 추가요금을 요구했다.

"20달러를 더 내면 거기까지 가겠습니다."

 

나는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의 말을 따랐다. 그는 2시간여를 달려 우즈베키스탄 치나스시로 들어가는 크즐라아스겔이란 마을의 국경사무실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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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한국 사람이세요?" 물어 돌아보니 고려인

 

국경사무실 정문 초소의 군인은 내 패스포트를 보더니 카자흐스탄 입국 후 5일내 거주신고가 안 되어 있다는 이유로 50달러를 요구하였다.

 

나는 그에게 50달러를 주고 국경사무실 안의 입국 심사대로 들어갔다. 50달러를 낸 나에게 군인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고 나는 입국 심사대 앞에 섰다.

 

"우즈베키스탄 비자가 없네요."

"예? 도착사증인 것으로 알고 왔는데요."

"비자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바로 돌아 나와서 50불을 준 그 군인에게 가서 돈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는 어차피 내야 될 돈 아니냐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옆에서 선글라스를 낀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려고 하세요? 70달러 내면 내가 입국시켜드리죠. 카자흐스탄 출국도장을 찍어주면 우즈베키스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아무 문제없습니다. 5시에 사무실 업무가 종료되면 이 사무실을 통과해 가는 겁니다."

 

정문의 별 두개를 단 군인 앞에서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를 믿을 수 없었으나 답답한 마음에 금액을 흥정하였다.

 

"50달러로 합시다."

"안됩니다."

"그럼, 60달러로 합시다."

 

그때 50달러를 챙긴 초소 안의 군인이 한마디 하였다.

"70달러 이하는 안돼!"

 

나는 군인까지 결탁한 것을 보고 입국 방법이 있기는 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합시다." 라고 말하였고 5시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거기 한국 사람이세요?" 하고 물어오는 이가 있었다. 60대로 보이는 고려인이었다.

"예, 한국에서 왔습니다." 

 

나는 반가웠고 그에게 간단히 내가 처한 상황과 경위를 설명했다.

"여기 사람들 말 믿지 마세요! 다 사기꾼입니다. 사라가치에 가시면 도장을 받아올 수 있어요. 지금 택시를 타고 가서 받아오시면 됩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 근처에 사십니까?"

"저는 우즈베키스탄에 사는데 볼일이 있어 잠시 나왔다 가는 길입니다."

 

고려인은 나를 위해, 30달러에 왕복 조건을 걸어 100㎞ 떨어진 사라가치에 갈 택시기사를 찾기 위해 택시기사들 앞에서 소리쳤다. 그 중 한 운전사가 나섰다. "내가 다녀오겠습니다." 

 

요기 가면 저기로, 저기 가면 요기로…운전사는 태연히 거짓말

 

나는 자전거를 근처 카페에 맡긴 뒤 짐은 트렁크에 싣고 사라가치로 갔다. 사라가치 사무소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비자를 받으려면 여기가 아니고 침켄트로 가세요."

 

침켄트는 사라가치에서도 150㎞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날은 이미 업무종료가 되는 시간이므로 다음날 가기로 하고 다시 자전거가 있는 국경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은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운전사의 집에서 묵기로 했다. 그리고 250㎞ 떨어진 침켄트까지의 왕복비용으로 100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

 

집에 도착해서 딸 둘 아들 둘인 운전사 가족 여섯 식구들과 함께 갓 짠 소젖과 차이를 먹으며 식사를 했다. 20살 난 삐쩍 마른 큰 아들에게 이름을 물으니 아버지는 고러그이고 자기는 아글러라고 하였다. 마당에 매트리스를 깔고 남자들은 마당에서 자고 여자들은 방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침켄트를 향해서 큰 아들과 이웃에 사는 마흔 살의 박디아르를 태우고 출발했다. 차종은 오펠이었는데 운전사는 끊임없이 무슨 말인가를 하면서 앞에 있는 모든 차들을 추월할 정도로 과속을 하였다. 침켄트의 사무실 앞에 도착해 주차하자마자 앞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그 차는 달릴 때는 거침없이 과속을 하지만 멈췄을 때엔 시동을 껐다가 켜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기어가 말을 잘 안 듣는 것 같자 운전사는 계속 신경질을 내며 액셀을 밟았었다. 침켄트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한 직원이 나오더니 영어로 애기해 주었다.
"우즈베키스탄 비자를 받으려면 알마티의 대사관으로 가야 합니다."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우즈베키스탄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일행은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거기서 나는 1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알마티에 가서 비자를 받아서 침켄트로 돌아와 운전사에게 전화를 하면 운전사가 이곳으로 와서 나를 데려가는 것으로 하여 비용은 20달러를 추가로 주기로 합의했다. 큰아들이 아버지의 핸드폰 전화번호와 자기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다. 나는 버스표를 사오면서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에 가서 운전사의 핸드폰으로 통화를 시도했다. 엉뚱한 곳으로 통화가 되었다.
"전화번호가 왜 틀립니까?"
"그것은 집 전화번호입니다."

 

그는 태연히 거짓말을 하였고, 아들을 불러 다시 전화번호를 적어주게 했다. 이미 그에 대한 신뢰는 금이 간 상태였다. 그런데 두 번에 걸친 몇 초간의 확인 통화에 전화요금을 450텡게를 지불했다. 전화요금이 매우 비싼 나라였다.

 

씩씩거리며 몰다 결국 다른 차 긁고 자기 차 범퍼 덜렁덜렁

 

여기서 알마티로 가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짓으로 생각되는 순간 나는 다시 결정을 해야 했다.

 

"나는 알마티로 가지 않겠습니다. 다시 침켄트로 와서 터키로 비행기로 갈 것이니 돌아갑시다."
"알마티로 안 간다고? 그럼 이제 100달러를 주시오."
"집에 도착해서 드리겠습니다."

 

그는 지금 돈을 달라고 몇 번 요구했고, 나는 왜 틀린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느냐고 하며 대항하였다. 그의 아들에게 같은 얘기를 하니 그는 씩 웃기만 할 뿐이었다. 운전사는 돈을 안준다고 씩씩거리며 터미널을 나가는 순간, 주차된 다른 차의 범퍼에 차 문을 긁고 말았다. 그는 주차된 차는 안중에도 없이 급하게 차를 빼어 나갔다.

 

그는 나 때문에 그랬다는 듯 나를 째려보더니, 씩씩거리며 골목을 몇 군데 돌아 어느 허름한 카센터로 들어갔다. 차의 옆문 하나가 눌려져 있었고 뒷 범퍼 한쪽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때 시간이 정오였다. 그때부터 다음날 오후3시까지 그들이 직접 차를 수리하였는데 기가 막힌 수리였다.

 

대부분의 일은 아들이 하였고 아들은 나사를 푸는 데 맞는 도구가 없어서 펜치, 망치, 드릴을 써가며 차 밑에서 2~3시간 만에 나사 하나를 풀기도 하였다. 제대로 된 도구 하나 없이 자동차를 분해하고 있었다. 차에서는 엔진오일인지 연료인지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차 수리는 밤 12시가 다 돼도 끝나지 않았다. 12시가 넘어선 뒤 우린 옆집의 앞마당에 매트리스를 깔고 다같이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박디아르와 나는 카페에 가서 아침을 먹고 돌아와서 그들에게 식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니 차를 고친 후에 먹겠다고 하였다. 아들은 차 밑에서 계속 어려운 작업을 하는 중이었고 카센터 주인은 답답한지 가끔 와서 조언도 해주고 도와주기도 하였다.

 

카센터에 새 엔진오일 하나가 구석에 있었는데 운전사는 그 엔진오일을 페트병에 담고 있었다. 카센터 주인이 오면 얼른 몸 뒤로 엔진오일과 페트병을 숨기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그 모습을 여러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고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오후 1시쯤 2가지 정도 부품을 교체하는 수리가 끝났고 자동차는 시동이 걸렸다. 그런데 기름통이 깨졌는지 차 밑에서는 기름이 계속 흘러나왔다.

 

우리는 땜질하는 카센터로 이동하여 땜질을 마치고, 다시 도색하는 카센터로 이동하여 눌려진 문짝을 폈다. 문짝 안에서 주먹으로 치자 들어간 곳이 다행히 원위치가 되었다. 뒷 범퍼는 나사를 박아 고정시켰다. 수리는 완전히 끝났다.

 

난폭운전하다 길에서 싸움박질…길고 긴 하루

 

집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그는 아들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그는 아들에게 추월하는 방법에 대해 계속 코치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샛길에서 차 한대가 진입을 했고 아들은 당황하여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거의 멈춰설 정도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흥분하여 상대방 차로 달려 나가더니 나이든 운전사에게 소리를 지르며 곧바로 손찌검을 했다. 둘은 서로 흥분해 고성을 지르며 주먹다짐을 벌이기 시작했다. 박디아르가 중간에서 싸움을 말릴 때까지 아들은 흥분한 아버지 편을 들었다.

 

박디아르가 아버지를 차로 데리고 왔을 때 나는 아들에게 빨리 출발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계속 씩씩거리며 고성이 오가는 와중에 차는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아주 길고 긴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다시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내가 얻은 소득은 전혀 없었지만 나는 약속대로 100달러를 그에게 주었다. 그날 저녁은 양고기 수육, 양고기 칼국수, 양고기를 넣어 만든 팔라우 요리가 저녁상을 채웠다. 보드카를 좋아하는 박디아르와 나는 은하수가 선명한 저녁별 아래서 양고기 안주에 보드카를 마시며 저녁을 보냈다.

 

그때 아들에게 이름을 다시 물어봤다. 아버지의 이름은 칼륵, 아들의 이름은 노르볼이었다. 물론, 그가 노르볼이란 건 카센터에서 사람들이 "노르볼, 노르볼" 하며 많이 불러 대서 이미 알고 있었다.

 

내일은 다시 침켄트 비행장으로, 온 길로 돌아가야 했다. 나는 뺑뺑이를 도느라 완전히 녹초가 돼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갈 기분이 나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나는 침켄트로 갈 겁니다. 자전거로."
  칼륵이 옆에 있다가 말했다.
  "걱정마시오. 내일 내가 데려다 줄테니까.…100달러만 주면."
  "나는 자전거로 갈 겁니다."
  "침켄트까지 100달러인데 안 탈 거요?"
  "너무 비싸서 안 탑니다."
  "그럼 80달러면 어때요?"
  "80달러에도 안 갑니다."
  "그럼 얼마면 탈겁니까?"
  "…50달러면 또 모를까."
  "그럼 60달러면 어때요?"
  "…."
  "60달러로 합시다."
  "…OK!"

 

MP3플레이어 슬쩍,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다음날 침켄트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 티켓을 문의하고 돌아와 보니 가방의 옆 주머니에 넣어둔 MP3플레이어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나는 노르볼이 그것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MP3 갖고 와!"
  "제가 가질래요."
  "MP3를 가지려면 100달러를 내고 가져!"
  그가 물건을 돌려주며 말했다.
  "그럼, 이어폰만이라도 주고 가요."
  "너는 어떻게 그렇게 생겼냐? 정신 좀 차려라, 이 젊은 놈아!" 나는 한국말로 그를 나무랄 수밖에 없었다.

 

카자흐스탄에서의 자전거 이동거리는 1,430㎞로 23일이 걸렸다. 친절한 카자흐스탄 사람들의 많은 도움으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양, 소, 말, 염소 등을 볼 수 있었고 반사막지대인 황량한 곳에서 살아가는 카자흐스탄인들의 강인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소 다혈질의 카자흐스탄인들도 있었으나 성격이 매우 순박했고 지방일수록 인정이 많은 모습을 접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나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고 은하수가 흐르는 땅이었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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