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이라 해서 갔더니 웬 총 든 경비원?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⑭ 알마티~코르다이/08.8.6~11

 

최대 도시라는데 시내인지 시골 변두리인지… 

한국식당 찾아가 김치찌개와 밥 2그릇 뚝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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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옛 수도인 알마티에 도착한 뒤, 호텔을 찾아 시내를 헤맨 끝에 한 호텔에 묵을 수 있었다. 거리에서 호텔을 물었지만, 알려준 곳은 과거에 호텔이었다가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는 건물이거나, 방이 딸린 레스토랑이어서 허탕을 쳤다. 세 번째로 한 건물의 경비에게 물어서야 호텔로 찾아갈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라고 해서 나는 제법 번듯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여 시내로 들어가 보니, 여기가 시내인지 시골 마을인지 변두리인지 구분이 잘 가질 않을 정도였다. 알마티는 숲속에 묻혀 있는 도시로, 단층 건물들이 많았고 일부 저층 빌딩이나 아파트들도 있었다.

 

콩나물 술떡 고추장 된장 파는 고려인 1세 할머니들

 

rodem.jpg알마티에서 나는 몇 가지 해결해야 할 숙제가 있었다. 카자흐스탄 입국 이후 찍어 놓은 사진이나 여행기를 전송하는 일, 고추장을 구입하는 일, GSM 핸드폰 개통 및 카자흐스탄 지도 구입 등이었다. 매우 간단한 일로 보이지만, 이곳은 러시아 문화권으로 러시아어를 모르는 나로서는 그리 간단치 않은 숙제였다. 이곳 상점들은  겉으로 봐서는 무얼 파는 곳인지 통 알 수가 없었다. 간판을 읽을 수 있어야 파악이 가능했다.

 

다행히 호텔 프런트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배낭여행자인 이창석씨였다. 그를 통해 인터넷카페 위치와 한국 식당이 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와 나는 로뎀나무 식당이라는 한국 식당으로 달려가 김치찌개와 밥 2그릇(한 그릇은 서비스)씩을 게 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로뎀나무 식당은 90년대에 이곳에 정착한 한식당으로, 알마티의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leechang.jpg수㎞ 반경 안에 한 군데밖에 없는 중심가 인터넷카페의 피시(PC)는 대부분이 게임용 피시였다. 인터넷이 가능한 피시는 5대뿐이었다. 나는 이틀에 걸쳐 간신히 필요한 자료를 한국에 전송할 수 있었다. 속도가 느린 데다 전송 중에 에러가 많이 나타났다. 고추장 등은 '바자르'(시장)의 한국 상점과 고려인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사연 많은 고려인 1세 할머니들 몇 분이 바자르에서 콩나물, 술떡, 고추장, 된장, 고춧가루 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핸드폰은 SIM카드를 구입하고 배터리까지 교체했으나 국제통화 시도는 실패했다.

 

카자흐스탄 지도는 한국인 가게를 통해 샀는데 상세 지도가 아니라 개념도 수준의 지도였다. 가게의 한국인 사장님은 "여기선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는 말을 덧붙이며 지도를 나에게 건네줬다.

 

알마티시의 중심가에는 엘지백화점이 있었고, 그 옆 번화가 길 위에는 커다란 엘지 간판이 눈에 띄었다. 한번은 '수유리'란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는 버스도 지나갔다. 알마티시에서는 멋쟁이 아가씨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배꼽티에 초미니스커트를 입은 모델 같은 여자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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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한 갑과 ‘안락한’ 노숙 ‘맞교환’

 

8월9일 아침 알마티시를 벗어나 3일간 주행 예정으로 키르기즈스탄과의 국경도시인 코르다이를 향해 출발했다. 첫날은 80㎞ 떨어진 삼시라는 마을이 하루 주행거리로 적당해 그곳을 목적지로 삼았다. 삼시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 그 날의 주행은 순조로웠고 자전거는 잘 달려줬다. 마을의 한 상점에 들러 이곳에 호텔이 있는가를 물으니, 없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른 시간이었으나 다음 마을까지는 90㎞나 떨어져 있어, 그 곳까지 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난감하여 상점 앞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노인 한 분이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인사 뒤에 노인은 내가 '잠자리를 찾는다'고 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젊은이, 여기서 5㎞만 더 가면 호텔이 있다우."
"스빠시보(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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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말대로 5㎞를 더 가니 정말 호텔 건물이 눈이 띄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외관상 호텔 건물인데 문 앞에는 경비원이 총을 들고 서 있는 게 아닌가?

 

"여기가 호텔입니까?"

"아닙니다."

"…? 그럼, 호텔은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곳은 중국의 석유회사가 호텔을 인수해 회사 건물로 쓰는 곳이었다. 별 수 없이, 나는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늘 써먹었던 말을 다시 늘어놓았다.

 

"나는 한국에서 온 자전거 여행자인데, 하룻밤 자고 갈 수 없을까요?" 

당연히 대답은 "No"였다.

 

나는 물이라도 얻어가기 위해 경비원에게 물통을 건네주었는데, 그는 물을 가져오며 경비 책임자와 같이 왔다. 그가 나에게 담배를 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담배 한 갑을 꺼내 주었다. 담배를 주면서 내가 해야 할 말을 빠뜨리지 않은 건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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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 근처에 텐트를 쳐도 될까요?"

 

경비 책임자는 한 100m 떨어진 곳에 있는 느티나무를 가리키며 그 나무 아래가 좋겠다고 위치를 잡아주었다. 아직 텐트 치기에는 햇살이 쨍쨍한 시간이어서, 그곳 담벽 그늘에 앉아 간식을 먹었다.

 

간식을 먹고 나자 그곳 경비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 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나왔다. 경비 책임자가 다시 오더니, 좋은 자리가 있다며 건물 옆 나무가 우거진 아늑한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그곳으로 가 즉시 텐트를 치고 숙식에 필요한 5,000㏄의 물을 얻었다.

 

중국 석유회사 건물 주위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내가 텐트를 친 자리는 철조망 바로 옆이었다. 그날 밤 경비원들은 고맙게도 가끔씩 플래시를 들고 와서 내가 무사한가 확인하며 경비를 서 주었다.

 

다음날 출발할 때 경비원들은 내가 짐 실은 자전거를 낑낑거리며 경사진 곳으로 올리자 달려와 도와주었다. 그들은 내 물통을 가져가더니 물을 다시 가득 채워 건네주기도 했다. 정말 고마웠다.

 

나를 다 태워버릴 것 같았던 환상적인 붉은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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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목적지는 꾸르데이로, 90㎞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날은 오전부터 역풍이 불기 시작했다. 전에도 그랬듯이 옆으로 멀리 톈샨산맥이 보이면 바람이 부는 날이다. 가는 길에 작은 언덕들이 많아 힘겨운 주행을 해야 했다. 꾸르데이에 간신히 도착하고 나서 둘러보니 여기에서도 호텔이 안 보였다. 도로에 있던 경찰에게 호텔이 어디 있는가 물어보았다.

 

그는 "좀 더 가라"며 손가락으로 도로 쪽을 가리켰다. 바람 속의 오르막길을 끙끙거리며 올라서니 카페가 하나가 나타났다. 음료수 한 병을 목구멍에 털어 넣고 물어보았다. 

 

"호텔은 어디에 있나요?"

"여기는 호텔이 없습니다."  

 

아니, 호텔이 없다니. 중국 석유회사 경비 책임자도, 조금 전에 만난 경찰도 꾸르데이에는 있을 거라고 하지 않았나?

 

girls.jpg그들이 알려준 곳이 이 카페였는지, 다른 지역의 호텔을 말해준 걸 내가 잘못 알아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여기서 자고 갈 수는 없습니까?"

 

주인은 카페 밖의 식탁 침상을 가리키며 "그러면 여기에서라도 자고 가겠냐"고 되물었다. 기대하던 말이었다.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하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카자흐스탄의 잠자리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날 저녁놀은 환상이었다. 나는 카페 여사장에게 내가 가져온 러시아 회화책을 보여주며 일상생활에 필요한 대화들을 물어보고 있다가, 창밖의 노을빛을 보고는 일어나 뛰어나갔다. 노을이 이렇게 붉을 수가 있구나! 붉은 색이 내 손끝에서 가슴으로 전해져 나를 다 태워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 때까지 노을을 바라보았다.

 

친절하게도 카페의 여사장은 그날 저녁 내내 회화책을 들고 다니며 나에 대해 묻거나 필요한 것을 지원해주었다. 카페에는 여종업원들도 몇 사람 있었는데 모두들 관심을 갖고 대해줘 친구같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시끌벅적한 카페 식탁 침상에서 하룻밤

 

문제는 이곳이 운전자들이 들르는 카페여서,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였고 음악을 틀어놓아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게다가 도로 옆 건물의 도로 쪽 침상이라 수시로 지나가는 트럭들의 굉음이 고막을 흔들었다. 내가 자는 옆 테이블에서는 식사를 하거나 맥주를 마시며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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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사장은 일찍 일어났다.

"잠은 잘 잤습니까?"

"예, 편안하게 잘 잤습니다."

 

숙박비 500텡게(매우 저렴함)와 저녁과 아침식사비 등 2,400텡게를 지불했다. 친절한 사장과 막 잠에서 깨어난 여종업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안장 위에 올랐다. 

 

길을 나서자마자 가파른 1,200m의 언덕길을 땀을 쪽 빼며 올라섰다. 이제 내리막이다. 천마가 갑자기 '쉬-'소리를 내며 달리고 싶다고 재촉했다. 10여㎞의 굽은 길이 거의 없는 내리막길이었다. 바람도 '어제는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약간의 언덕을 오를 때 나를 도와주었다. 내리막길에서는 최고시속 59㎞가 나왔다. 그야말로 질주였다.

 

가는 길 중간에 카페에 들러 여유롭게 커피도 한 잔 하고 키르기즈스탄과의 국경마을인 코르다이 세관지역에도 가 보았다. 승용차들이 길게 늘어서서 국경을 넘나들고 있는 모습은 부러운 광경이었다. 3일 만에 코르다이의 호텔로 들어서니 마치 내 집에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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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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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