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모를 사막, 밟아도 밟아도 ‘제자리’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⑨ 짱예~유엔/08년 6월13~26일

 

굽은 곳 단 2번인 135㎞의 길은 지평선에 닿아
사막 한가운데 집 한 채 사내 셋, 뭘 하고 살까

 

 

Untitled-4 copy.jpg


짱예를 지나면서부터 햇살이 따가운 사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로에 나와 놀던 도마뱀 한 마리가 자전거에 놀라 잽싸게 사막의 모래 속으로 숨어들었다. 페달을 밟으며 나아가도 저 멀리 부드러운 지구의 곡선을 보여주는 지평선은 제자리였고, 손등에 따가운 햇살이 불씨처럼 머물렀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은 그 불씨를 저 지평선 끝으로 실어 날랐다.

 

사막은 황량했다. 보이는 건 말라비틀어진 작은 관목들과 흙과 모래와 돌과 지평선, 그리고 사막의 한가운데로 뻗어나가 사막을 절반으로 나눈 일직선의 도로뿐이었다. 햇살과 바람은 이 땅을 강한 자에게만 허락한 것인가? 도마뱀과 개미 같은 강인한 생명체들이 이 땅의 주인인 듯했다. 그래서 사막은 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컵라면 하나로 허기 달래고 다시 외줄기 길 따라

 

Untitled-9 copy.jpg짱예에서 짜유관까지 가는 도중에도 치랜산의 설산 풍경이 보였다. 치랜산의 냉우령을 넘어 달려온 거리가 600㎞나 되건만 아직도 치랜산은 그 설산을 뽐내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사막에서 바라보는 설산은 확실히 이색적인 즐거움을 안겨줬다. 짜유관은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으로, 명나라 홍무 5년(1372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위먼으로 가는 길에 십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 보였다. 그곳의 상점 간판을 보고 들어가려 하니 문이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한 사람이 내다보며 옆 가게로 가라고 했다.

 

나는 옆 가게로 가서도 잠긴 문을 두드려야 했다. 잠시 뒤 한 젊은 여성이 나와 문을 열어줬다. 상점 안을 둘러보니 진열대에는 대부분 음료수뿐이었고 선반 한 쪽에 컵라면 몇 개가 눈에 띄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 좀 부어줄 수 있나요?"

 

상가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가 뒤의 주방으로 가서 큰 후라이팬을 화덕에 올리고 모닥불을 피워 물을 끓여서 컵라면에 부어줬다. 중국 라면은 맛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여서, 그동안 먹지 않았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일까, 컵라면 맛은 아주 훌륭했다. 컵라면 하나를 팔기 위해 물을 끓여 줬다기보다는, 사막을 지나는 허기진 길손에게 따뜻한 라면 국물이라도 제공하려 했던 것이 그 처자의 인심이었을 것이다.

 

허기를 달래고 다시 사막의 길로 들어섰다.

 

“1개월 정도 탄 뒤 곧바로 세계일주 나섰다”고 하자 “에헤~”

 

Untitled-2 copy.jpg


두 명의 중국인 자전거 여행자를 만난 건 그 직후였다. 앞만 보고 달려 나가고 있을 때 앞쪽에 자전거를 탄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은 나를 보더니 멈추라는 손짓을 하였다. 충칭(重慶)에 산다는 33살의 뤄한과 그의 친구 샤밍쯔였다. "위먼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자 "우리도 그곳으로 간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됐다.

 

매우 유쾌한 젊은 자전거 여행자들이었다. 뤄한은 내 자전거에 부착된 GPS를 보더니 자기도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며 배낭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그 때 멀리서 기차가 지나갔다. 뤄한은 신이 나서 기차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뤄한은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양손을 새처럼 벌리고 "와~" 소리를 지르곤 했다. 샤밍쯔는 자전거를 타면서 오른손으로 무엇을 하는지 바쁘게 허리쌕을 들락날락하였다. 자전거를 탄 채로 여자 친구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들은 바람이 불 때나 내리막길에서는 허리를 바짝 숙여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쌍의 날렵한 새처럼 보였다.

 

그들은 둔황을 거쳐 거리가 700㎞ 정도 되는 타클라마칸사막을 가로질러 라사로 간다고 했다. 그 길은 모래바람 부는 끝없는 사막을 건너야 할 뿐 아니라, 수많은 고산의 언덕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길이다. 나는 그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당신들은 최고의 자전거여행자다!"

 

뤄한이 나에게 자전거를 얼마나 탔냐고 물었다. 내가 "1개월 정도 탄 뒤 곧바로 세계일주를 시작했다"고 하자 그는 "에헤~" 하며 농담인 줄 안다.

 

그들과 나는 위먼까지 40㎞를 동행했다. 그 전에 서로 짜유관부터 90㎞를 달려온 상태였다. 그들은 내 자전거를 들어 보더니 당신이야말로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내 자전거가 그들의 자전거보다 더 묵직했기 때문이다.

 

남양주를 출발하여 중국에서 3,000㎞를 넘게 지나오면서 내 다리도 꽤 단련이 되었나 보다. 젊은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렸으니, 그들의 공치사가 아니더라도 한편으론 나도 마음이 흐뭇하였다.  아무튼 그들 덕분에 한동안 사막의 길이 무더운 줄도 모르고 달릴 수 있었다.

 

숙소를 정하고 저녁을 먹을 때 그들은 사발에 밥을 가득 담아 세 그릇을 먹는데, 나는 세 그릇째는 가득 담지 않았더니, 그들은 "에헤~" 하며 나를 놀렸다. 뤄한이 저녁에 내 방으로 찾아와 둔황을 거쳐 투르판까지 가는 길이 같으므로 동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 방문지인 카자흐스탄 입국 예정일이 7월26일로 오히려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빨리 이동하면 우루무치에서 보름 이상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 출발하면서 챙이 반으로 접히는 모자 하나를 내게 선물하며 나의 여행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멋진 사나이들이었다.

 

뉴질랜드 젊은이 스케이트보드와 자전거로 세계일주 중

 

Untitled-1 copy.jpg

 

위먼에서 둔황으로 가기 위해서는 꽈주를 거쳐 가게 된다. 꽈주까지는 130㎞ 거리다. 사막이 뜨거워지는 오후의 주행 시간을 줄이기 위해 나는 새벽부터 서둘러 출발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밖에는 바람에 가로수가 흔들리고 흙먼지가 자욱이 도로를 휩쓸고 있었다. 밖으로 나서니 모래알이 날아와 팔을 따갑게 때렸다. 나는 다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온종일 불어댄 바람은 서풍의 맞바람으로 초속 5~6m의 강풍이었다고 한다. 

 

다음날은 바람이 많이 잔잔해져 있었다. 나는 커피와 비스킷 몇 개로 배를 채운 뒤 어둠이 물러나길 기다려 새벽 5시 반에 자고 있는 주인을 깨워 나의 출발을 알렸다. 도시를 벗어나자 지평선으로 떠오르는 붉은 해를 보며 달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8시쯤 지나자 바람이 다시 불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 시속 20㎞ 이상의 속도에서 절반으로 줄인 10㎞의 속도로 맞바람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오전 10시 반, 치아완이란 작은 마을에 도착해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했다. 다시 점차 강해지는 바람을 보며 여기서 80㎞를 더 간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해, 이날의 주행을 일찍 마감하기로 하였다. 마침 그 식당에는 운전자들을 위한 침상이 있어서 하루를 묵을 수 있었다. 

 

숙소는 엉성했다. 천장의 판넬들은 뜯겨나가 있거나 얇은 철사줄에 매달려 공중에서 덜렁거렸고, 문짝은 20㎝쯤 틈이 벌어진 채 닫히지 않았다. 나는 자기 전에 문 앞에 의자를 기대어 놓고 잠을 청하였는데, 동네 한량들이 식당에 모여서 밤늦도록 마작을 했다. 

 

다음날은 바람 한 점 없이 맑아, 지평선을 보며 신나게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312번 국도 옆에는 고속도로가 나 있었다. 누군가 고속도로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헬로" 하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자전거를 도로 옆에 눕히고 철조망이 쳐 있는 고속도로 앞으로 가서 나를 부른 친구를 보았다. 스케이트보드 2개를 이어서 앞에는 짐을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젊은이였다. 롭 톰슨이라는 28살 난 뉴질랜드 친구였다. 그는 2년 전부터 자전거와 스케이트보드로 세계 일주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Untitled-5 copy.jpg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언덕에 올라가려면 힘들지 않나?"

"오히려 언덕길은 자전거보다 빠르다. 자전거는 짐이 많아서 무겁지만 스케이트보드는 20~25㎏ 정도로 가벼우니까. 대신 내리막길에서는 브레이크가 없어서 신발 바닥으로 속도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다."

"고속도로에는 어떻게 들어왔나?"

 

그는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톨게이트를 들어설 때 손을 흔들었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그는 내게 다음 마을까지의 거리를 묻고는 미끄러지듯 고속도로를 달렸다.

 

나는 두 번 길을 잘못 들어 고속도로 톨게이트 앞에서 제지당했는데, 그는 용케도 고속도로로 진입했던 것이다. 하여간 선구자다운 그의 시도에 경의를 표하며, 중국에서의 성공적인 여행을 기원하는 바이다. 그가 준 명함의 뒤에는 다음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The impossible only exists until we find a way to make it possible."(불가능이란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을 때까지만 존재한다) --Mike Horn

 

YTN 라디오방송과 전화인터뷰

 

Untitled-11 copy.jpg


정오 무렵 꽈주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 벨이 울렸다. 한국의 한 라디오방송(YTN)에서 '내일 아침 7시30분(중국시각 6시30분)에 10분간 여행 인터뷰를 하겠다'는 전화였다.

 

다음날 예정대로 전화 인터뷰를 하였다. 중국의 쓰촨성 지진 사태와 베이징올림픽 분위기를 물었고, 자전거 여행과 관련한 몇 가지 질문이 이어졌다. 세계일주를 하게 된 계기, 위험한 상황 여부, 짐은 어떻게 가지고 다니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등이었다. 

 

인터뷰를 마친 뒤 바로 나는 둔황으로 출발하였다. 출발하는 길에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집단일터로 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회주의 국가이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둔황으로 가는 길은 도로 상태가 좋았고 약간 내리막이어서 나의 천마는 이런 길을 기다렸다는 듯이 윙윙 소리를 내며 잘도 달렸다.

 

가는 길에 과일 행상들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 몽고에서 관광 온 사람들도 수박을 먹기 위해 들렀다. 그들은 나에게 수박을 권했다. 그들이 떠나자 과일 파는 아저씨가 나보고 가까이 오라고 하더니, 수박을 더 먹으라고 권하면서 밥은 먹었느냐,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으며 호의를 보였다. 수박을 잘 먹고 있는데, 그가 나이를 물어왔다. 만으로 49살이라고 했더니 아저씨 얼굴색이 굳어졌다. 조금 있다가 그가 약간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48살인데, 당신이 49살이란 말이요? 30대로 보이는 당신이 49살이면 나는 80살쯤 됐겠네."

 

Untitled-8 copy.jpg

Untitled-10 copy.jpg


토라진 그 아저씨를 보며 나는 안장 위에 올라야 했다. '앞으로 누가 내 나이를 물어보면 39살로 말하는 게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오후가 되자 달궈진 사막의 열기 때문에 물을 마셔도 곧바로 다시 목이 말랐다. 오아시스 둔황으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항상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중간쯤 가다가 한쪽 벽이 무너진 집이 한 채 보였다. 들렀더니 40대로 보이는 3명의 사내가 있었다.

 

"음료수 있습니까?"

"여기는 상점이 아닙니다…. 물이나 한잔 들고 가세요."

 

나는 그들이 주는 물 한 잔을 마시며 안을 둘러봤다. 벽에는 깡통으로 만든 현악기가 걸려 있었다. 내가 악기를 가리키며 이름을 묻자 한 사람이 악기를 내리더니 멋들어지게 연주해 보였다. 사막의 한가운데서 그들은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를 일이었다.

 

독일에서 출발한 베이징올림픽 응원 자전거군단 만나

 

멀리 모래산인 명사산의 긴 산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저 산은 둔황에 있다! 나는 속으로 외치며 명사산을 향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앞으로 한없이 가도 가도 명사산은 제자리였는데 마치 부처님의 손바닥 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둔황에는 혜초 스님이 쓴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다는 막고굴과, 수천년 동안 모래 바람이 만들어낸 명사산과, 곤륜산 빙하의 녹은 물이 명사산 밑에서 솟아나 생긴 초생달 모양의 호수 월아천이 있다.

 

둔황에 도착한 다음날, 명사산을 방문해 낙타를 타고 모래언덕을 올라가 월아천 구경을 하며 모처럼 관광으로 하루를 즐겼다. 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거대한 사구들은 아직도 모래바람에 의해 계속 생성되면서 모양이 바뀌고 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유엔으로 향했다. 유엔으로 가는 길은 굽어진 곳이 단 2번만 있다는 135㎞ 길이의 도로였다. 도로의 끝이 지평선에 닿아 있었다. 가끔 트럭 운전자들이 경적을 짧게 몇 번 울리며 지나갔다. 쳐다보면 그들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가는 길에 뜻밖에도 자전거 군단을 만났다. 독일에서 베이징올림픽을 응원하기 위해, 올 2월16일에 출발해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온 자전거 응원단이었다. 그들 일행은 60명이었고, 내가 만난 인원은 앞장선 선발대였다.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젊은 사람들과 같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멤버가 자전거클럽에서 만든 베이징올림픽 기념 스티커를 나에게 주었다. 자전거 프레임에 부착하고 우리는 서로 행운을 빌며 페달을 밟았다.

 

오후가 되자 빗방울이 떨어지며 매서운 바람이 한동안 불어댔다. 바람이 심할 때는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나는 잠시 멈춰 섰다가 바람이 약해지면 다시 출발하곤 하였다.

 

Untitled-6 copy.jpg

 

계속 이어진 완만한 오르막길과 오후의 뜨거운 날씨로 나는 에너지의 고갈을 느끼면서 유엔에 도착하였다. 그날 오면서 먹은 것은 물 2500㏄, 오렌지주스 500㏄, 작은 수박 반통, 오이 3개에 과자 한 봉지와 빵 1개였다. 여분의 빵이 있었으나 먹히지 않았다.

 

글·사진 정종호 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