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5일 동안 아무 대가 없이 무한 접대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키니트라~쇼람나/08.12.21~09.01.01
날씨 걱정에 택시 타고 쫓아와 다시 집으로
처음으로 감염된 건 내 몸이 아니라 컴퓨터
 
 
라밧으로 가면서 한 주유소에 들렸다. 모로코에는 주유소에 레스토랑과 카페가 같이 있는 곳이 많아서 라이딩 중간에 휴식하거나 점심을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커피는 5~10디람으로 원두커피를 진하게 뽑아서 밀크에 타서 주었다. 점심으로는 보통 둥근 빵에 소고기나 양고기, 바닷가가 부근일 경우 생선도 선택하여 먹을 수 있었다. 보통 샐러드와 함께 주문하면 50~100디람 정도면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다.
 
가격도 비교적 저렴하고 맛도 좋아서 모로코에 들어오면서 나는 주로 매식을 하였다. 보통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손으로 먹었으나 큰 레스토랑에서는 포크와 나이프가 나왔다. 그리고 모로코는 호텔 숙박비가 저렴하였다. 지금까지 60, 70, 80, 100, 150, 250디람에 숙박하였고, 난방시설은 없었으며 화장실은 공용인 곳이 많았다.
 
우여곡절 끝에 치료하고 나니 자료가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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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밧에서 나는 모리타니아와 세네갈 비자를 받기 위해서 3일을 머물렀다. 스폰서를 해준 혜초여행사에서 대사관 주소와 비자 요건 등 비자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모리타니아 비자는 모리타니아 대사관에 여권, 사진 1장, 여권 복사본 1장을 오전에 제출하여 다음날 오후 3시에 비자를 찾을 수 있었다.
 
세네갈은 비자 신청하는 곳이 카사블랑카로 이전해 있었다. 세네갈 대사관 직원이 그곳의 주소를 적어주었다. 혜초여행사에서 한 달 전에 전해준, 카사블랑카로 변경될 수도 있다는 정보 그대로였다. 나는 카사블랑카 세네갈 비자 업무처로 다시 찾아갔고, 그곳의 세네갈 직원은 비자 신청에 비행기표와 세네갈 호텔 주소가 필요하다며 나 같은 자전거 여행자는 세네갈의 인접국인 모리타니아의 수도 누악쇼트에서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언제부터인가 노트북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어서 컴퓨터 작업에 지장이 많았다. 안철수 백신프로그램을 다운받아 실행시켰으나 바이러스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고, 아예 컴퓨터는 부팅이 안되었다. 나는 윈도 안전모드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모드 사용상의 기능 제한이 많아서 매우 불편하였다. 나는 노트북을 들고 라밧의 한 PC방으로 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노트북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데 백신 프로그램 있습니까?”
 
“한번 보지요.”
 
그는 백신 프로그램을 내 노트북에 깔려고 하였으나 안전모드에서는 인스톨이 안되는 문제가 있었다. 컴퓨터를 부팅하면 부팅되는 순간에 V3백신에서 경고 메시지가 나오며 컴퓨터는 다시 리부팅되었다. 
 
호텔로 돌아와 하드디스크의 V3를 삭제한 후 몇 번의 시도 끝에 부팅되는 순간 그가 준 백신 프로그램을 클릭하였더니 백신 프로그램이 인스톨되었고, 하드디스크에 감염된 파일들을 다행히 삭제할 수 있었다. 한가지 문제는 바이러스는 .scr 파일을 감염시켰고 이를 삭제하면서 해당 디렉토리가 컴퓨터에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에 보관된 많은 자료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백신 프로그램 없이 컴퓨터를 사용한 결과였다.
 
시진 찍으려고 하면 얼굴 가리거나 돌아앉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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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5일 라밧에서 카사블랑카로 가는 길은 길가에 들꽃이 한창이었다. 노란색, 주황색, 흰색의 들꽃들이 초원에 가득 피어 있는 길을 지날 때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간혹 바다가 나타나는 길이었다. 도로변에서 닭과 칠면조를 파는 농부에게 사진 한 장 찍자고 하였더니 대답은 “노!”였다.
 
“나는 안 되고 닭과 칠면조는 상관없어요.”
나는 할수없이 그의 돌아앉은 모습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모로코인들은 대체로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거절하거나 얼굴을 가리거나 돌아앉는 사람이 많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약간의 작업이 필요했다 먼저 인사를 건네거나 악수를 해 조금이라도 상대와 친숙해진 후 카메라를 꺼내면 둘에 한 사람 정도는 응해 주었다. 또는 다른 곳을 찍는 척하다가 카메라를 돌려 빨리 셔터를 누르는 방법도 있기는 하였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를 만나, 앞으로 다가가자 그녀는 내가 물을 마시려고 온 줄 알고 물을 권하였다. 그리고 중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한국 사람입니다. 이곳은 아름다운 곳이군요” 하면서 카메라를 꺼내자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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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에 당나귀 한 마리가 있었다. 당나귀 옆으로 접근하자 당나귀는 나를 한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작은 몸집의 당나귀는 불쌍해 보일 때가 많았다. 무거운 짐을 지고 나르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사람이 탄 마차를 끌기도 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 작대기로 엉덩이를 때리며 타고 가기도 하였다. 당나귀는 힘들어도 고개 한번 까닥하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고 갔다. 불쌍한 당나귀! 오늘은 햇살 가득한 꽃밭에서 발이 묶인 채 휴식을 취하고 있구나!
 
모로코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관광도시인 카사블랑카에 도착하여 한 유스호스텔에 들렀더니 이미 방은 만원이었다. 근처의 호텔들도 대부분 빈 방이 없었다. 몇 군데 호텔을 돌며 빈 방이 있는지 알아본 끝에, 하룻밤  숙박비가 80디람인 호텔에 묵을 수 있었다. 카사블랑카는 시장을 끼고 있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구분되었다. 나는 매연이 많고 복잡한 라밧이나 카사블랑카 같은 곳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다.
 
호텔 없고 어두워 택시 타려는데 한 사람이 ‘불쑥’
 
다음날 잘 정돈된 도시 세타트(SETTAT)에서 하루 숙박 후 12월27일 70㎞ 거리의 쇼람나(SKHOUR-REHAMN)라는 작은 도시에 오후 6시쯤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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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전 가는 도중에 비가 와서 도로변의 한 카페로 들어갔다. 한 양치기 부자가 계단 위로 자전거를 올리는 나를 도와줬다. 비가 내리는 한 시간 동안 카페에는 한 명도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고 양치기 부자와 셋이서 바깥 풍경을 보며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찍어 보여주자 두 부자는 좋아하며 순박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사진 찍는 법을 알려주자 그가 사진을 찍는데, 제대로 된 사진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가 사진 찍는 것을 너무 좋아하여 잠시 카메라를 그에게 내주어야 했다. 한 소년이 당나귀를 타고 지나갔다. 구름 아래로는 무지개가 떴다. 평화로워 보이는 초원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시골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카페였다.
 
쇼람나로 가는 길에는 곳곳에 닭 몇 마리를 들고 나오거나 풀 같은 것을 손에 들고 파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지도상에서 본 쇼람나가 호텔 정도는 있는 도시인 줄 알았으나, 저녁 무렵 도착해서 보니 호텔이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한복판에 도착하여 길을 묻자, 내 주위에 여러 사람이 둘러서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호텔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는 호텔이 없습니다. 28㎞ 거리의 뱅구리 시에 호텔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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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워지기 시작하였고 28㎞는 밤에 가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한 사람이 택시를 타고 갈 것을 권하였다. 국도를 제외한 거리는 비로 인해 온통 진흙탕이 되어 있었다. 난감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한 청년에게 부탁하듯 말해보았다.
 
“당신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갈 수 있을까요?”
“제 집은 5㎞나 떨어져 있는데요.”
 
그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내키지 않았으나 나는 뱅구리까지 택시를 타고 가려고 택시 기사와 가격을 흥정할 때였다.
 
“뱅구리에 가봤자 거기도 호텔이 없습니다.”
한 젊은이가 나를 둘러선 무리 속으로 들어오더니 나에게 말을 하였다.
 
“호텔이 없다고요?”
“문을 닫은 호텔입니다. 저희 집에서 자고 가세요.”
“정말입니까?”
 
“손님이 필요한 것은 모두 제공하는 것이 관례”
 
두말할 것도 없이 나는 그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30살의 유쎄프라는 사람이었다. 이후 나는 그의 집에서 ‘무려’ 5일간이나 머물게 되었다.
 
Untitled-7 copy.jpg그의 집엔 4개의 방이 있었다. 부모 방, 형 내외 방, 유쎄프 내외 방, 그리고 무슬림 하우스라는 방이 하나 있었다. 그 방에는 브라이언이라는 이웃 청년이 기거하고 있었다. 나도 그곳에서 머물렀다. 가족들은 방에서 손과 발을 씻을 수 있게, 대야와 물을 데운 발 씻는 대야를 따로 가져왔다. 발을 씻자 나의 발밑에 양탄자를 깔아주었다. 첫날은 다진 소고기 구이, 다음날은 모로코 제1의 음식인 꾸스꾸스, 그리고 제2의 음식인 따진 등 생각지도 않은 풍성한 대접을 받았다.
 
나는 하루만 머물려고 하였으나 유쎄프의 따뜻한 대접과 권유에 못이겨 하루를 더 머물기로 했다.
 
“전에도 네덜란드 자전거 여행자가 우리 집에서 3일간 머문 적이 있습니다. 며칠이건 좋으니 원하는 대로 있어도 좋습니다.” 그는 내게 정말 정성껏 호의를 베풀었다.
 
둘쨋날 그는 자신의 친구인 택시기사를 불러 마을 뒤의 전망 좋은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 사진을 찍게 해주었다. 산으로 올라가며 택시기사는 탁투스라는 선인장 열매를 따서 계속 먹으라고 주었다.
 
유쎄프는 내가 시버카페(인터넷 카페)에 갈 때에도 함께 갔으며, 거기서 머무는 동안 늘 함께 있었다. 유쎄프는 밤에는 일하러 갔고 새벽 6시에 퇴근해서는 잠도 자지 않고 나와 같이 있었다. 프랑스에 사는 그의 친척이 보내준 것이라면서 자전거 저지 3벌과 팔레스타인 스카프, 털모자 등을 선물로 나에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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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유쎄프는 그 지역의 스타였다. 길만 나서면 사람들이 그와 아는 체하며 인사를 하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나도 어느새 그 마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곳에 있는 동안 모든 돈은 유쎄프가 지불하였다. 내가 돈을 내려고 하면 나를 제지하였다.
 
“모로코에서는 손님이 필요한 것은 모두 제공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저녁에는 모로콘 배스(대중목욕실)에 가서 모처럼 목욕도 할 수 있었다. 욕실은 뜨거운 물과 찬물이 나오는 수도꼭지가 두 개 있어서 물통에 받아서 쓰게 되어 있었다. 목욕실에서는 팬티를 입은 채 목욕을 하였고, 비누나 타올 등은 준비해 가야 했다. 남자와 여자는 입욕 시간이 따로 있었고 요금은 10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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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임에도 나를 위해 보드카…새해 첫날  “쌔나 사이다!”
 
3일을 머문 후 12월31일 나는 유쎄프 가족들과 작별인사를 나눈 뒤 전송 나온 유쎄프, 브라이언과 마을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유쎄프가 사준 간식을 가방에 넣고 나는 마라케쉬를 향해 출발하였다.
 
바람이 불고 조금씩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다가 길에서 전복된 트럭을 만났다. 전복된 트럭에서 쏟아진 생선이 도로 옆에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생선을 줍고 있던 사람들과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7㎞쯤 주행했을 때였다. 갑자기 택시 한 대가 뒤쫓아와 내 앞에서 멈추더니 유쎄프와 브라이언이 나왔다. 그들은 비 오는 날씨를 걱정해 나와 작별한 후 내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 그들이 내게 말했다.
 
“정, 오늘은 날씨가 너무 안 좋으니 돌아갑시다.”
 
나의 옷은 비와 흙탕물에 젖은 상태였다. 나는 유쎄프가 보여준 우정에 감명받아 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생선이 쏟아져 있던 곳에 가서 생선을 한아름 사가지고 와 집에서 생선 파티를 하였다. 그날이 3일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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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유쎄프가 말하였다.
 
“내일은 새해 첫날로 호텔도 상가도 문을 닫습니다. 내일까지 머물다 가세요.”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믐날 저녁 같은 마을에 사는 유쎄프의 처가를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물담배를 피며 보드카도 맛볼 수 있었다. 모로코 사람들은 술을 먹지 않는 무슬림이었으나 그날은 유쎄프의 처형이 보드카 한 병을 가져와 조금씩 잔에 따라서 돌려가며 마셨다.
 
“쌔나 사이다!”(새해 인사)
 
그의 가족과 새해 아침에 인사를 나눴다. 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며 절을 하였더니 그들도 나를 따라하였다. “받으세요”라고 말하면서.
 
유쎄프의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포로로 잡혀 22년간 알제리에 수감되어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수용소에서 자유가 너무 그리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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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5일간 쇼람나에 머물면서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들은 사진을 보고 너무 좋아하였다. 유쎄프는 내가 찍은 사진 전부를 사진관에 인화해달라고 맡겼다. 마침 7일장이 그믐날 열려서 이곳 시장 풍경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유쎄프가 없었다면 나는 어려운 연말을 지내야 했을 것이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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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