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가나? 얼마 머무나?’ 단 두마디로 국경 통과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터키 하브사시~불가리아 푸르보마이/08.10.06~11
고속도로 갓길의 매끈한 맛 즐기려다 견인될뻔
진한 인정과 약간의 무례, 두 얼굴의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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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국경과 50여㎞ 지점에 있는 터키의 하브사시의 한 호텔에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매일 찾아오는 아침이 늘 새롭듯이 나의 여행도 새롭게 출발하는 하루하루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브사시에서 불가리아로 향해 가면서 직선도로인 100번 국도를 타지 못하고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고속도로 역시 국경 앞 도시인 에드르네에서 100번 국도와 만나게 되어 있어, 들어선 길을 구태여 되돌릴 필요는 없었다. 길안내 표지판이 초록색은 고속도로였고 파란색은 국도였는데 나는 초록색표지판을 보고 들어선 것이었다.
 
“그렇다면 가급적…” 단속 경찰의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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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의 갓길은 자전거로 달리는 맛이 좋다. 넓은 갓길을 혼자서 다 차지하고 포장상태가 좋은 매끈한 도로를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서 오는 길은 쭉 맞바람이 불었는데 여기서부터는 산들바람으로 바뀌었다. 공기는 신선한 풀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나뭇가지에서 나뭇잎 하나가 날려 내 몸을 스치고 땅으로 떨어졌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피어올랐다.
 
견인차 한 대가 내 옆을 지나 10여m 전방에 멈추더니 갑자기 후진을 해 다가왔다. 이어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 소리를 요란히 울리며 내 옆에 멈추었고 경찰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서 왔습니까? 일본?”
 “한국에서 왔습니다.”
 “여기에서 자전거를 타면 안됩니다. 에드르네까지 자전거를 실어 가겠습니다.”
 
견인차 운전사가 자전거를 들려고 하다가 무거운지 한숨을 내쉬었을 때 나는 한마디 하였다.
 “별 문제 없는데…. 자전거로 가게 해 주시죠.”
 “문제 있습니다” 라고 경찰이 말했다. 그리고  나서 경찰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가급적 갓길 오른쪽으로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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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은 나의 사진 촬영도 허용해 주었다. 단속 나온 경찰관이 참 부드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30㎞ 정도 고속도로를 탄 후 에드르네를 통과하여 국경으로 가는 길에는 매우 긴 트럭 행렬이 차선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불가리아로 들어가기 위해 입국심사를 기다리는 10여㎞의 길고 긴 행렬이었다. EU 국가간에 무역이 얼마나 자유롭고 많은 거래가 일어나는가를 알 수 있는 광경이었다. 조금 후에 불가리아로 입국해서도 마찬가지로 터키로 들어가는 긴 트럭 행렬을 볼 수 있었다.
 
국경 근처의 한 주유소에 들렀을 때 여러 명의 경찰이 있었다. 한 경찰이 뜨거운 차이 한 잔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터키에서 대접받은 마지막 차이를 마시고 나는 불가리아 입국사무소로 들어섰다.
 
한 번 배짱 튕기니 단박에 절반 값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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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심사관은 나에게 “어디를 가느냐?”, “얼마나 불가리아에 있을 것이냐?” 두 가지를 물었고 나는 국경이라 불리는 선 하나를 넘어 자전거를 탄 채 불가리아 땅으로 들어섰다.
 
처음으로 눈에 띈 것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드러누워 햇살을 쬐는 모습이었다. 늘어선 트럭 행렬을 벗어나자 목화송이가 만발한 목화밭 앞으로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번듯한 집은 아니나 붉은 기와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들이 언덕 위에 또는 언덕 아래에 드문드문 나타났다. 새들이 자전거에 놀라 수풀과 나뭇가지에서 푸드득 하늘로 날아올랐다. 불가리아의 도로를 달리는 동안 참 평화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간혹 흉물스럽게 방치된 문 닫은 공장이나 폐가 같은 것도 보이긴 하였으나. 불가리아 국도는 갓길이 없어 도로 끝에 그려진 흰 선을 따라 조심스럽게 자전거를 달려야 했다. 포장상태는 그런대로 매끄러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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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방문한 도시 아르만리시의 중심가로 들어서 제법 번듯한 한 호텔로 들어섰다. 여주인은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숙박비를 물으니 35유로를 불렀다. 나는 좀 더 싼 호텔을 알아보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가자 종업원이 따라와 35레바로 해 주겠다고 하였다. 거의 반값이었다. 나는 짐을 7층 방에 올려놓고 은행에서 돈을 찾아 20레바 지폐 2장을 건네주자 여주인은 손에 담배를 들고 “됐다”며 거스름돈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종업원이 35레바를 말했다며 종이에 35를 적어 보이자 그때서야 거스름돈을 거슬러 주었다.
 
나는 다음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자전거에 짐을 묶으며 ‘오늘도 한 100㎞는 가야겠다’ 고 마음먹고 좀 서둘렀다. 시내를 벗어나자 오르막이 시작되었는데 그곳에서 차 한대가 내 옆에 멈추어 섰다.
 
“소피아 쪽으로 가세요? 차 태워 드릴까요?”
 
어제도 한번 들었던 소리다. 어제는 고가도로 밑에서 쉬고 있을 때 한 소형 봉고차 운전자가 차타기를 권유했었다. 나는 “노탱큐”로 대답하였고 묘하게도 그 차가 떠나자 곧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나는 그 대답을 한 후 30분 동안을 고가도로 밑에서 쏟아지는 소나기를 바라보며 서있어야 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상대방의 호의를 거절하면서도 정이 있는 나라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5 copy.jpg그 후 50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가, 자전거를 세워놓고 물을 마시려고 할 때 자전거에 부착되어 있어야 할 물통과 버너 연료통이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에 짐을 묶을 때 호텔 계단 옆에 빠뜨리고 온 것이었다. 물이야 사면되지만 버너전용 연료통은 내게 매우 중요한 물건이었다. ‘멍청한 놈, 또 물건을 두고 왔구나!’ 스스로 나무라며 자전거 경주에 나간 사이클 선수처럼 쉴 새없이 페달을 밟아 다시 호텔로 되돌아갔다. 물건은 내가 나둔 그대로였다.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물건을 온전하게 놔둔 불가리아 사람들이 고마웠다.
 
‘전자제품과 자동차’로 기억하는 한국
 
다시 언덕을 넘어, 물마시던 자리에 돌아와, 주인을 잘못 만나 헛고생시킨 두 다리를 위로하며 면세점에서 산 스니커즈 2개를 먹었다. 두 다리로 에너지가 전해지기 전에 먼저 입이 즐거워했다.
 
12 copy.jpg가는 길에 한 카페에 들러 커피를 주문하여 마셨다. 내 앞자리에 50살 후반의 한 남자가 자리를 잡고 앉아, 나는 나의 비스킷을 나누어 주고 같이 먹었다. 갑자기 그가 “코냑 한잔만 사달라”고 하였다. 당연히 대답은 “노!” 불과 이틀 간의 불가리아 여행에서 인정과 약간의 무례라는 두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이날 오후는 목적한 프로브디브까지 가지 못하고 5시쯤 푸르보마이란 작은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 그날 묵었던 숙소는 큰 집을 호텔로 꾸며 가족이 살림을 함께 하며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가격도 20레바로 저렴하였고 온수 물이 매우 뜨거워 커피를 타먹어도 될 정도였다. 방 옆에 조그만 발코니도 있어서 거기서 버너를 이용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그보다 좋은 점은 조그만 마당에는 화초가 많았고 뒷마당에는 오래된 정자도 있는 곳에서 내 집같이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었다. 저녁에는 주인집에서 나를 불러서 사케(일본술)도 한잔 같이 마셨다. 아들 방에는 컴퓨터가 있어서 인터넷 카페를 찾지 않고 사진자료도 다음 카페로 전송하였다.  
 
다음날 푸르보마이의 도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먼저 호텔 앞에 있는 공원으로 나갔다. 공원 가운데 있는 동상 사진을 찍자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한 사내가 저 동상이 무슨 동상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공원 모습의 일부로 찍었으나, 총을 들고 서 있는 동상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동상입니까?”
“저 동상은 사회주의 체제 아래 있을 때 만든 것으로 소련 군인의 동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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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38살의 이안초라는 이름의 영어번역가였다. 그는 내가 이 도시 사진을 찍는 중이라고 하자 공원 근처 몇 군데를 안내해 주었다. 시청, 극장, 불가리아 전통의 레스토랑과 통나무집 카페, 주말에만 문을 여는 디스코 카페 등이었다.
 
8 copy.jpg“이 도시가 평화스럽게 느껴져 이틀을 머물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이곳은 범죄 하나 없는 도시라고 하면서 이 도시의 다른 문제를 말하였다. 농업 위주인 불가리아 경제가 어렵고 이곳 주민들은 일자리를 찾아서 큰 도시인 프로브디브나 소피아로 떠나고 있으며 대도시는 인구 유입과 함께 각종 범죄도 늘고 있다고 하였다.
 
“한국의 물가수준이나 경제는 어떻습니까?”
“한국의 물가는 매우 높고 집값이 비싸서 어렵습니다.” 나는 경제 전문가는 아니나 평소에 느끼던 점을 말하였다.
 
“불가리아도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전자제품과 자동차를 만들지 않습니까?”
 
그는 인텔리답게 한국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와 헤어진 후 거리를 산책하였다. 공원 뒤편에는 기차역이 있었다. 그곳을 지나자 잡초가 무성한 몇몇 폐가와 방치된 공장도 보였다. 무역이 자유화된 21세기의 무한경쟁에서 낙오한 공장들은 흉물스러운 모습이 되어 도시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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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사람들이 꽃을 참 좋아한다고 느껴졌다. 아파트 발코니나 단독주택의 마당에는 화초들이 많이 보였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는 집이나 마당 전체가 꽃동산인 집도 있었다. 지금 머무는 호텔의 작은 방에도 조그만 조화 화분이 3개나 있었다.
 
‘21세기에도 계속 생존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불가리아의 한 작고 평화로운 전원도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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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