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 GPS에 찍힌 시속 67km, 기록 경신!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이스탄불~이즈미르 08.09.03~09
가난한 과일 노점상들, 정은 달콤하고 듬뿍
트럭 타라는 ‘참전용사’ 호의 뿌리치고 씽씽

 

 

Untitled-6 copy.jpg


해안도시인 이즈미르로 가는 길에는 중소도시인 부르사, 카라사베이, 발리케시르, 아키사르, 마니사가 있었다. 이들 도시는 60~100km 사이에 있어 하루 자전거 이동거리로 적당했다. 주변 언덕과 평야의 풍경은 마치 우리나라 국도를 달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발리케시르로 가는 언덕을 넘어가는데, 언덕 위의 과일가게 노점 상인이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잖아도 쉬어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면서 맛보는 큰 기쁨 중의 하나

 

“날씨도 더운데 좀 쉬어 가시오.”

“고맙습니다.”

 

Untitled-8 copy.jpg나는 그가 내미는 의자에 앉기 전에 얼굴의 땀부터 닦았다. 그는 카운(터키에서는 하미과를 카운이라고 함) 하나를 잘라서 나에게 권했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이즈미르와 보드룸으로 갑니다.”

 

그는 이즈미르로 가는 길의 중간 도시 이름을 불러주며 길을 알려주었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유럽 여행을 했지요. 자전거는 글쎄…. 오토바이가 더 편한데” 하며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터키 사람들은 자전거 여행 얘기를 하면 대부분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준 카운이 달콤하여 반통을 순식간에 다 먹었더니 옆에 놔두었던 나머지 반통도 썰어서 먹으라고 주었다. 그는 32살의 무라카 카하르만이라는 사람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제일 좋을 때가 다름 아닌, 이렇게 사람의 정을 느낄 때였다. 그동안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의외로 과일 노점상에서 과일을 많이 얻어먹었다. 내가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불러 과일을 그냥 주었다. 어떤 때는 찾아가서 과일을 골라 먹은 뒤 계산하려고 하는데 돈을 받지 않았고, 떠날 때는 과일 한두 개를 봉투에 넣어주기도 했다.

 

과일 노점상 주인들은 대부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음이 여유로웠고 정이 넘쳤다. 과일 하나 값이 큰 돈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나에게 건네준 그 과일은 내가 자전거를 타면서 맛보는 큰 기쁨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과일가게 앞을 지날 때는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몸에 밴 친절

 

Untitled-3 copy.jpg


터키인들은 참 친절했다. 우선 그렇지 않은 경우를 먼저 보고, 그 다음 친절한 터키인들을 소개하겠다. 토마토 수확철을 맞아 한창 수확에 바쁜 토마토 밭을 지나갈 때였다. 일곱명 정도의 한 가족이 큰 트럭에다 빨간 토마토를 싣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사진을 찍기 위해 자전거를 멈추고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그때 토마토 밭에서 한 남자와 아이 둘이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No! No! 사진 찍지 마세요!”

나는 카메라를 한 손에 쥐고 그들을 바라봤다.

 

“Money! Money! 돈을 내야 찍을 수 있습니다!”

“돈을 달라고? 돈을 주고 사진을 찍으라고요?”

 

나는 그들에게 반문하며 자전거를 타고 떠나려고 하자, 손이 새카만 한 아이가 내 앞에 섰다.

 

“그럼, 그냥 찍으세요!”

 

나는 그냥 가겠다고 말하고 페달을 밟았다. 사진을 찍는데 돈을 요구하는 것은 기분이 상하는 일이었다. 사진이 아무리 잘 나왔다고 해도 무슨 즐거움으로 그 사진을 나중에 볼 수 있겠는가?

 

Untitled-5 copy.jpg그러나, 열흘 정도의 여행에서 느낀 건 터키인들은 대부분 무척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발리케시르에 도착했을 때 그날 묵을 호텔을 찾으려고 거리에서 한 사람에게 호텔 위치를 물었다. 자전거를 타고 있던 그는 자신이 가던 방향의 반대  쪽에 위치한 호텔인데도 자전거를 일부러 돌려 몇 군데의 골목을 돌아 나를 호텔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나는 그날 저녁에 먹을거리 쇼핑 겸 거리 구경을 나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마르마라 호텔은 어떻게 갑니까?” 거리에 있던 한 사람에게 물었다.

 

그는 호텔 위치를 잘 몰랐는지 바로 주위에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았고 주위에 있던 사람이 나서며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100미터 정도 되는 거리의 호텔 앞까지 앞장서서 바래다주었다. 어른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니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호기심에 자전거 주위로 몰려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호텔 위치를 물었는데 아이들은 따라오라고 하더니, 3군데의 호텔을 차례로 들러 내가 숙소를 정할 때까지 나를 도와주었다. 아이들이 내 자전거를 타보고 싶어 하기에 두 명에게만 잠시 특혜를 주었다.

 

마니사에서 같은 호텔에 묵고 있던 우으르라는 청년에게 물었다.

“GSM 핸드폰에 터키에서 파는 SIM카드를 끼우면 유럽 전역에서 통화가 가능합니까?”

 

그는 “아마 그럴 걸요” 하더니 확신이 없는지 저녁 늦게 핸드폰 상가를 찾아가 물어보고 돌아왔다.

 

“가능하답니다. 오늘은 터키셀(터키 통신회사) 상가의 영업시간이 지났으니 내일 찾아 가세요” 하며 터키셀 상가 앞까지 데리고 가 위치를 알려주었다.

 

마침 마니사에 있었던 날이 마니사시의 ‘인디펜던스 데이’라고 하였다. 아침부터 터키 국기를 단 군·경찰·소방서 등 관공서 차량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줄지어 지나가면서 사탕과 물휴지를 선물로 나눠주고 있었다. 터키에서는 달과 별로 된 터키 국기를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건물에도 집에도 거리에도 산에도 자동차에도 국기를 달고 있는 모습에서 그들의 애국심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누가 나에게 길을 물었을 때 모르는 곳이면 ‘모른다’고 하고 가던 길을 갔었고, 아는 곳이면 그곳의 위치만 설명해줬을 뿐이었다. 터키인들에게서 친절함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한 수 배울 수 있었다. 

 

발리케시르에서 아키사르로 가는 길은 강원도처럼 200~500m 정도의 언덕길들이 이어졌다.

 

Untitled-9copy.jpg


초심 잃지 않는 것이 더 나를 지탱해 주는 힘

 

잠시 휴식을 취할 겸 한 레스토랑에 들어서는데 레스토랑 앞에서 카운 과일을 먹고 있던 한 노인이 나를 불렀다.

 

그가 내게 과일을 건네며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한국에서 왔습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접시의 과일을 거의 다 먹자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더니 한 접시 더 가지고 오면서 레스토랑 주인을 데리고 나왔다.

 

“나는 1954년 한국에서 근무했던 참전용사” 라고 노인이 말했고, 레스토랑 주인은 “나의 아버지는 한국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말했다. 주인은 군 휘장이 새겨진 유공자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좀 숙연해지는 분위기를 느끼면서 나는 한국을 도와준 그 분들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참전용사인 네취넷 돌드루주가 분위기를 바꿨다.

 

“나는 한국을 사랑합니다. 요즘 한국 경제는 어떻습니까?” 그는 한국전 참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그의 밝은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한국 경제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며 나는 그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느꼈다. 레스토랑 주인은 58살의 히다이넷 굴스르였다.

 

참전용사인 돌드루주는 트럭운전사로 내가 이즈미르로 간다고 하자 자기 트럭을 타고 가자며 나를 걱정해줬다.

 

“이즈미르로 가는 길은 언덕이 가팔라서 자전거로 가기 힘들어요. 나도 그쪽으로 가는 중이니 내 트럭을 타고 가시오.”

 

“괜찮습니다. 자전거로 갈 겁니다.”

 

Untitled-7 copy.jpg


지금까지 나를 태워주겠다고 한 트럭 운전사는 중국에서도 두 번 있었다. 중국에서는 두 번 모두 “No”라고 대답한 것을 얼마 못가서 후회하였다. 한번은 언덕길에서 세찬 맞바람을 만나 고생했고, 한번은 2000m 언덕길을 오르느라 땀을 꽤나 흘렸었다. ‘그냥 못이기는 체 타고 가면 될 것을,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이 무슨 고생이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거절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세계일주를 출발할 때의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더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전용사는 내 손을 꽉 잡은 뒤 자신의 트럭에 올라탔다.

 

얼마 가지 않아 해발 500m의 언덕길이 나타났다. 언덕 위에 오르니 내리막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자전거 천마가 “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고운 자갈의 아스팔트로 포장된 2차선 도로 중 2차선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달리는 것은 천마에게 맡겼다. 가속도가 붙으며 빠르다고 느꼈을 때 GPS에 시속 67킬로미터로 나타났다. 기록 경신이었다. 내리막에 도달하니 고도가 300미터였다.

 

“천마야, 이제 좀 살살 달려라!”

 

나는 천마의 핸들을 쓰다듬으며 해안도시 이즈미르를 향해 전진했다.

 

글·사진 정종호(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