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가 슬픔의 후예들이다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① 서해 바다 민통선

 

차를 싣고 가면 이르지 못할 곳, 섬 마지막 풍경들

기적 아닌 삶이 없는 곳, 바다는 그렇게 살아 있다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을 매주 한번 꼴로 연재합니다. 강 시인은 섬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섬에서 살아온 섬사람입니다. 2006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80여개의 섬들을 걸어온 그는 앞으로 10년간, 사람이 사는 한국의 모든 섬에 자신의 발자취를 남길 계획입니다. 단순한 섬 소개에서 벗어나, 섬 구석구석을 걸으며 사람살이의 곡진한 내력과 자연 풍광, 전통 문화의 흔적들을 사유하고 기록할 예정입니다.

             
“우리는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지 않을 때는 늘 걷는다. 그러나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걸음을 옮길 때 마다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도착할 수 있고, 정토 혹은 신의 왕국에 들어설 수 있다.” (틱 낫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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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외포리; 바다는 지구 최대의 산소 공장

 

강화 외포리에는 두 개의 여객선 선착장이 있다. 하나는 석모도행 전용 선착장이고 또 하나는 주문도와 볼음도, 아차도 항로의 선착장이다. 이 바닷길에도 카페리가 다닌다. 작은 섬으로 가면서도 사람들은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철부선 갑판은 뭍에서 싣고 가는 자동차들로 빼곡하다. 철부선이 허허바다로 나간다. 끝없이 넓고 큰 바다, 허허바다.

 

지구상의 모든 녹색 식물은 낮에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한다. 산소 덕으로 인간은 숨 쉬고 살아 갈 수 있다. 나무는 산소의 중요한 생산자다. 그러나 지구 최대의 산소 공장은 숲이 아니다. 바다다. 바다는 지구 산소의 80% 이상을 생산해낸다. 우리가 바다위에 떠서 살지 않는다 해도 바다는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공간이다. 바다에서 남조류, 녹조류 등의 식물 플랑크톤과 함께 산소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규조류다. 황해바다의 물빛은 흐리고 탁하다. 해양 오염과 남획으로 물고기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리는 정작 바다의 죽음이 몰고 올 생명계 전체의 파국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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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음도; 도시의 삶을 통째로 싣고서야 어찌

볼음도 행 카페리는 시간의 물살을 느리게 거슬러 오른다. 여행자들은 섬으로 가는 배를 탔으나 자동차를 끌고 가는 한 결코 섬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자동차 안에 도시를, 도시의 삶을 통째로 싣고서야 어찌 섬에 이를 수 있겠는가. 자동차는 이방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여행의 방해꾼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 여의도의 두 배 쯤 되는 섬. 섬이지만 사람들은 바다에 크게 기대고 살지 않는다. 민간인 통제구역 (민통선) 안이라 어로행위가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볼음도의 어선은 단 두 척. 두 척의 배는 물고기도 잡고, 낚시꾼에게 대여되기도 한다. 130가구 270여명의 인구 중에서 10% 정도만이 뻘 그물로 밴뎅이와 병어, 숭어 등을 잡는 어민이다. 건강망, 또는 개막이 그물이라고도 하는 뻘 그물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그물을 설치해 배 없이 물고기를 잡는 어로다. 뻘 그물 어로의 유일한 경쟁자는 물새들이다. 다 잡은 물고기를 물새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부들은 물때에 정확히 맞춰서 갯벌에 나가야 한다. 

 

볼음도의 주업은 농사다. 갯벌을 간척해 논을 만든 까닭에 한 가구당 평균 경작면적이 만 평이 넘는다. 섬은 오랜 옛날부터 나지막한 모래 산에 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다. 세월이 흘러 섬은 분지가 되었다. 섬 마을 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낮은 산들이 바닷바람을 막아, 벼는 해풍의 피해를 입지 않고 튼튼하다.

 

Untitled-17 copy.jpg민통선의 섬들. 볼음도는 교동도, 말도, 서검도, 미법도 등과 함께 휴전선 상에 위치한 섬들 중 하나다. 휴전선, 잠시 잊고 있었다. 이 나라는 아직 전장(戰場)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60년이 가까워 오지만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 계속된 남북 화해 노력 덕에 군사적 긴장은 크지 않고 섬으로의 출입도 자유롭다. 

 

이 섬에서도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몇몇의 관광객들은 자동차를 싣고 왔고,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은 민박집 차를 타고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 주민들은 경운기를 타거나 더러 트럭을 타고 다니기도 한다. 걸음을 잃어버린 시대. 이 시대의 끝 무렵이면 사람의 다리도 새처럼 가늘어지게 될지 모를 일이다.

 

아차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어디 이것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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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도 여객선 대합실에는 할머니 몇 사람이 둘러 앉아 이야기 중이다. 작은 창고 같은 대합실 안은 몇 개의 나무 의자가 전부다. 해안으로 밀려온 바다 쓰레기를 줍던 노인들이 불볕의 더위를 피해 잠시 휴식 중이다. 바다 쓰레기 줍기는 이 섬 노인들의 주된 수입원이다. 일당 3만원. 마을 25가구 대부분이 노인 독거 가구다. 노인들은 순번제로 바다 쓰레기 줍기에 나선다. 소득의 공평한 분배를 위해서다. 겨울에는 굴을 따고 여름에는 소라를 잡는다. 바다에서 나오는 소득은 미미하다. 배를 부리는 집은 여름이면 생선도 잡고 가을에는 새우도 잡아 제법 큰 소득을 올리지만 이 섬의 배도 몇 척에 불과하다. 갈수록 소라도 잘 잡히지 않는다고 노인들은 탄식한다. 배를 부리는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 통발로 잡아들이니 해안으로 나올 소라가 거의 없는 탓이다.  

 

Untitled-11 copy.jpg이 작은 섬이 옛날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다. 일제시대, 조기가 서해 바다를 뒤덮었을 때는 천명도 넘는 사람들이 살았다. 지금은 주문도로 옮겨 갔지만 그때는 면사무소도 아차도에 있었다.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비좁은 땅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 차 있었다. 바다의 사람들이란 물고기를 따라 다닌다. 물고기 떼가 떠나면서 사람들도 모두 떠나가 버렸다. 섬에는 작은 구멍가게 하나 없다. 생필품은 외포리의 가게에 주문하면 연락선으로 보내온다.

 

아차도리 다목적 회관 앞에서 슈크림 빵 하나와 생수 한 병으로 ‘아점’을 먹는다. 이 회관은 마을 경로당, 부녀회 사무실을 겸하고 있다. 회관 앞길에서 아이들 둘이 자전거 타기 놀이에 열중해 있다. 학교도 없는 이 섬에서 저 아이들은 어느 학교를 다닐까.
 
 “애들아! 너희들 학교는 어디로 다니니?”
 “강화요.”
 “강화도 살아?”
 “네”
 “강화 어디?”
 “갑곶이요.”
 “여기 사는 게 아니구나. 놀러 왔니?”

 

이 동네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하나도 없다. 아이들은 강화로 유학을 간 것이다.
 
 “집에 오니까 좋아?”
 “좋아요.”
 “뭐가 좋은데?”

 

아이들은 묵묵부답이다. 아이들뿐이겠는가. 이 세계에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 모든 일을 다 해석하고 설명할 수는 없겠지. 아이들은 그냥 좋은 것이다. 나그네 또한 굳이 아이들에게 답을 얻을 생각은 없다. 아빠는 섬에서 배를 타고 돈을 벌 것이다. 엄마는 강화에 살며 아이들 학업 뒷바라지를 할 것이다. 아빠는 섬 기러기.
 
고향도 잊어버렸다는 할머니, 마른 옥수수처럼 그렇게 여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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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은 작고 농토는 비좁지만 이곳에서도 벼농사를 짓고, 고추와 참깨, 옥수수와 콩, 마늘 등의 밭농사를 지어 끼니 거르는 사람 없이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물이 있고, 부처 먹을 땅 한 조각만 있으면 아무리 먼 바다 깊은 산속이라도 찾아와 살았다. 그렇게 수 천 년의 삶을 이어왔다. 외부의 침략자들, 왜구와 해적들의 노략질과 탐욕스런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며 끝끝내 살아 남았다.

 

우리는 모두가 슬픔의 후예다. 우리는 모두가 고난의 후예다. 슬픔과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기란 진실로 희귀한 일이다. 살아 남은 자들의 후예로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삶이여!  기적 아닌 삶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바닷가 오막살이, 할머니 집 마당에는 옥수수가 말라가고 있다. 곡식들은 햇볕을 받아 마를수록 여물어 간다. 사람 또한 그렇다. 할아버지는 3년 전에 이승을 하직 하셨다. 바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딸 둘, 아들 둘을 키워냈지만 할머니는 혼자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차돌처럼 단단해 지셨다. 혼자 남은 할머니의 유일한 의지처는 교회다.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제사를 모시는 것은 양다리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뒤 할머니는 배 부리던 어구들 태워 없애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할머니에게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어구들이었을 테지만 아쉬운 일이다. 어업의 한 역사가 허망하게 불태워져 버렸다. 처마 밑에는 할아버지가 쓰셨을 대나무 낚시 대들이 끼워져 있고, 옛날 쓰던 물지게도 벽에 걸렸다. 부엌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놓여있다.
 
 “할머니 겨울에는 불 때고 사세요?”
 “보일러를 못 했시다.”
 “오히려 잘되셨네요. 기름 값도 비싼데.”
 할머니는 손을 젓는다.
 “매워서, 연기 땜에 맵고, 비 많이 오면 물 나고 말도 못해.”

 

왜 아닐까. 오랫동안 구들을 손보지 않아 고래가 막혔을 것이다. 그런 아궁이에 환풍기 없이 불을 때면 부엌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찬다. 집이 바다 바람을 피해 저지대에 지어졌으니 큰 비라도 오면 아궁이에는 물이 고이기도 하겠지. 부엌 뒤란에는 장독대가 있다. 장독 마다 간장, 된장 등이 한가득이다. 변소도 물론 재래식. 불을 때고 난 재로 변을 묻어 두었다가 거름으로 내니 냄새가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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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시어터져 버리는 김장을 그래도 또 한다, 어미니까

 

“올핸 배추도 쪼끔 심어야 싱깐. 배추 많이 심어서 머해요. 작년에도 다 담가 놓곤 가질러 와야 하는데 안 오니깐 다 내다 버리느라 혼낫시다. 봄에 다 버렸지, 시어져서 못 먹어. 다들 회사 다니고 바쁘니깐 못 왔지.”

 

할머니는 가지러 온다는 보장도 없는 자식들을 위해 김장 김치와 된장을 담는다. 김치는 시어터져서 버렸고, 장은 몇 년째 장독대에서 묵어간다. 김장 배추를 적게 심겠다고 말은 하지만 할머니는 올 가을에도 어김 없이 넉넉하게 김장을 하고 메주를 띄울 것이다. 할머니는 어미인 것이다. 어미는 여든 셋, 얼굴엔 여망꽃이 피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늘을 찾아가 늘어진다.

 

“쥐가 하도 들끓어 싸서 어젯저녁에 다른 집서 잠깐 데려다 놨는데 안가고 있시다. 밥 달라기에 밥 줬더니 밥 먹고.”

 

고양이는 할머니 집이 편하고 좋은 것이다.
 
 “할머니는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 없시다.”
 “강화세요?”
 “그랫시다.”
 “강화 어디신데요?”
 “잊어버려서 모르갓시다.”

 

할머니는 섬으로 시집와서 60년 넘는 세월 동안 친정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옛날 섬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이제 할머니도 남은 날이 많지 않다. 할머니마저 떠나고 나면 이 집은 폐허가 되고 할머니의 삶을 지탱시켜준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 것이다. 삶의 흔적들이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을 ‘증거’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 때 삶이 깃들었던 물질들, 죽은 육신과 함께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은 또 어디로 가서 머물게 되는 것일까 .

 

말도; 늘 불안한 휴전선 갯벌의 평화

 

말도는 서도면의 최북단 섬이다. 상주하는 주민은 5가구. 교회가 하나 있지만 신자는 한 사람도 없다. 전도사는 월요일에 들어왔다 목요일에 나간다. 섬은 민간인보다 군인이 더 많다. 정기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 섬에는 일주일에 두 차례 강화군의 행정선이 떠서 사람들과 생활용품을 실어 나른다. 민통선의 섬이라지만 밤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것 외에는 큰 제약이 없다. 세월이 좋아진 탓이다. 하지만 민통선 부근의 섬이나 강화 갯벌에는 홍수가 나거나 큰물이 질 때면 대인지뢰가 떠내려 오기도 한다. 그 때문에 더러 인명 사고가 나기도 한다. 휴전선 갯벌의 평화는 늘 불안하다.

 

말도 선착장은 큰 파도에 파손되어 위태롭다. 면 직원이 실태 조사를 해간다. 보수 공사를 하겠지만 큰 파도가 치면 선착장은 다시 파손되고 말 것이다. 연례행사다. 말도는 주변 섬들에 비해 기온이 차다. 논에는 농약 한번 치지 않았지만 고온에서 번성하는 멸구와 나방 등의 해충 피해가 적다. 말도 감나무에 달린 감은 씨가 없다. 씨가 있던 감나무도 몇 해가 지나면 씨가 없어진다고 말도의 주민 한 사람이 알려준다. 기후 탓일까. 청도 반시라 부르는 경북 청도의 감 또한 씨가 없다. 꽃 피는 철에 안개가 많아 수분이 되지 않는 까닭이라 한다.

 

Untitled-8 copy.jpg나그네는 섬으로만 다니지만 나그네가 다시 말도를 찾을 날은 기약이 없다. 오늘 이 풍경이 말도의 마지막 풍경이다. 말도뿐이랴. 길가에서 마주치는 풍경, 어느 하나 생의 마지막 풍경 아닌 풍경이란 없다. 모두가 우주에서 단 한번 뿐인 풍경이다.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는 풍경들. 말도의 논과 밭, 감나무와 소나무들, 여물어 가는 벼들까지도 다 현생의 마지막 풍경들이다. 

 

예비군 훈련장 지나 고갯길을 넘으니 피마자 나무가 줄지어 섰다. 아직도 피마자를 키우는 곳이 있었다. 예전에 피마자는 기름을 짰다. 여자들은 동백기름을 바르고 남자들은 피마자유로 만든 포마드 기름을 머리에 발랐다. 길을 가던 나그네는 옥수수 밭에서 잠시 멈칫한다. 환시일까. 옥수수 대 위, 옥수수를 끌어 앉고 쥐 한 마리가 졸고 있다. 환시가 아니다. 정말 쥐 맞다. 화들짝 놀라 카메라를 꺼내려는데 녀석이 눈치 채고 줄행랑을 친다. 옥수수를 파먹던 쥐가 더위와 졸음을 못 이기고 옥수수 알갱이에 코를 박고 잠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밭의 옥수수는 죄다 쥐가 파먹었다.

 

주문도; 피안에 이르게 해준다면 절이든 교회든 무슨 상관이랴


].jpg주문도는 볼음도, 아차도, 말도, 네 섬을 아우르는 서도면의 중심 섬이다. 면의 행정 기관이 모두 주문도에 있다. 서도면은 네 섬을 다 합쳐도 인구 650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면이다. 주문도에만 그중 절반인 300여명이 산다. 작은 섬에 초, 중, 고 세 개의 학교가 다 있다. 다행이다. 학교가 있는 한 섬은 희망이 있다. 섬은 주민들 80%가 개신교 신자다. 섬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다. 어느 한 종교가 다수를 점하면 섬은 그 종교의 왕국이 된다. 종교의 자유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정교일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법은 멀고 삶은 가깝다. 섬의 모든 일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누구든 교회와 등지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 그는 외톨이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누군가는 교회가, 종교가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천만에! 종교가 세속화 됐다는 비난은 부당하고 근거 없다. 어떤 종교가 세속을 떠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종교란 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인간을 위해 있지 않은가. 종교란 본디 초세속적 권력의 세속적 통치기구다. 세속에 초세속적 기구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세속적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초세속적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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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의 중심은 서도 중앙 교회다. 교회는 1923년에 건립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한옥에 서양식 건축 양식을 접목 시킨 교회 건물은 세련되고 기품 있다. 예배당 실내는 절의 법당 같다.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섬 주민들의 마음은 절과 교회를 분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해준다면 그것이 절이든 교회든 무슨 상관이랴.

 

어미 품처럼 부드러운 펄, 영혼까지 빨아들인다

 

주문도 대빈창 해변 갯벌 바다에 저녁이 온다. 밀물의 시간이다. 저 넓은 갯벌은 순식간에 다시 바다가 될 것이다. 갯벌은 바다 생물들의 중요한 서식지인 동시에 오염물질을 정화해 주는 지구의 콩팥이다. 갯벌은 펄 갯벌과 모래 갯벌, 펄과 모래가 뒤섞인 갯벌 등으로 다양하다. 황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매우 크다. 해안가에는 펄이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먼 바다로 가면 모래가 많다. 강화 주변의 바다 속은 펄 갯벌이 대부분이지만 덕적도나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로 가면 대부분 모래 갯벌이다. 육지 가까운 해안은 펄이 많고 먼 바다로 갈수록 모래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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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에는 오랜 세월 중국과 한국의 강에서 쓸려 내려온 모래와 펄 흙으로 채워져 왔다. 황해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큰 바다다. 해안가로 밀물이 들어올 때 가벼운 모래와 펄들이 떠서 밀려든다. 해안 가까이 갈수록 밀물의 미는 힘이 약해진다. 보다 무거운 모래알은 일찍 가라앉고 더 가벼운 펄들은 해안 가까이 밀려온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순간 바다는 잠시 정지 상태에 들어간다. 그때 펄들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서해안 가까이에는 펄 갯벌이 많은 것이다. 이 대빈창 갯벌은 수 천. 수 만 년 들고 난 밀물과 썰물이 만든 펄이다. 바다가 수 만 년 동안 만들어낸 갯벌을 사람은 한순간에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나그네는 섬에서 나고 자랐지만 바닷물에 들어가거나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펄에는 기꺼이 맨발에 맨 몸으로 들어간다. 펄은 어미의 품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펄은 사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그래서 농발게와 고둥과 조개와 개불과 낙지와 꼬막이 모두 펄의 속살 깊이 틀어 박혀 산다. 펄은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빨아들인다. 밀물은 순식간에 대빈창 갯벌을 다시 바다 물로 덮어버린다. 밀물 드는 갯벌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바다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실감한다. 이 황혼녘에도 바다는 저렇게 일렁이며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강제윤 시인

 

강제윤 시인

그는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이로 살아가는 유랑자다. 1988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해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등의 책을 펴냈다.

e-mail: bogilnara@hanamil.net 블로그 http://blog.naver.com/bogil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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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