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다구나 하고 들어선 지름길이 아뿔싸!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정종호의 자전거 세계일주] ④ 마짠~쿠푸/2008. 5.7~9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밤 색깔은 점점 어두워
차 없는 길도 꼭 좋아해야만 할 일은 아니다

   

 

ㅑㅣcopy.jpg


중국 내륙으로 들어갈수록 밤 색깔은 점점 어두워진다. 숙소에 들어가면 밤에 불을 켜도 방안이 어두워서 노트북의 키보드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변기의 물도 최소한의 양이 흘러나온다. 자전거는 거의 고철 수준인데, 기어가 없는 녹슨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작은 언덕이라도 나타나면 자전거를 끌고 걸어 올라간다.

 

점심은 거리에서 파는 밀가루 전병, 꽈배기, 국수 등 5위안 정도의 가격으로 한끼 식사를 해결했다. 저녁에는 요리 한두 가지를 시켜 놓고 맥주 한 병을 마셔가며 먹었다.

 

더운 물 제대로 나오는 곳은 뜻밖에도 싸구려 숙소

 

물건값은 대체로 부르는 게 값이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전, 여러 사람들에게서 들은 '무조건 너무 비싸다고 말하며 깎아달라고 하는 게 중국 여행에서 바가지를 덜 쓰는 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제값을 불렀다. 여관 숙박료는 다소 가격을 높게 불러서 흥정을 통해 적당한 선에서 가격을 맞췄다.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몽이라는 곳에 머물렀을 때였다. 가격표에 60위안이라고 쓰인 1인실 방을 50위안으로 흥정하고 나서 방안을 둘러보니 샤워실이 없었다. 옆방엔 샤워시설이 있고 비교적 방도 넓었다. 방을 바꿔달라고 했다. 주인이 말했다. "그 방은 120위안짜리요." 샤워실 추가에 방값이 두 배나 뛰어오른 것이다. 나는 주인 설득에 나섰다. "나는 하루종일 달려와 몸이 매우 피곤하다. 반드시 샤워를 해야 하는데, 방값이 너무 비싸다. 샤워실이 있는 옆방을 그대로 50위안에 내줄 수 없겠냐." 

 

몸짓 손짓이 섞인 나의 하소연에 주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선선히 방을 내주었다.

 

지금까지 12일 동안 여러 숙소에 묵었는데, 더운 물이 제대로 나온 곳은 아이러니컬하게도 20위안짜리의 싸구려 숙소인 여사로 한 곳뿐이었다. 다른 곳들에선 찬물로 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적응이 되어 찬물로 샤워를 해야 오히려 더 개운하게 느껴진다.

 

지금 묵는 숙소는 사거리 도로변의 현대식 3층짜리 숙소의 2층 방이다. 방 옆에 조그마한 2층 옥상이 있는데 이곳은 쓰레기 투기장으로 방치돼 있었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또 이용하지 않는 곳이라서 버려둔 듯했다.

 

다짜고짜 다가온 젊은 친구 따라 집으로 가봤더니…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도로 건너편에서 한 젊은 친구가 다가왔다. 그는 나의 행색을 살피더니 다짜고짜 자기 집에 가자고 한다. 인상이 그런대로 괜찮아 보여서 따라가 봤다. 그는 24살의 젊은 치과의사였고 그의 아버지는 한의사였다. 그가 사는 곳은 2층 건물로 제법 규모가 있는 집이었다. 그는 호기심 많은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며, 과일을 내오고 직접 조리한 국수도 한 그릇 내놓았다. 2층 방엔 침대와 책상과 책장이 전부였고 도배나 치장이 전혀 없었다. 벽에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는 것이 치장이라면 치장이었다. 1층에는 불상이 모셔져 있어 저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재물의 신'(財神)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삼성 핸드폰을 갖고 있었는데, 한국의 전자제품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했다. 잠시 한국인으로서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방의 소도시라도 도로에는 세계의 유명 브랜드 승용차가 즐비하다. 중국인들은 평소 생활은 검소해 보이지만 가전제품이나, 승용차·오토바이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는 듯하다. 길가의 큰 상가들에선 오토바이점(자전거샵 겸용)과 가전제품점이 가장 많이 눈에 띄었다. 고철이 다 돼도 바꾸지 않고 타고 다니는 자전거와는 대조적이다. 자전거는 작고 가벼워 분실될 우려가 있어서일까. 돈을 좋아하는 중국인의 삶에서 실리의 미학을 배운다.

 

개펄 같은 시뻘건 진흙길에 1시간 동안 땀-흙 범벅

 

ㅓㅓ copy.jpg


날씨는 며칠째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는데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중국여행 일정을 잡을 때 칭다오에서 서안까지 한 달 기간(5월1~30일)을 예상했었다. 비자업무를 지원해준 여행사에서 준 비자기한은 4월24일부터 5월24일까지다. 비자를 최대 3개월까지 연장할 수 있으므로 7월24일까지는 머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 다음에 여행할 카자흐스탄의 비자가 7월26일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7월24일부터 2일간 무비자 상태가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다 결단을 내렸다. 이틀간의 불법체류 벌금을 물고 카자흐스탄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런 일이 빚어진 건 애초 중국이 올림픽 개최 관계로 비자를 1개월밖에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24일까지 서안에 도착해 비자 연장 신청을 하고 승인을 받으려면 또 며칠을 기다려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중국을 여행할 수 있는 기간은 20일 정도에 불과하다. 칭다오에서도 2일간 정보수집 등의 이유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계획 상으로는 하루 50km 정도를 이동하는 것으로 하였으나,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하루에 이동해야 하는 거리가 80km 정도로 늘어난 꼴이 됐다.

 

칭다오에서부터 5일간 400km를 이동했다. 이 구간은 구릉이 많아서 자전거 타기에는 재미있는 길이었다. 5일 뒤 핑이(평읍)에 도착하자 여기서부터 중국 대륙의 평야의 시작을 직감할 수 있었다. 평지라서 이동거리를 좀더 늘릴 수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곧 무너졌다.

 

도태-평읍-백마로 가는 길에 지름길 표지판이 보여 이 길로 들어섰다. 자동차는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차도 하나를 점하고 달릴 때 일어나는 맞바람의 시원함을 즐기며 달리고 있었는데, 이런 느긋함은 곧 개펄 같은 시뻘건 진흙길에서 무너져버렸다. 나는 신발에 진흙을 묻히지 않고 이 길을 통과하겠다고 마음먹고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는 쿨렁쿨렁, 흔들흔들하면서 앞으로 나아갔고 패인 곳에서는 앞 패니어 가방 바닥이 바닥에 닿기도 했다.

 

핸들을 꺾는데 바퀴가 진흙에 박혀 나아가지 않는다. 자전거는 멈추면 쓰러진다. 페달에서 발을 떼어 바닥을 짚고 자전거를 붙잡았으나 이미 자전거는 기울어져 진흙 샤워를 하고 있었다. 진흙은 매우 부드럽고 고와서 머드팩을 해도 될 정도였다. 오기가 생겨 안장 위에 다시 올라앉았다. 거의 1시간 정도를 이런 식으로 통과해야 했다. 도로에 차가 없다는 것도 반드시 좋아해야만 할 일은 아니다.

 

MP3 스피커에 LP가스통 매단 외발 자전거 탄 기인

 

진흙길을 빠져나오자 평야지대의 도로를 달렸다. 비록 자전거와 옷은 진흙투성이지만 이제야 제대로 자전거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기분으로 오늘의 이동거리 100km 지점인 쿠푸시로 접어들었다.

 

쿠푸시에 들어서기 직전, 자전거에 커다란 원통형 스피커를 단 외발자전거를 타고 유유자적 달리는 기인을 만났다. 그가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며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그의 옆에 한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의 자전거는 더욱 가관이었다. 뒷바퀴 한 쪽에는 식당에서나 보는 커다란 LPG가스통을, 다른 한쪽엔 쌀자루처럼 보이는 자루와 중국식당에서나 보는 커다란 프라이팬을 매달고 있었다. MTB자전거의 앞바퀴를 없애버린, 외발자전거를 타는 기인은 운남성에 사는 니칭유란 스물두 살의 사내였다. 그는 베이징올림픽을 기념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신문·잡지에 소개된 자신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중국 남쪽에 있는 운남성에서 베이징까지의 거리는 1500km 이상이다. 그는 지금까지 1000km 이상을 텐트 생활을 하며 달려 왔다. 베이징까지는 400km 정도 남았다. 작은 몸집에 장발의 머리칼을 흩날리며 MP3 음악을 스피커로 떵떵 울리게 틀어놓고, 외발자전거를 유유히 타고 유람하는 그의 모습에서 중국인의 또 다른 모습을 보는 듯했다.

 

그는 나에게 자기 텐트에서 숙식을 같이 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나는 중국 일정이 촉박하여 그와 긴 시간을 같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굳게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글·사진 정종호 http://cafe.daum.net/bicycle.world.tour

 

Leave Comments


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