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 어느 집 지붕에 쓰인 “웃자 웃자!!” 시 한편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아하! 요것이 바로 진짜 시, 섬 이름도 ‘시의 산’
 노인당의 할머니들 “사내놈은 철들면 죽는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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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도(詩山島)는 고흥의 섬이다. 뱃길로 한시간 거리에 불과하지만 하루 한번밖에 배가 다니지 않는 낙도다. 섬은 산이다. 첩첩의 산. 본래 시산도는 시산(示山), 시산(矢山), 시산(詩山)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일제 때 시산(矢山)으로 굳어졌다가, 한 출향인의 제안으로 1995년 군의회의 의결을 거쳐 시산(詩山)이란 시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아름답고 고마운 일이다.
 
 외로운 나그네도 웃게 만들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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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도의 밤, 마을 안길을 걷는다. 골목을 오르는데 할머니 한분이 마실을 가는 중이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누구시더라.”
  “여행 온 사람입니다.”
  “나는 친구 집 간다우.”
  “좋으시겠어요.”
  “아저씨는 친구 없지? 나는 많은데.”
  어찌 아셨을까. 혼자 이 먼 섬까지 찾아와 밤길을 헤매는 나그네의 외로운 심사를.
  할머니는 친구 집을 찾아가고 나는 다시 밤길을 걷는다. 그런데 교회 아래 어떤 집 지붕이 시선을 붙든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뭔가 그려져 있다. 좀더 다가가 보니 글자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다. ‘웃자 웃자’ 네 글자가 지붕 가득 쓰여 있다. 심사 외로운 나그네도 웃게 만들었으니 집주인의 의도는 성공이다. 저것이야말로 시 아닌가. 시(詩)가 쌓인 산. 시산도에 와서야 나그네는 비로소 진짜 시를 얻었다. 지붕을 공책 삼아 쓴 시 한편. “웃자 웃자!!”
  
  사내놈들 철들면 죽는당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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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군 보길도 어떤 노인당이었다. 할머니들 말씀이 너무도 걸쭉해 흘려버리지 못하고 시(<겨울 섬 노인당>)로 쓰기도 했지만 여기에 좀더 자세히 소개해야겠다.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이었다. 맹렬한 추위에도, 비싼 기름값 때문에 섬 어르신들은 대부분 보일러를 틀지 못하고 산다. 겨울이면 가난은 그 실체를 더욱 모질게 드러낸다. 전기장판 하나 틀고 이불 뒤집어쓴 채 잠을 잔 노인들, 아침이면 굳어진 몸 풀러 노인당으로 모여든다.
  마을 기금으로 기름을 때는 노인당은 종일토록 따뜻하다. 된장 풀어 삶은 돼지고기 몇 점에 낮술이 한 순배 돌면 선창몰 사시는 할머니 말씀이 걸어진다.
  “좆 달린 놈들은 평생 철이 없어! xx 것들, 젊으나 늙으나 함부로 산당께.”
  노인당을 찾은 노인들은 모두가 할머니들. 그중 열에 아홉은 영감이 먼저 세상 뜬 지 오래다. 늙어 철이 드는가 싶더니 훌쩍 이승을 떠나버린 영감이 야속타.
  “여자들은 철들면 시집가는디, 사내놈들은 철들면 죽어뿌러.”
  응달짝 할머니가 말씀을 받는다.
  “그러게 말이요잉. 우리 영감도 그렇게 철이 없어서, 고생도 고생도 징하게 시키쌓더니 이놈의 영감탱구가 늘그막에 이제 좀 철이 드나 싶으니 덜컥 죽어버립디다.”
  “우리 영감도 그럽디다.”
  “사내놈들은 철들면 죽는단 말이 딱 맞어라우.”
  노인당 할머니들 맘이 다 같다. 죽을 때가 돼야 겨우 철드는 사내들.
  “원수 같은 영감탱이들. 사재 넋이 같은 영감탱구들.” 겨울 노인당, 영감님들 앞서 보내고 생의 마지막 휴가를 즐기는 할머니들 얼굴이 모처럼 환하다.
  
  도시 사람들 투기 대상이 된 지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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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 금일도에서 금당도행 배를 탔다. 선실 풍경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르신 한분이 말을 걸어온다.
  “그거이 돼지털이요?”
  “예, 디지털카메랍니다.”
  “내가 본래 사진을 많이 찍는디, 아직도 나는 옛날 카메라를 쓴단 말이시. 한대 장만해야 쓰것는디.”
  “풍경 사진 많이 찍으시나 봐요.”
  “그람, 내가 이 완도 일대 섬들 땅을 다 거래하는 부동산을 한단 말이시. 그라니 땅을 봬 줄라면 사진을 찍어야제. 근디 어디서 왔소.”
  “인천이요.”
  “요새 인천 사람들이 여그 땅을 많이 산단 말이시. 인천 주안 사람 하나도 경치 좋은 곳을 알아봐 달라고 해서 내 지금 생일도에 안 갔다 오요.”
  이 남해의 섬들도 진즉부터 도시 사람들의 부동산 투기 대상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실제로 별장이나 노후에 살 집을 지으려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 어르신이 다녀온 생일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서울의 어느 중학교 교장 선생이 생일도에 땅을 조금 사뒀다. 정년퇴임 뒤 별장을 지을 계획이었다. 마침내 퇴직을 한 교장 선생, 생일도를 찾았다. 자기 땅이긴 하지만 부동산을 통해 소개받았을 뿐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땅을 찾아간 교장 선생, 기겁을 하고 말았다.
  해발 483m, 그의 땅은 생일도의 산 중에서도 가장 높은 산 맨 꼭대기에 있었다. ‘섬의 산이 높아야 얼마나 높겠는가, 전망 좋은 산자락이겠지’ 생각했던 것이다. 도로도 없는 산꼭대기에 어찌 별장을 지을 것인가. 전망 하나는 기가 막혔을 테지만 기획부동산 업자에게 농락당한 교장 선생, 끝내 쓴물만 다시다 돌아가야 했다.
   시인·<자발적 가난의 행복> 저자 bogiln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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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