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는 있는데 왜 ‘해남’은 없을까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제주의 87살 최고령 해녀에게 듣는 ‘해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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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해산물 채취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여자를 해녀라 한다. 그런데 해녀는 있는데 ‘해남’은 왜 없을까. 제주를 여행해 본 사람이면 한번쯤 품어봤을 의문이다. 해녀는 일본식 표현이고 원래는 잠수 또는 잠녀라 했다. 본디 잠수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해남’도 있었던 것이다. 전복을 따서 공물로 바치는 남자 잠수는 포작이라 했다.
 
제주 사람들은 대체로 어부나 잠수로 생을 이어 갔다. 잠수에 대한 관의 수탈이 극심했다. 16세기 후반에는 공납과 부역, 가혹한 세금 등쌀에 수많은 제주 남자들이 육지로 탈출했다. 그에 대응해 조선왕조는 200년 동안이나 출륙금지령을 내려 제주 사람 전체를 유배 죄인으로 만들기도 했다. 뭍으로 탈출하고, 바다에서 죽고, 남자들 수는 급격히 줄었다. 그때부터 잠수 일은 여자가 도맡아 했다. 제주가 ‘여다’의 섬이 된 이면에는 그토록 아픈 수탈의 역사가 있었다. 삼다도는 낭만의 삼다도가 아니라 고통의 삼다도였던 것이다.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까닭에 지금도 해녀들은 위계가 엄격하고, 최고 지도자인 상군의 풍모는 늠름하다. 구십을 바라보는 상군 해녀가 20㎏ 가까운 등짐을 지고 걸어오신다. 중문 바다에서 물질한 해산물. 제 한 몸 건사하기도 쉽지 않은 나이지만 노해녀는 짐을 지고도 당당하다.
 
고인호(87) 할머니는 중문해수욕장 옆 ‘색달 해녀의 집’의 상군 해녀, 해녀 대장이다. 아마 현역으로는 세계 최고령 해녀이지 싶다. 이곳에서는 해녀들이 개인 좌판을 펴고 물질해온 해산물을 판다. 이 바다에서 나지 않는 멍게는 외부 유입이 허락되지만 소라·전복·성게·해삼 등은 본인이 물질한 것만 팔 수 있다. 다른 데서 사다 팔면 퇴출이다. 고 할머니는 중문에서 태어나 15살부터 해녀가 됐으니 벌써 72년째 현역 해녀다. 여전히 피부도 좋고 고우시다.
 
“미인이셨겠어요.”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한마디 하신다. “나 젊었을 때는 고왔지. 키도 크고.” “인기 좋으셨죠?” “남자는 필요 없었어. 이녁 눈에도 들지 않고.” 눈이 높아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 않으셨던 게다. 할머니는 17살에 결혼해서 딸 하나를 뒀지만 23살 때 청상이 됐다. 한국전쟁 중에 남편은 폭사했다. 28살 때 재혼해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이를 더 낳고 싶은 맘이 없었다. “자식만 많이 낳아서 뭐해. 사람 못 만들면 소용없지.” 아이를 더 낳지 않으려고 멀리하다 보니 정이 없어져 갔다. 그 끝에 남편은 “다시 마누라를 정해” 갔다. 그 후 할머니는 내내 혼자 살며 물질해서 자식들을 키웠다.
 
“혼자가 좋아. 누구 비위 맞출 일 없고. 이녁 자유로 살아.” 지금도 혼자다. “자식들하고 음식도 맞지 않고 같이 못 살아. 혼자가 편해.” 할머니는 “집에서는 답답한데 바닷속에 들어가면 시원”하다. 죽는 날까지 내내 그러하실 게다.


시인·<올레, 사랑을 만나다> 저자 bogilnar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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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