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구렁이가 울면 비가 오고 여자는 금기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파시14>  30년대~40년대 새우잡이 불빛 ‘덕적 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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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군도(德積群島)에서 근대적 의미의 어업이 시작된 것은 1900년, 소야도의 조덕기씨 등이 울도 근해에서 새우 어장을 발견한 직후다. 1930년 12월 5일, 덕적면 어업조합이 설립됐고 덕적도의 어선들은 평북 의주 앞바다에서 영광이나 제주도까지 조업을 나갔다. 1939~40년, 덕적도의 어선은 중선 140척, 소선 200척, 발동선 30여척 등 모두 370여 척이나 됐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도 중선이 68척, 소선 100척, 발동선 10여척 등 180여척이었다. 덕적군도의 어업이 번창하게 된 것도 중국의 청도, 대련, 천진, 상해 등지로 울도 어장의 건하(마른새우)를 수출하면서부터다. 중국 상인들은 덕적도에 상주하며 건하를 수매해 중국에 팔았다.
 
 
작은 마을엔 온통 술집 천지
 
음력 3월 중순, 어선들이 몰려들면 울도에는 새우 파시가 섰다. 파시는 30년대 말에서 40년대 말까지 가장 크게 번성했다. 울도의 “작은 마을은 온통 술집 천지”였다. 야간 조업을 하는 새우잡이 어선들의 불빛이 장관이었다. 그래서 ‘울도어화’는 덕적 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하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고 수출길이 막히자 울도 새우파시도 막을 내렸다. 그후 울도, 문갑도 등 덕적 근해에서 잡힌 새우는 젓새우로 팔려 나갔다. 중선배들이 울도 어장으로 새우잡이를 오면 덕적면 어업조합에서는 싣고 온 소금가마 숫자에 따라 어업세를 매겼다. 젓새우는 배에서 바로 소금에 절였기 때문에 소금의 양이 어획량의 척도였다. 새우는 경매를 하지 않고 상회를 통해서 거래됐다. 젓새우는 대부분 부평의 새우젓 토굴로 보내졌고 토굴 속에서 숙성된 뒤 김장용으로 팔려 나갔다. 
 
향토사학자 김광현은 <덕적도사>에서 과거 덕적군도의 주요 어장으로 덕적도, 선협도(선갑도), 수심도, 굴업도 등을 꼽고 있다. 주요 어족은 석수어(조기), 민어, 수조기, 도미, 가자미, 홍어, 새우(白蝦), 갈치(刀魚), 농어 등이었다. 조기는 수심도 이북에서 많이 났고 수조기는 영흥도 근해서 주로 잡혔다. 민어는 굴업도 어장이 단연 최고였다. 덕적군도 어민들의 어로활동은 3월, 울도 어장의 새우 잡이부터 시작돼 11월까지 조기, 민어, 육젓 새우, 추젓 새우 잡이로 이어졌다. 12월부터 보름정도는 대청, 소청도 부근에서 홍어를 잡았다. 그 후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휴어기였다. 이때 선박을 수리하고 어구 등을 정비했다. 
 
본래 덕적군도의 어업 근거지는 굴업도였다. 민어 철 굴업도에는 전라, 충청, 황해도 등지에서 몰려온 수 백 척의 어선들로 파시가 형성됐다. 하지만 1923년 굴업도에 해일이 덮쳐 많은 어부들이 사망한 뒤 굴업도 파시는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덕적도 북리가 새로운 어업 근거지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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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짚 엮어 장대 끝에 매단 봉죽으로 만선 알려

 
덕적도의 어로 풍습도 연평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적도 어선들도 만선일 때는 선체를 광목으로 둘러싸고 봉죽을 세워 기세를 올리며 포구로 돌아왔다. 봉죽은 어획고를 표시하는 종이꽃이었다. 본래 긴 대나무에 한지를 붙여 꽃모양으로 만들었지만 덕적도에서는 값 비싼 한지 대신 볏짚을 둥글게 엮어서 장대 끝에 매달았다. 선주는 봉죽의 개수를 헤아려 자기 배의 수익을 알아챘다. 통신이 없던 시절의 통신 수단. 그래서 어부들은 뱃고사 때나 조업 중에 봉죽타령을 부르며 풍어를 기원했다. 배가 들어오면 선주 집에서는 마질주(맞이 술)를 준비해서 선주부인이 직접 마중을 나가 선원들을 대접했다. 
 
한국전쟁 이후 이북 피난민들이 유입되면서 덕적도에도 배치기 노래가 퍼졌고 풍어굿도 유행했다. 덕적도 선주민들은 “굿을 잘 안했다.” 피난민 출신 선주가 운영하는 북리 배들이 굿을 많이 했다. 정초가 되면 북리 선주들은 돼지 잡고 떡을 쪄서 굿을 했다. 굿은 사흘에서 닷새까지 이어졌다. “굿을 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처럼 환희로웠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몸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덕적도에도 무당이 있었지만 대체로 인천에서 모셔온 황해도 출신 큰 무당이 굿을 했다. 섬사람들은 정초부터 보름까지는 대부분 흥청거리며 놀았다. 
 
섣달 그믐날이면 주민들은 덕적도의 주산인 국수봉 산신령을 모시는 당집에서 마을 제사인 고사(당제)를 지냈다. 제주로 정해진 집을 ‘도가 집’이라 했다. 제주가 되면 부부간에 잠자리도 금했다. 고사 날에는 시루떡 등의 제수를 정성껏 바쳤다. 특별히 정성을 드릴 때는 작은 솥을 들고 당집에 가 직접 밥을 해서 바쳤다. 섣달 그믐날이면 또 선장과 화장도 바닷물에 목욕재계를 하고 배서낭께 바치는 뱃고사를 준비했다. 제물로는 시루떡과 생선, 삼색 과일, 나물 등이 올려졌다. 생선은 첫 출어 시에 잡은 것을 말려두었다가 쪄서 올렸다. 비늘이 없거나 숭어처럼 뱀 머리를 닮은 생선은 쓰지 않았다.
 
 
신들끼리 다툰다고 시루떡도 따로 쪄
 
d2-3 copy.jpg배서낭은 여서낭, 남서낭, 조상서낭, 애기씨서낭, 용서낭, 호랑이서낭, 뱀서낭, 쥐서낭 등 다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덕적도 선주들은 애기씨서낭을 배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일반적으로 배서낭은 선주의 꿈에 나타난 형상에 따라 정해지거나 무당에 의해 결정됐다. 애기씨서낭은 쥐나 귀뚜라미 울음 같은 소리를 내서 위험을 알려 준다고 믿었다. 애기씨서낭에게는 색동옷이나 사탕, 과자, 인형 등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물건을 바쳤다. 처음 잡은 물고기를 잡아 판 돈은 애기씨 앞에 바치고 재복과 건강을 기원했다. 
 
덕적도 배들은 한 배에 애기씨서낭을 여럿 모시기도 했다. 이물에는 이물서낭, 고물에는 고물서낭, 어떤 배는 많게는 일곱 분의 서낭까지 모셨다. 그런 배의 선주는 뱃고사를 드릴 때면 일곱 서낭 모두에게 시루떡을 따로 쪄서 바쳤다. 시루가 하나면 신들끼리도 다툰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들을 배려한 것이다. 섣달그믐 뱃고사 날이면 선주는 애기씨서낭을 ‘소당’했다. 소당은 불태운다는 뜻이다. 새해에는 다시 한지로 애기씨서낭을 접어서 선실에 모셨다. 그 정성이 대단했다. 다른 종교들이 십자가나 성상, 불상을 조각하고 그려서 모시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조업이 잘 안될 때나 봄, 가을 두 번 출항 일에 뱃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덕적도에도 어업과 관련된 금기가 많았다. 어느 지방이나 그랬듯이 여자들은 어선에 타지 못했다. 심지어 출어하는 날 아침에 여자를 만나면 ‘재수 없다’하여 출어를 포기하기도 했다. 또 배에는 소, 돼지, 개를 제외한 다른 동물은 일절 싣지 못했다. 애기를 낳은 집의 선원은 ‘부정 간다’ 했다. 그래서 3일 동안은 배를 탈 수 없었다. 아이를 낳고 3일 전에 어선이 출어할 경우에는 복숭아나무 가지를 잘라서 들고 배를 탔다. 그러면 부정이 방지된다고 믿었다. 
 
어민들에게 금기는 기독교의 십계명이나 불교의 계율과 다르지 않았다. 어로 활동에는 날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래서 어부들은 자연의 징후를 보고 다음날 날씨를 짐작하는 지혜를 얻었다. 봄에 서남풍이 불면 반드시 비가 온다 했다. 안개 낀 날 멀리서 기계 소리가 나지만 배 모양이 보이지 않으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했다. 또 먼 산이 가깝게 보이면 비가 온다고 했다. 낙조 때 서쪽 바다가 붉게 물들면 비가 오고, 능구렁이가 울어도 비가 오고, 쌍무지개가 떠도 비가 온다고 했다. 머리가 가려워도 비가 온다 했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기획 인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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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