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배를 타면 천 배를 건너다녔다” 강제윤 시인의 섬 기행

서해의 황금시대, 파시 ④ 다시 연평도
파시 원래 이름은 작사, ‘거짓을 만든다’는 뜻
종이보다 돈이 흔해서 종이 없으면 밑닦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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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는 한국에서는 서해지만 중국의 방위로는 동해다. 태평양의 일부이기도 한 황해는 중국 동부 해안과 한반도 서부 해안 사이의 바다다. 서해니 동해니 하는 이름보다는 황해라는 이름이 보다 가치중립적이다. 국제 표준도 황해다. 황하[黃河]에서 흘러든 토사 때문에 항상 바닷물이 누렇게 흐려서 황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고 한반도 서해안의 모든 바다가 황해는 아니다. 황해의 북서쪽은 발해(渤海). 발해는 중국의 요동반도와 산둥반도 사이의 바다다.
 
태평양 평균 깊이는 4071m, 동해 1684m, 황해는 44m
 
황해의 남쪽 경계는 제주도에서 양자강 하구에 이르는 선이다. 동해의 평균 수심은 1684미터, 태평양의 평균 수심은 4071미터다. 황해는 평균 수심 44미터, 최대 수심 90미터로 세계의 수많은 바다 중에서도 수심이 얕기로 유명하다. 황해 바닥은 1억 년 전 중생대 백악기 시대의 암반이다. 지질학자들은 그 당시 황해가 호수가 있는 육지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와 같은 황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만5천 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가면서 기후가 따뜻해진 때문이다. 빙하가 녹자 넓은 들판에 바닷물이 밀려들어와 황해가 형성됐다. 황해 지역이 ‘상전벽해’ 되면서 대륙의 일부였던 연평도 또한 섬이 되었다.
 
한반도 유사 이래 오랜 세월 동안 연평도는 해주 문화권이었다. 연평도에서 해주는 30km 거리에 불과하다. 1953년 7월27일 한국전쟁 휴전협정 이후 해주가 북한 땅이 되면서 연평도는 인천 문화권으로 편입됐다. 그때 연평도와 같은 면을 이루고 있던 대수압도, 소수압도 등은 이제 북한의 영토다. 연평도에서 1.6km 거리에 북방한계선(NLL)이 지난다.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인해 손 내밀면 잡힐 듯 가깝던 이웃 섬마을이 갈 수 없는 먼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연평도는 옛날부터 군사적요충지이기도 했다. 조선 중종 25년(1530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어 왜구와 해적들을 감시했다. 인천시 옹진군 연평면, 인천에서 뱃길 122km의 먼 거리지만 연평도는 이제 생활권도 행정구역도 인천이다. 연평도는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두 개의 유인도를 함께 이르는 명칭이다. 크다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연평면의 본섬인 대연평도 또한 가로 3.7km, 세로 2.7km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섬은 동북쪽의 낭까리봉뿌리, 남서쪽의 가래칠기뿌리, 서북쪽의 개모가지낭뿌리, 세 개의 뿌리를 축으로 삼각형 모양의 해안선을 이룬다.
 
조기잡이 첫 기록은 세종 때…파시의 역사는 구한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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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의 작은 섬들이 오랜 세월 모진 풍랑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무인도인 당섬과 모이도, 책섬, 구지도 등은 서로가 서로의 방파제가 되고 바람막이가 되어 스스로를 지켜왔던 것은 아닐까. 여객선이 들고나는 포구는 당섬에 있다. 근래까지도 무인도였던 당섬은 연도교로 어미섬과 이어져 대연평도로 편입되었다. 당섬 뱃머리에서 마을 입구까지는 5리 길이 조금 못 된다. 연평 마을 앞바다의 갯벌은 드넓다. 간조시에는 당섬, 거문여, 용위, 책섬, 군두라이 등의 무인도와 여, 줄등까지 바닥이 훤히 다 드러난다.
 
100여년 전까지 연평도의 포구는 현재의 연평항이 아니라 북쪽 해안의 대나루 포구(大津)였다. 해주나 옹진 방면으로 오가는 배들이 모두 이 대나루 포구로 드나들었다. 지금은 철책선에 가로막혀 사람도 배도 더 이상 오도 가도 못하지만 그때는 연평도산 굴비를 실은 배들도 모두 대나루 포구에서 출항했을 것이다. 조기의 섬, 연평도의 조기잡이가 역사에 처음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조선 세종 때다.
 
“토산(土産)은 조기[石首魚]가 주의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  연평도(延平島) 대진(大津) 남쪽에 있는데, 물길이 30리이다. 산연평도(山延坪島)는 대진 남쪽에 있는데, 물길이 45리이다.“ (세종실록지리지 황해도 해주목)
 
조기산지가 연평도 대나루 남쪽바다 어장이었다 하니 이는 안목어장을 일컫는 듯하다. 1815년에 편찬된 ‘규합총서’에서도 빙허각 이씨가 팔도의 특산물 중 하나로 연평도의 조기(石魚)를 들 정도로 연평도 조기는 조선시대 내내 이름났지만 대규모 조기잡이가 시작된 것은 구한말부터다. 조기배들이 몰려들면서 조기 파시의 역사도 시작됐다. 파시란 본래 어장에서 직접 생선을 사고파는 해상시장을 뜻했지만 점차 어장 부근의 섬이나 포구에서 생선과 생필품 등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확장되어 갔다.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로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장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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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의 가장 큰 특징은 한시성과 유동성이다. 조기 같은 어류의 이동에 따라 어선들이 이동하고 그와 함께 어업근거지를 중심으로 임시시장이 서는 것이다. 연평도를 비롯해 위도, 흑산도 파시 등이 서해안 3대 조기파시로 가장 이름 높았다. 일제 때는 이들 파시 외에도 해남 어란진, 군산 연도, 어청도, 보령 녹도, 강화 아차도 등 서남해 곳곳에 파시가 섰었다.
 
우리는 과거 연평도에 형성됐던 임시 시장을 파시라고 부른다. 하지만 파시는 근래 들어 사용된 말이다. 당시 연평도에서는 파시보다 작사(作詐)란 말을 주로 썼다. 연평파시가 아니라 연평작사(作詐)라 했다. 지금도 연평도 노인들은 “작사 때...”로 칭한다. 작사(作詐)란 ‘거짓을 만든다’는 뜻이다. 없던 일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그런 용어가 쓰였을 것이다. 옹진군 향토지는 작사를 ‘거짓과 사기가 판치는 무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전투구, 연평 작사에서는 물건을 거래하며 속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흘 벌어 일 년 먹는” 장사판이었느니 오죽했으랴. 연평 작사의 주인공은 조기잡이 어부들과 술파는 작부들이지만 그들은 무대에 선 배우였을 뿐 진짜 이익을 챙기는 제작자와 감독은 따로 있었다. 전주와 객주, 색주가 주인, 선주들이 그들이었다.
 
해마다 봄이면 수 백 억의 조기 군단이 연평도 근해를 찾아왔다. 조기 떼가 몰려오면 연평 바다는 순식간에 수천척의 배들로 가득 찼다. 덩달아 연평도에도 파시가 섰다. 파시는 3월 하순부터 망종 무렵인 6월 초까지 두 달 남짓 계속됐다. 당섬에서 연평도까지 “한배를 타면 천배를 건너다닌다”고 했다. 파시 때 연평도는 사흘 벌어 일 년 먹는다 할 정도로 돈이 넘쳤다. 종이보다 돈이 흔해서 종이가 없으면 급한 대로 돈으로 밑을 닦고 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고도 한다.
 
어린 조기들이 자라며 어부들의 ‘만선’ 꿈도 영글어
 
조기나 고등어처럼 떼로 몰려다니는 물고기들의 습성으로 인해 파시는 번성했다. 다른 작은 물고기들처럼 조기가 무리지어 다니는 것은 자기 방어 전략이다. 떼를 지어 다니면 포식자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고 큰 물고기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에게는 척추동물에게는 없는 특별한 감각기관이 있다. 몸의 양 측면 머리부터 꼬리까지 뻗어 있는 측선 감각기관. 조기 같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물고기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것은 이 기관을 통해 다른 물고기들을 감지할 수 있는 까닭이다.
 
봄 산란철 조기들은 칠산어장을 비롯한 기수구역을 따라 연평도로 몰려온다. 민물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구역(강어귀)에는 강물에서 흘러온 영양분이 풍부하다. 햇볕 따뜻한 봄이면 이 영양분들 덕에 플랑크톤의 번식이 활발해진다. 이런 플랑크톤을 먹이로 조기들은 살이 찌고 기름이 올라 산란장까지 가는 동안 최대의 영양상태가 된다.
 
조기떼가 연평도 근해와 해주만 일대 바다에 당도해 산란을 시작하는 것은 수심이 낮고 넓은 모래밭이 형성되어 있어 산란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조기들은 달이 뜰 때 떼를 지어 집단으로 산란하기도 한다. 암컷조기의 산통이 시작되면 수컷은 암컷의 배를 자극시켜 산란을 돕는다. 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그 알에 방사를 해서 수정이 이루어진다. 연평 해주 인근 바다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어린 조기떼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곳은 깊은 바다에 비해 포식자가 적고 플랑크톤이 많아 알에서 깨어난 어린 물고기들이 안전하게 영양을 섭취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어린 조기들이 자라면 만선을 꿈꾸는 어부들의 꿈도 영글어 갔다. 
 
글·사진 강제윤(시인·<섬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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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반갑습니다. 한겨레신문 이병학 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