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LL과 남북 군사혁신 남북군사력

 

D&D Focus 2010년 8월호 


정략적 의도가 빚어낸 ‘허구적 경계선’과

남북 군사혁신의 실체


 


정략적으로 부각된 NLL 문제


한반도에서 남과 북은 북방한계선(NLL)을 사이에 두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대결과 긴장을 되풀이해 왔다. 사람들은 우리나라 서북 해역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적대적 분단체제에서 원래부터 존재했었던 문제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또는 남북 간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불가피한 대결구조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적어도 1996년 이전까지는 서북 해역에서 남북 군사적 충돌은 상상하지도 못했고, 북한의 해상 위협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가까운 과거에 벌어진 정략적 의도의 산물이다.

1996년 7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민들이 “NLL이 대체 뭐야?”하고 관심을 갖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천용택 새정치국민회의 의원은 대정부 질문에서 북한 함정이 북방한계선(NLL)을 수시로 침범하는데 국방부가 “북한이 자기 어선을 보호하다 우연히 월선 한 것”이라며 북한을 변호하고 있다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에 대해 당시 이양호 국방부 장관이 “북한 함정이 NLL을 넘어와도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며 문제가 안 된다”고 답변하면서 여야 의원 사이에서 고성이 오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직후인 7월 18일에 정동영 국민회의 대변인은 성명에서 “1992년 남북합의서에서 불가침 구역으로 설정해놓은 서해상의 북방한계선을 포기하는 발언을 국방장관이 한 것은 중대한 사태”라며 “정부는 국방장관의 망언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장관을 즉각 해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같은 날 「조선일보」는 해설기사를 통해 “NLL은 휴전 한 달이 지난 1953년 8월 30일 유엔사 측이 최접경 수역인 백령도 연평도 등 6개 도서군과 이를 마주하는 북한 측 지역과의 중간지점 해상에 임의로 설정한 것”이라며 “이 때문에 서로 간의 수역을 침범했을 경우 국제법적으로 제소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조선일보」는 “무력충돌을 우려해 양측이 ‘힘의 균형’을 통해 자제하고 있을 뿐으로 이양호 국방장관이 ‘NLL 침범이 정전협정 위반사항은 아니다’라는 답변은 맞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엽적으로 거론되어 오던 NLL이 본격적으로 정치쟁점화 된 최초의 공방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보수와 진보의 입장이 정반대다. 그 이유는 뭘까? 다름 아닌 북풍 논란이었다. 1996년 3월 말에 북한군이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호국훈련’에 반발하여 전쟁불사 강경발언이 나오고 4월 초에 판문점에 박격포 진지를 설치하는 등 중무장 군인의 판문점 난입으로 남북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대북 감시태세를 격상시키고 연일 군사적 대응을 천명하면서 남북 간에는 극도로 긴장이 높아졌다. 이 여파로 당시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4월 11일 실시된 국회의원 총선에서 여론조사 예상치보다 20석 이상을 잃어버리며 완패했다. 이에 야당은 그 패인이 4월 위기 시에 정권이 북한군의 판문점 난입이 위기가 아닌데 위기로 부풀려서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소위 ‘북풍 논란’을 점화한 것이다. 6월에 소집된 임시국회에서 이 문제를 따지기로 단단히 벼른 야당은 “판문점에 북한군이 난입한 것이 위기라면 엄연히 영토선인 NLL에는 연간 수 백회 북한이 월선을 하는데 이것은 왜 위기가 아니냐”는 취지로 NLL 문제를 부각시킨 것이다.

이에 대해 “NLL은 영토선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야당의 북풍 조작 의혹제기를 방어하면서 이양호 국방장관이 “넘어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실수를 했다. 이 말이 기폭제가 되어 여야 간의 정치적 대립은 더더욱 격화된 셈이다. NLL의 안보적 가치로 거론되는 ‘인천 방어’라든지, ‘서북 해역 안전보장’은 최초 NLL 논란이 일어나게 된 계기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북한의 NLL 침범으로 인한 우리의 안보위협 가중이라는 문제는 처음부터 그리 심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여야 간에 ‘의도적’으로 부각된 NLL 논란은 “정부의 안보의지는 NLL 사수 의지와 직결된다”는 새로운 도그마를 창출했다. 이것이 바로 1996년의 ‘NLL 학습효과’라고 할 수 있다. ‘평화의 바다’가 ‘분쟁의 바다’로 전환되는 비극의 초대장이 된 것이다.

모호하던 해상 경계선이 90년대 후반에 남북 간에 명확한 의미를 갖는 구체적 경계선으로 부각되면서 남북 간의 정치적․군사적 대결의 최전방으로 NLL의 위상은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북한 배가 NLL을 월남 해 있고, 남한 배가 NLL을 월북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서북 해역의 일반적 양상이 갑자기 엄격한 관리와 통제 속으로 구속된다. 또한 99년 착수된 남측의 영종도 신공항 건설, 2000년의 인천의 신도시 건설 등 ‘서해안 시대’로 표방되는 서북 연안의 국가 이익이 중시되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NLL의 안보적 가치가 갑자기 높아진 것이다. 또한 북한은 동해의 어족자원이 현저히 줄어드는 반면에 서해의 꽃게잡이 외화벌이의 이익은 높아지는 점을 감안하여 북 측 어선의 원활한 어로활동 보장에 대한 군사적 경비의 소요가 높아지고 있었다. 사실 해상경계선은 경비가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작 남북 쌍방의 경비는 경계선을 수호하는 것 보다는 자국의 어선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이루어지고, 이 때문에 군사적 충돌은 민간 어선과 군함이 뒤섞이는 복잡한 양상을 나아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 간에 해상경계선의 지위를 갖지 못한 NLL이 평화적으로 관리될 수 있는 계기를 찾지 못하고 곧바로 충돌로 나아간 것은 안보가 정치에 농락당한 국내정치적 요인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보심리전, 제1연평해전


원래 없던 위협이 위협으로 구체화된 것은 1999년 6월 15일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가서 긴정일 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을 발표하기 꼭 1년 전이다. 제1 연평해전은 북 어선 20여척이 꽃게잡이를 위해 NLL을 월남하면서 이들의 조업을 보장하기 위해 따라온 북한 경비정이 NLL을 넘어온 지 9일째 되는 날 일어났다. 이 날 연평도 인근 서해상에서 남-북한 해군 함정간 함포사격을 동원한 교전을 벌여 6척의 북한 함정들이 침몰하거나 큰 타격을 입고 2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에 북 함정은 NLL 북쪽으로 퇴각했다. 군 당국은 이날 연평도와 백령도 등 서해 5도 지역에 대해 대북 전투준비태세를 평상시의 ‘데프콘4’에서 ‘데프콘3’에 준하는 전투대비령으로 높이는 한편, 대북 정보감시태세도 ‘워치콘3’에서 ‘워치콘2’로 강화, 사실상 준전시상황에 돌입했다. 우리나라 비상사태 법령에 의하면 ‘데프콘3’은 전쟁징후가 있는 단계이다.

이 당시 김대중 정부가 분쟁을 관리하면서 보여준 위기관리의 원칙은 이러했다.

첫째, 정부는 당시 남북 함정 간의 충돌이 대규모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비례성의 원칙’을 고수했다. 북한의 경비정이 남하했다고 하지만 실제 남측과 교전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교전이 발생하면 북한의 후방 전력이 이에 가세하여 확전할 의지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전방의 해군 전력만이 아니라 한국군 정보 전력이 총동원되어 북한 해군 지휘부와 관할 함대사령부의 동향, 그리고 지상기지에 있는 실크웜 지대함 미사일, 100mm 장사정포의 동향을 모두 관찰했다. 그 결과 북한군의 확전의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제한적인 군사적 대응을 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교전수칙에 따라 경고방송에 이어 우리함이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는 차단기동을 먼저 실시한 것이다. 이와 함께 북한에 확전의지가 없다는 점을 확인시키기 위해 대형 구축함은 모두 후방 이남으로 배치했다.  

여기에서 압도적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제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핵심 토대로서 정보․심리전의 능력이 매우 중요했다. 한미 연합정보자산과 우리의 자주정보력이 결합된 정보능력은 이 당시 분쟁의 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즉 비례성의 원칙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은 북한의 ‘의도’에 대한 판단능력이다. 이를 기초로 비로소 정착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비례성의 원칙’을 구현할 수 있다. 북한이 경비정을 내려 보내면 우리는 고속정을 올려 보내고, 충분한 경고방송과 차단기동 후에 북한이 사격을 하면 우리도 기관포와 주포를 대응한다는 식의 교전규칙을 준수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교전규칙은 ① 경고방송 ② 시위기동 ③ 차단기동 ④ 경고사격 ⑤ 격파사격 순으로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둘째, 이러한 제한적 군사대응을 통제하기 위해 청와대와 국방부․합참이 현장의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등 확고한 문민통제를 관철시켰다. 현장 해군 지휘관의 재량권은 확전 방지를 위해 제한되었으며, 국가 최고 위기관리 계층에서 사태를 직접 주도했다. 국가 위기관리계층은 북한이 확전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한 후에 교전을 승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사건 전후에 해군과 합참 간에는 상당한 갈등이 발생하는 등 부작용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해군은 우리 함정이 위험에 처하게 될 교전규칙 적용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셋째, 그러나 우발적으로 교전이 확대될 것에 대비하여 인근 후방에 중대형 구축함과 지․해․공 합동 전력을 대기시켜 억제력을 발휘하도록 하였다.

일방적인 우리 측의 승리로 해전이 종료된 후에 정부는 우리의 압도적인 무력으로 서해에서 북한을 제압하는데 크게 자신감을 갖고 고무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14일 국무회의에서 “확고하게 나라의 권익을 지키되 무력충돌이나 더 이상 큰 사태로 번지지 않도록 하라”고 말했다. 또한 15일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도 해전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은 계속 유지하기로 하였으며, 남북 차관급 회담과 비료지원, 금강산 관광 협의 등 경협은 예정대로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감춰진 교신일지


한 번 성공한 위기관리 방식을 바꾸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군사 전술의 혁신은 승자보다는 패자가 더 절치부심으로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 동서고금 전사의 교훈이다. 1차 대전에 패한 독일이 승자인 프랑스 군대보다 더 과감한 군사혁신으로 2차 대전 시에 전세를 역전시킨 사례가 바로 그러하다. 제1차 연평해전 이후 합참은 이점을 주목하여 북한의 전술변화를 예측하려 하였는데, 그 중 가장 중시된 것이 잠수함이나 반잠수정에 의한 침투도발이었다. 당시 합참은 북한이 수중 전력으로 남측을 압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수중으로 도발하는 전술적 변화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북한의 수중 도발은 이번 천안함 사건이 있기 11년 전에 이미 경고된 사실이었다. 항상 그러한 경고가 있었는데도 우리가 대비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해군력의 압도적 우위를 확인한 승자의 도취감은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예전의 승리한 방식’대로 군사대비태세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뼈아픈 패배를 당한 북한 해군은 이제껏 남측의 해군력을 압도할 수 있다는 그간의 맹신이 붕괴되면서 전술적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우리 교전수칙의 허점을 정확히 공략하는 것이다.

2002년 6월 29일, 서해 NLL 남쪽 3마일, 연평도 서쪽 14마일 부근에서 남북 해군 간에 교전이 발생하여 교전에 앞서 북방한계선 북한 측 해상에서 북한의 꽃게잡이 어선을 경계하던 북한 경비정 2척이 남한측 북방한계선을 침범하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한국 해군의 고속정 4척이 즉각 대응에 나서 초계와 동시에 퇴거 경고 방송을 하는 한편, 교전 대비태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징후도 없이 북한 경비정이 갑자기 선제 기습포격을 가해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이때부터 양측 함정 사이에 교전이 시작되고, 곧바로 인근 해역에 있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교전에 합류하였다. 이어 10시 43분경 북한 경비정 1척에서 화염이 발생하자 나머지 1척과 함께 퇴각하기 시작해, 10시 50분경 북방한계선을 넘어 북상함으로써 교전은 25분 만에 끝이 났다.

이 교전으로 한국 해군 윤영하 소령을 비롯한 6명이 전사하였으며, 19명이 부상하고 참수리가 침몰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북한 측 경비정 1척도 수백발의 사격을 받고 화염에 휩싸인 것으로 관측된 것으로 미루어 상당한 인명 및 함정 피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정보당국의 분석 결과 1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 측의 소극적 교전의지로 평가되었던데 반해, 2차 연평해전은 처음부터 북 측이 의도적으로 도발할 의지가 발견되는 ‘사전 징후’가 있었다. 이러한 정보에 대해 군 수뇌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국가 위기관리 기능이 크게 흔들렸다는 점이다. 이것이 2002년 당시에 우리 사회 내부의 극심한 남남갈등으로 분출되는 계기를 형성한 점은 매우 뼈아픈 대목이다.

정보관리에 있어 석연치 않은 점은 교전 양상에서도 드러났다. 당시 복잡한 교전규칙 하에서 북한군의 급속 기동에 직면한 참수리호의 대위는 2함대사령부에 발포 명령을 요청했으나 승인되지 않았다. 무전기를 들고 함대사령부와 교신하던 윤영하 당시 대위는 참수리호의 정장으로서 자신의 상관인 함대 작전관에게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이 ××야!”

이 말이 끝나는 순간 조타실에 북측 함정이 발포한 포탄이 명중되어 윤 대위는 사망했다. 아마도 그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순간 북한 보다는 교전을 승인하지 않는 아군 상관을 더 원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국방부는 이 교신일지를 연평 해전 후에 공개하지 않았다. 

북한의 의도적 도발은 새로운 전술적 양상을 드러냈다. 신형 함정과 자동 사격통제장치로 무장된 우리 측 함정에 대응할 수 없었던 북한의 재래식 함정은 전차에서 사용되던 85mm 포를 떼어 함정에 실고 처음부터 조준을 한 상태로 우리 함정에 급속 접근하여 기습공격을 했다. 여기에서 일부 지상전력(전차포)와 해상전력(경비정)을 융합시킨 새로운 선제 공격력은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융합이고, 전술적 변화였다. 이러한 북한군의 작전은 기존에 알던 ‘속도의 개념’을 혁신하여 보다 빠르고 선제적인 군사행동이 해상에서 효과적이라는 준비된 인식을 바탕으로 했다. 북한군의 전술변화는 앞서 말한 5단계 교전규칙 중 ② 단계(시위기동)과 ③ 단계(차단기동) 사이의 공간을 노리는 것이었다. 우리 측 전술에 대한 철저한 분석을 통해 그 빈 공간을 파고드는 것이다. 바로 기동과 반응에 있어 ‘속도의 혁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제2의 연평해전을 통해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했던 모호한 경계선이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순간 정서적으로 강력한 상징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수장된 함정과 그 위를 덮는 통곡, 탄식, 분노가 쌓이는 순간 심리적으로 군 전체가 대결과 긴장으로 결속되었다. 결국 평화의 바다가 분쟁의 바다로 전환되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서 한 번 얻어맞으면 반드시 보복한다”는 응징과 보복의 메커니즘이 정착되는 위험한 국면이 창출되었다. 



‘악어 사냥 식’ 전격전 


한편 북 측은 ‘대남 전면대결 태세’와 남북 간의 모든 합의를 무효화하는 군사 논평원의 보도에 이어 연일 남측의 대북정책에 대해 거부의사를 명확히 하였다. 이로써 서북해역에서 위기발생의 가능성은 급격히 높아졌는데 반해, 정작 위기를 관리하는 기본 방향과 지침은 발전되지 않고 거의 모든 정책결정이 국방부장관에게 위임하는 형태로 위기관리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지난 10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국지적 충돌이 전면전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던 장치가 모호해졌다. ‘전쟁 억제’라는 국가 위기관리의 기축이 ‘전쟁 승리’라는 야전군 정서로 급격히 경도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를 북한에 ‘친절하게(?)’ 알려주는 전략이다. ‘우리 패를 다 깠으니 어떻게 할래?’라고 북에 노골적으로 묻는 겪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군사전략의 변화가 ‘특급기밀’임에도 불구하고 작년 1년 간 조선․중앙․동아․연합 4개 언론사에 폭주하듯이 보도된 것은 유력언론과 국방세력의 유착 관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이는 단순히 NLL 대비계획에 국한되지 않고 연이어 터진 북한의 로켓 발사 시험, 핵 실험 시기에 북한 발사기지 지명, 이동상황, 발사 준비상황에 대한 동맹국의 군사정보가 거의 다 언론에 노출됨으로써 국방부의 군사 보안체계는 거의 패닉 상태에 도달한다. 작년 1년 간 이례적인 군사기밀의 언론보도 폭주현상은 남북 군사정세에 새로운 긴장고조 요인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변화된 정세가 남북 간에 군사충돌로 비화된 사례가 작년 11월 대청해전이다. NLL을 2.2km 남하 한 북한 함정에 대해 우리 측이 경고사격을 가하자 이에 북 함정이 응사하는 과정에서 우리 함정에 총탄에 10발을 피격 받게 되었다. 그러자 우리 함정이 ‘NLL 이북으로 도주하는’ 북한 함정을 계속 추적하여 약 3분 이내에 4960발의 총포탄을 퍼붓고, 격파하여 최소 8명을 사망케 하고 나서 이를 ‘대청해전’이라고 명명했다. 변화된 교전규칙과 NLL 대비계획에 입각한 최초의 충돌인 대청해전에서 우리 군은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단호한 대응’으로 제1 연평해전 이래 10년 만에 가장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은 남측의 변화된 전술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교전규칙 상 빈 공간을 완전히 메우기 위해 경고사격 후 즉시 격파사격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단축이다. 북한군이 2차 연평해전 당시 ‘속도의 혁신’을 했던 것과 거의 유사하게 남한 식 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미 싸울 의지와 능력을 상실한 북 함정을 계속 추격하여 격파하면서 과도하게 총포탄을 발사한 것은 우리 교전규칙을 넘어서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전시일 경우 현장 지휘관이 처벌받을 만한 사안이었다. 왜냐하면 과도한 사격은 추가적인 적의 도발에 대비할 수 있는 포탄 잔여량을 소진시킴으로써 함정의 생존성을 극히 제한하게 된다. 이 때문에 사격 상한선을 엄격히 준수함으로써 지속적인 작전을 해야 하는 해군 함정의 과도한 사격은 교전 시에 엄격하게 제한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듯 변화된 교전양상이 출현한 것은 우리 측의 작전개념과 목표에 근원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첫째, 북한이 도발했을 경우 확실한 ‘전승’과 ‘전과’를 거양한다는 군사적 목표가 명확해진 점이다. 이전까지의 교전은 국가 급 위기관리라는 차원에서 통제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성과보다는 정치적으로 관리된 측면이 강했던데 반해, 이번에는 확실한 응징과 보복을 실행한다는 차원에서의 전과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되었다. 이 때문에 이미 교전 의지와 능력이 마비된 적에 대해서도 격파사격의 성과를 달성함으로써 추가적인 도발의 의도를 예방하려는 의도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둘째, 그러한 군사적 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대비개념은 북한이 비스듬히 NLL을 침범하여 남하다가 북으로 다시 기수를 돌리기 전에 군사적 행동을 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악어가 물속에서 계속 사냥감을 기다라다가 순식간에 낚아채는 방식으로 전격적인 군사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경고방송과 경고사격을 선행시킴으로써 군사행동의 명분을 축적하는 것은 매우 긴요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셋째, 군사행동에 있어 현장지휘관의 재량권을 대폭 강화시켰다. 교전수칙의 단순화와 반응시간 단축에 따라 상부의 지휘보다는 현장에서의 판단이 더 중요한 요인으로 부각된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현장 지휘관에게 미리 제공된 사전지침이 매우 중요해지는데,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새로운 대비개념에 그 근거가 발견된다.  

이 해전이 있고나서 북한은 올해 1월에 3월까지 한시적으로 NLL 일원 5곳에 ‘통항금지구역’을 선포하고 해안포 사격훈련을 감행한다. 해안포는 정확히 NLL 이북 지역에 떨어졌다. 군사적으로 매우 엄중해져가는 분위기에서 3월 26일 밤, 천안함은 평소의 작전기동과 달리 백령도 서남단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장사정포로부터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백령도를 엄폐물로 하여 ‘절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으로의 회피기동이었던 것이다. 즉 대청해전 전후로 변화된 군사정세가 반영된 새로운 함정의 기동양상이 출현했고, 이 모든 것은 백령도 인근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제반 조건을 하나씩 충족시키기 시작했다. 즉 북한으로서는 NLL 해역에서 ‘속도의 혁신’을 통한 더 이상의 전술적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어졌을 때, 이는 다른 방식의 혁신 즉, ‘공간의 혁신’을 추구할 강력한 동기를 형성한 것이다. 



비대칭 속도전, 찬안함 사건


6월 10일 감사원의 감사결과 발표는 사전에 북한의 수중공격 가능성에 대한 경고가 있었음에도 해군은 대잠 능력이 취약한 천안함을 배치함으로써 이에 대한 대비에 소홀한 점이 있었던 것으로 밝혔다. 이에 반해 북한은 백령도 뒤쪽, 즉 서남단에서 우리 함정이 서행하거나 머무르는 경우가 만다는 점을 정확히 간파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우리의 작전기동의 최근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또한 서해상에서 작전기동의 특성이 최소한 대잠함 두 척 이상의 협동작전을 하지 아니하고 단독 기동을 했다는 점, 고속 경비가 아니라 저속 경비라는 점, 지그재그 식 무작위 기동(random patrol)이 아니라 일정한 항로를 운항한다는 점, 서해상에서는 잠수함 탐지능력이 취약하다는 점 등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북한으로서는 수중침투 및 도발이야말로 성공가능성이 매우 높은 방책으로 강한 유혹을 느꼈을 수 있다.    

5월 20일 민군합동조사단의 발표를 근거로 할 때 천안함 사건의 정치․군사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9․11테러와 이라크․아프간 전쟁을 목격한 북한이 한미연합전력의 비교우위를 돌파할 수 있는 비대칭적 교전양상에 강한 집착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군의 전투준비태세 전반에서 이와 같은 현상은 광범위하게 목격된다. 기존 전장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새로운 전술적 변화의 모색은 이번 천안함 사건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하나 둘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천안함 사건 초기에 일부 언론이 보도한 북한의 ‘인간 어뢰’ 부대는 이제껏 우리 군 당국이 인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위협이 출현했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단면의 하나다. 보도에 의하면 ‘바닷속 자살폭탄’으로 알려진 이 부대는 동해와 서해에 각기 1개 여단 3000명 정도씩 총 6000명으로 편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대는 먼 공해상에서 한미연합전력에 대응하기 어려운 북한이 연안에서 접근하는 수상세력에 대한 대응책으로 준비된 것으로 보여 진다. 이러한 현상은 한미연합전력의 수적, 질적 우세에 대칭적으로 대비하는 것을 포기하고 개념과 발상의 혁신을 통해 그들의 비교우위를 행사하고자 하는 혁신적인 방책이다.

같은 맥락에서 전략적 단위에서 핵과 미사일, 작전적 단위에서 지상에서는 18만 특수부대를 주축으로 하는 ‘판 갈이 속전속결’ 전쟁 수행을 위한 군 구조개편 완료, 수중과 해양에서의 수중 우세를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비군사적 수단까지 동원한 비대칭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일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비군사적으로는 해커 부대를 동원한 사이버 공격을 비롯하여 탈북 난민 활용 방안까지 광범위하게 고려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이제껏 북한은 우리가 예상한 수준을 넘어 한미연합전력의 비교우위를 회피하는 전술의 혁신을 줄기차고 일관되게 추진하여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적용되는 속도와 시간의 개념은 매우 복잡하다. 지상군 교전이나 사이버전, 공중방어와 같은 ‘자유공간’에서의 전술은 빠르고 정확한 전술을 요구한다. 그러나 은밀성이 높은 수중, 즉 ‘비자유 공간’에서는 느리고 조용한 전술이 요구된다. 북이 개발한 신형 잠수정(연어급)이나 천안함에 동원된 중어뢰는 빠르고 정밀한 무기라기보다는 소음을 적게 냄으로써 은밀성을 증진하기 위해 느리고 은밀한 전력들이다. 또한 비군사적 수단에 의한 비대칭성을 구현하는 데는 빠르고 느리고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한국의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는 치명성과 공간적 요인이 더욱 중요해진다.    

둘째, 이러한 북한의 군사적 행동의 변화는 이제껏 우리가 알고 있었던 전통적인 전쟁의 개념을 상당부분 퇴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앞으로의 분쟁 양상은 무경고 하에서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시간개념의 근원적인 변화와 함께, 전장의 경계선이 모호한 공간 개념의 변화도 동시에 나타난다. 따라서 전통적인 육해공군의 구분과 작전계획에 입각한 대비태세의 유용성이 크게 저하되고 유연한 신속대응능력이 전쟁승리의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더불어 비대칭 위협에 대한 대비는 군사대비태세라는 영역을 초월하여 국가의 외교(D) + 정보(I) + 경제(E) + 군사력(M)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창출하는 새로운 대비태세를 요구하고 있다. 이 점은 대북정책에서 준비된 개념과 철학이 부족한 현 정부의 대비능력에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셋째, 특히 대비태세의 결정적 관건으로 정보력과 판단력의 중요성이 급격히 제고된다. 이번 천안함 사건에서 동맹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정보는 북한의 잠수함 기지 동향(미 위성정보), 북한이 수출용으로 제작한 어뢰 설계도 파일,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의 실전배치 및 수출과 관련된 정보 등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보의 전면적인 대미의존은 필연적으로 위기관리 전반에서 한국의 자율성을 크게 침해하는 현상을 초래했다. 결국 5월 24일 발표한 대북 ‘단호한 조치’들이 미국의 비협조와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한국의 입지를 심각하게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결국 천안함 사건의 국제화 현상 속에서 정작 서해의 문제는 남북한 간의 문제라는 틀을 넘는 미중관계의 시험대가 되기에 이르렀다.

어쩌면 이것이 초래할 한국 위기관리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천안함 사건은 이명박 정부의 실패한 위기관리의 전형으로 두고두고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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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