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세일즈외교 질책이 국정원 ‘궁지’로 방위산업

 
2011 03/08주간경향 915호
 
ㆍT-50 고등훈련기 수출에 과욕부리다 국제적 망신 당해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 국정원으로 이어지는 정보기관의 역사 속에는 전설 같은 일화가 많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통일벼’로 상징되는 농업혁명은 중앙정보부가 필리핀에서 종자를 훔쳐낸 첩보공작의 결과라는 ‘전설’도 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황장엽 망명을 이끌어낸 안기부 공작은 ‘고전’의 반열에 들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 뇌의 CT 촬영 사진을 해킹으로 빼낸 국정원의 활약은 ‘최신 개봉작’이다.

최초의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이 한반도 상공을 날고 있다.

<iframe style="WIDTH: 100%; HEIGHT: 40px" noResize marginheight="0" src="http://p.lumieyes.com/frm2.asp?domain=news.khan.co.kr&url=" frameborder="0" marginwidth="0" scrolling="no"></iframe>

모두가 교과서엔 안 나오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영웅적인 공작의 역사들이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최고의 첩보요원을 꿈꾸는 젊은 요원들은 가슴이 뛴다. 살아있는 역사가 있기에 정보기관 요원들은 선배를 존경하고, 조직에 충성하며,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애국주의로 무장한다. 언젠가 자신도 그런 영웅이 되는 미래를 꿈꾼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에 몸 바치는 정보기관 요원들의 국가관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덕분에 우리가 이만큼 먹고 살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내가 하는 일은 국가를 위한 것’이기에 언제나 정의로우며, 더 나아가 조금 불법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쉽게 용서받을 것이라는 기대다. 그래서 불법감청이나 미행, 사찰이 자행되어 물의를 일으키곤 한다. 어쩌다가 그런 일이 발각되어 언론에 보도라도 되면 ‘국익을 위해 한 일인데 덮어주어야 할 것 아니냐’는 논리에 안주한다.

최근 일부 관변학자들이 인도네시아 특사단에 대한 국정원 요원들의 사찰사건을 보도한 언론을 비판하면서 ‘국익을 위해 보도에 신중해야 한다’는 이상한 주장을 표출시키고 있다. 국정원 역시 이 사건을 까발리는 여론이 야속하다는 투다. 그러나 그것이 정보기관의 특권의식과 표리관계를 이루며 우리를 도덕 불감증으로 이끄는 아주 위험한 주장이라면…, 최근의 이 논란은 문제점이 많다.

국익을 위해 보도 신중해야 한다?
그렇게 덮어두는 것이 국익이라면 최근에 남북 간에 이중 첩보원으로 20년 넘게 일해온 박채서, 일명 ‘흑금성’을 왜 드러냈는가? 일단 흑금성이 입을 열면 남과 북 첩보기관들의 치부가 드러난다. 지난 연말에 그를 간첩으로 몰아 구속시키고 언론에 보도되게 한 것은 무슨 국익을 위함인가? 게다가 흑금성이 북에 넘겨주었다는 군사기밀이란 작전계획 5027에 있는 작전의 ‘통제선’에 대한 내용이다. 군에서 작전을 해본 장교들이나 을지연습에서 공무원들이 많이 들은 저급한 군사정보다. 게다가 언론에 간간이 보도된 바도 있다. 이게 징역 7년형을 선고받은 ‘중간첩’이 된 핵심적인 이유라면 오히려 북한 군부가 웃을 일이다.

게다가 T-50 고등훈련기 협상에 관한 인도네시아 특사단의 정보수집 공작은 정의롭지도 않고 국익을 위해 필요하지도 않은 공작이었다. 우리가 인도네시아의 고등훈련기 도입 우선협상대상국으로 선정되어야 협상전략이든 뭐든 있을 것인데, 실제로 입수한 노트북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마치 T-50으로 인도네시아 훈련기 기종이 선정된 것으로 오인하고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업계 관계자들조차 어리둥절할 일이다. 이번 인도네시아 특사단 사찰의 가장 큰 해프닝은 선정되지도 않은 T-50이 선정된 것처럼 오인하고 기사를 썼다는 점이다.

국정원 요원들이 대테러 방지훈련의 일환으로 사격연습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


이런 ‘착각’은 이명박 대통령과 국가정보원, 방위사업청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그 발단은 지난해 12월 10일 이명박 대통령과 유도요노 인도네시아 대통령 간의 정상회담 자리에서였다. 대화가 진행되던 중간쯤에 이 대통령이 대뜸 한국의 T-50 고등훈련기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애초 회담의 공식의제에 없던 생뚱맞은 주제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도요노 대통령은 “베리 굿”이라고 한 마디로 반응을 보이고 바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유도요노 대통령이 관심을 가진 사안은 잠수함이었다. 구체적인 도입 숫자까지 밝히며 관심을 표명했다.

“제대로 영업을 하는지 답답하다”
회담이 끝나자마자 이 대통령은 동행했던 장수만 전 방위사업청장을 불러 “도대체 T-50 수출 진행상황을 아느냐, 모르느냐”며 1시간 30분 동안 질책했다. T-50 생산업체인 한국우주항공(KAI)이 “제대로 영업을 하는지 답답하다”는 이 대통령의 반응도 나왔다. 이 말을 듣고 귀국한 장 전 청장은 참모들을 호되게 질책하며 대책을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정상회담 직전까지 누구도 T-50이 정상회담 의제가 될 수 없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던 터에, 갑자기 수행원 명단에도 없던 장 청장이 이 대통령에게 “T-50 협상이 잘 되어 이번 정상회담 때 결실을 본다”고 보고하고 대통령을 쫓아간 것이 화근이 되었다. 장 청장의 호언장담에 말려든 당사자는 이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문제는 국정원이다. 필자가 정상회담 직전에 국정원 고위관계자로부터 “이번 정상회담 때 T-50이 터진다”는 말을 직접 들었을 정도니까.

자원외교, 세일즈 외교를 표방한 이 대통령은 집권 이후 번번이 이 분야에서 물을 먹었다. 집권 초 쿠르드 유전개발 과잉홍보는 사기극으로 밝혀졌고, 이 대통령이 푸틴에게 직접 부탁한 서캄차카 유전개발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자원외교는 초라했다. 중국의 후진타오에게 이 대통령이 눈독들인 원전 개발, 철도 건설 등 관심사가 전달되었는데도 좋은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애초 국무총리실을 자원외교 진용으로 편성하고도 참담한 실패의 연속에 직면한 청와대는 UAE 원전 수출에 100억 달러 제공이라는 이면계약을 체결하고, 특전사를 파병하여 겨우 체면을 살리려 했으나, 이마저도 강한 여론의 역풍에 직면했다. 외국은 이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보려 하는데 자꾸만 장사꾼 기질만 발휘하려 하니까 오히려 심리적 거부감만 커졌다.

이 대통령은 외교부와 지식경제부를 질타하며 몹시 신경이 예민해지던 터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반가운 소식이 “이번에 T-50이 터진다”는 보고였다. 연평도 사건으로 어수선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해외순방 일정이 무리한 상황이었음에도 이 대통령이 인도네시아로 바로 달려갔던 것이다. 이것이 비극의 전말이다.

그리고 국가정보원은 자신들에게 쏟아질 ‘해외 산업지원 활동 부진’이라는 대통령의 질타가 두려웠을 것이다. 그것이 국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첩보활동으로 이어지게 된 핵심 이유다. 젊은 첩보요원들이 꿈꾸는 영웅적 공작활동의 여지는 없어지고 원세훈 국정원장 경질과 국정원 대개혁 여론만 들끓는 그런 해프닝이다.

TAG

Leave Comments


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