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죽음의 법칙을 느끼자 장수박사의 건강 삼위일체

장수박사의 건강 삼위일체 5/죽음의 가치와 생의 보존


가랑비 내리는 가을날이면 나는 문득 부여 낙화암을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백마강에 떠있는 나룻배에 앉아 청주 한잔을 마시면서 안개 낀 낙화암을 바라보며 삼천 궁녀의 애절함과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싶은 곳이다. 이들은 비록 몸은 변하여도 마음은 변치 않기를 바라는 뜻에서 죽음을 택하였으며, 이들에게서 죽음이란 단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원을 추구하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또한 의과대학에서 봉직하고 있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죽는 것을 보게 되고, 잦은 영안실 출입에서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을 본다. 인간 세상에 가장 엄중한 처벌이 사형이라는 것도 죽음의 의미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삶과 죽음은 생명체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명제이며 의미이다.
 
 세포의 죽음과 개체의 죽음: 부분과 전체
 
 개체의 죽음을 정확하게 정의하자면 모든 구성세포들의 죽음이 완결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죽음의 정의는 현실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그러한 과정 중에서 생명에 필수적 기관인 심장,폐,뇌기능이 정지되는 시점을 죽음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세포의 입장에서 죽음이란 생체 내에서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일련의 생명현상이다. 생체를 구성하는 많은 세포들은 일정한 수명이 있으며, 죽어지면 새로운 세포들이 재생되어 이를 보충하여 줌으로써 조직과 개체를 유지하여 준다. 따라서 개체를 구성하는 단위인 세포의 경우에는 죽음에 대한 갈등이 전혀 없다. 오히려 필요에 따라 예정된 수순에 의하여 세포가 죽어져야만 조직의 기능과 구조가 유지된다. 세포의 죽음이 생명을 위한 당위인 셈이다. 혈액내의 적혈구는 수명이 120일이다. 골수에서 생성되어 나온 다음 120일이 지나면 비장 등에서 처리되어 없어진다. 젊은 세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늙은 세포들을 선택적으로 죽도록 하여, 보다 신선한 세포로 혈액을 채운다. 물론 림프구처럼 수명이 긴 세포도 있으려니와 신경세포처럼 태어날 때부터 변하지 않는 세포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정상 조직을 구성하는 세포는 조직의 발생과정에서 위치와 시간에 따라 죽어야 할 세포는 죽어야만 온전한 형태를 갖추는 기관형성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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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관형성과정에는 살아야 할 세포와 죽어야 할 세포가 구분되어 있으며, 이와 같은 부분적 세포의 죽음은 전체로서의 생명체를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이와 같이 생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죽음이 예정되어있는 예정사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예정사는 마치 가을 낙엽이 지듯 조직에서 사라져 간다는 뜻에서 아포프토시스라고 부르고 있다. 세포가 일정한 수순에 의하여 죽도록 유도하는 신호체계 또는 유전자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거론되었고, 일부 그 존재가 확인되어 세포사망유전자군으로 총칭되고 있다. 생체세포 내에는 이와 같이 세포가 죽을 수밖에 없는, 또는 죽도록 유도하는 고유의 프로그램이 있다. 세포는 살아가기 위한 정보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죽기 위하여서도 예정된 길을 택하여야만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세포가 죽는 방법으로 예정사외에 환경적 요인에 의한 괴사(壞死, necrosis)가 있다. 열,방사능,화학물질,독 등에 의하여 세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세포죽음의 한 방법이다. 세포의 예정사와 괴사 간에는 그 죽음의 패턴에 있어 큰 차이가 있다. 괴사는 환경적 요인에 의하여 세포의 막이 파괴되고 세포내 물질들이 밖으로 노출되어 주위에 염증을 초래하는 소동을 피우면서 세포가 죽어간다. 그러나 예정사의 세포들은 세포내 물질들이 과립형태로 묶여지고, 세포막이 온전하게 유지되면서 내용물의 유출을 방지한 채 이웃 탐식세포들에 의하여 차례로 처리되기 때문에 염증도 일으키지 않으며, 매우 조용한 죽음의 길을 간다.
 
 따라서 예정사가 진행되고 있는 조직의 경우, 세포들의 죽음이 거의 인식되지 않은 채 아주 자연스러운 양상으로 발전하여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장엄한 생명의 하모니를 창출한다. 이러한 세포 죽음의 질서를 통하여 조직과 기관이 온전한 기능과 형태를 갖추게 되고 삶과 죽음이라는 모순적 목적을 조화하여 궁극적으로 생명이라는 대명제를 완성한다. 이와 같이 생명체는 구성을 이루는 단위세포의 죽음을 통하여 조직과 개체의 삶이 온전하게 영위된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세포의 죽음은 염증을 초래하고 전신반응을 일으켜서 개체에 위험을 경고하고 다양한 생리현상을 유발하며, 때로 개체를 죽음으로 이끈다. 세포의 세계는 충격과 급격한 변화를 매우 싫어하고 온전하고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하는 보수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포의 죽음에서 우리는 생명질서의 논리를 새삼 배우며, 인간세상의 질서도 이러한 세포의 질서에서 비롯되었음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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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개체로서의 생명은 심장이나 폐, 또는 뇌의 기능이 정지되었을 때, 비록 다른 조직의 세포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하여도 죽음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개체의 죽음은 특정한 사고가 아닌 한 단숨에 닥쳐 드는 것이 아니다. 여러 과정과 단계를 거쳐서 서서히 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생명이란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라는 철학적 명제에 부합된다. 모든 조직의 기본적 변화가 늙어 가는 과정을 통하여 초래되고 결국 어떤 역치(域値)를 넘었을 때 삶과 죽음의 갈래로 나뉘게 된다. 물론 사고에 의한 어이없는 죽음도 있으나, 죽음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의 안타깝도록 끈질긴 삶의 이어짐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역치와 범주에 대한 학문적 의문을 가져 본다.
 
 그러나 개체의 죽음에서 문제되는 것은 사실적 판단, 즉 형태의 변화, 세포 기능의 저하가 지속되어 초래되는 생리현상의 정지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가치적 판단이다. 개체의 죽음은 유기체로서의 균형과 질서가 흐트러짐으로써 자신에 초래되는 고통과 사회와의 단절이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죽는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죽음의 과정에 닥쳐오는 아픔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으로서 이승의 생활을 떠나야만 하는 그래서 친지 친척들과의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알지 못하는 새로운 차원의 낯선 세계로 떠나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죽게 되면 어떠한 부귀영화도 한 줌 흙이 되어 버리는 냉혹한 현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도 떨어질 수밖에 없는 헤어짐의 서러움은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승을 하직하고 육체는 사별하더라도 우리의 영혼이 어딘가 깃들어갈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랴(未知生, 焉知死)는 공자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수천년간 죽음으로 새롭게 다가올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한 미련을 결코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자연과학적인 사실적 표현을 하면 죽은 육체는 썩어 분해되어 흙이 되어 버리는 단순한 과정이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의 뒤안에 생명이 이어져 갈 수 있는 보다 다른 어떤 차원의 세계가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생명과학 특히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의 어려움이 비롯된다. 바로 눈앞의 분명한 과학적 근거에 의한 논리적 현실을 때때로 무시하고 오히려 다른 차원의 세계에 의지하려는 행태들이 출몰하는 계기가 되고 그로 인하여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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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생(還生)의 꿈
 
 일반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개체의 죽음을 뜻한다. 죽으면 모든 현재의 상황으로부터의 단절이 초래된다. 그 중에서도 죽음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이 가장 큰 고통일 것이다.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나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에서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그리운 사람과의 재회를 위하여 환생하기를 간절히 희구한다. 더더욱 근자에 발견되는 수많은 이집트와 남미, 티베트의 미이라 들을 보면서 영원한 삶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욕구를 본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행위는 이제는 논리적으로 모순임을 우리는 분명하게 깨닫고 있다. 우리의 육체는 이미 부패되었으며, 부패된 육신이 원상으로 회복 된다는 것은 적어도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개념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환생의 꿈은 따라서 육신의 환생이라기보다는 혼의 환생, 뜻의 환생일 수밖에 없다. 바로 뜻이 손상되지 않고 환생하여 영구한 삶을 갖기 위하여 그래서 옛부터 처연한 죽음을 당당하게 스스로 선택하여 왔지 않았을까? 낙화암의 궁녀가 그러하였고, 계백장군이나 정몽주의 죽음이 그러하였다. 대쪽같이 곧고, 쪽빛보다 푸르며 강낭콩보다 붉은 지조의 뜻은 그러한 죽음을 통하여 오히려 환생하고 영원함을 획득한다. 국가와 사회조직이 어떤 원칙에 의하여 면면히 이어져 가는 것,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쳐 준 학문이 승계되는 것, 문화가 이어져 가는 것, 예술이 발전하는 것들이 모두 윗대 선인의 혼이 후대에 이어져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다. 죽으면 부패되어 결국 흙이 되어버릴 육체 자체에 대한 집착은 의학적으로 의미가 전연 없는, 종결에 대한 거부의 몸부림일 뿐 이다. 이러한 죽음의 의미는 개체를 구성하는 세포의 죽음의 법칙에 이미 배태되어 있었다. 세포에서도 개체에서도 전체의 발전을 위한 죽음은 보다 큰 전체를 위한, 보다 큰 차원의 발전을 위한 영원한 뜻의 구현일 때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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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다시 한번
 
 죽음에도 질서가 있고 법칙이 있다. 세포들의 죽음에서 죽는다는 것이 단순하지 않음을 본다. 생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에게는 죽어야 할 장소와 시간이 정하여져 있으며, 이러한 질서가 깨뜨려지면 기형이 형성되고 여러 가지 질환이 초래됨을 배웠다. 갑작스런 충격에 의한 세포의 죽음은 염증을 초래하고 생리현상을 변조하는 것을 보면서 생명현상의 중요한 질서로서 죽음의 법칙을 본다. 그러나 개체의 죽음에서는 사실적 판단보다는 가치적 판단이 우리를 휘어잡고 있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시행착오가 있는 것을 본다. 삶에의 미련, 이승에 대한 연연함에서 죽음이 갖는 의미가 다르게 부각된다. 죽음에 대한 염세주의 철학자 니체가 한 최후의 유언을 들을 때 새삼 삶의 의미를 되새긴다. “Aber noch einmal (그러나 그래도 다시 한번)!”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모순덩이라고 생각하였더라도 니체는 다시 한 번 더 살고 싶은 욕망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 표출하였다. 바로 이러한 삶에 대한 욕구가 바로 인간 본연의 바람이지 않을까. 죽음의 형태가 무엇이든, 목적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현세에 보다 더 오래 남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인간의 당연한 자세이다. 주어진 생명은 일회성이며 그대로 되풀이 되는 법이 없다. 따라서 생명을 수호하고 번식하는 것은 그 생명을 부여 받은 개체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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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포기하지 말자.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조금씩이라도 고쳐가자. 니체가 “이미 벌써 그러나 결코(Schon und noch nicht)”라고 언급하였을 때 그는 아무리 혐오적인 삶이라도 당당하게 버티고 견디어 내는 것이 실존임을 가르치고 있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생명에 대한 심한 경시적 풍조를 보면서 가슴 아플 때가 많다. 생의 가치는 어느 것과 바꿀 수도 없고 담보해서도 안되며 양보할 수도 없는 고귀한 것이다. 의학을 전공하려는 후배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 환자를 치료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단 1초라도 연장을 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바로 그것이 의사로서의 의무임을 백번이고 강조한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였다 하여도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환자가 결국 병으로 죽게 되면,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자신의 정성을 보다 더 다하지 못하였음을 항상 후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보지 못한 사람은 삶의 거룩함과 가치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갈등은 의사만이 겪는 것은 아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孝)의 개념도 그리고 친지와 연인의 우애도 결국은 나와 남의 삶을 지키고 죽음을 막기 위한 최선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박상철 전남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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