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의 품에 살포시 안기다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의 수련일기 6/조계산 밑에서 귀인을 만나다


 유월 어느 날이었다. 위빠사나 지도법사인 목우 스님과 도반 일행이 1박2일의 주말명상을 간 곳은 광주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순천의 모처였다. 웅대한 천년 고찰 조계총림 송광사(승보종찰)가 유서 깊게 자리한 조계산 자락의 한 자그마한 산골마을에 도반 일행이 당도한 것은 토요일의 늦은 오후였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4년쯤에나 지어졌을 법한 구한옥이 단정하다. 일자형 다섯 칸 겹집 한옥이면 제법 그럴듯한 규모다. 사내의 견문으론 대체로 이 지역 산골마을의 내력이란 뻔하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입산투쟁과 정부군 토벌작전 사이에 끼어 희생된 민간인들의 억울한 사연들이 풀릴 길 없이 잠들어 있는데다, 이와 더불어 고립무원 지경에 있던 산골지역 마을들 대부분이 정부 토벌군의 명령으로 소개되었다. 삶의 터전을 강제로 떠나 방랑의 세월을 견뎌내야 했던 민중들의 비애와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조계산 1.jpg » 조계산  
 인근에 있는 사내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구한옥의 상량 목에 기록된 해가 하나같이 1954년도로 씌어있다. 물끄러미 누워서 천정을 바라볼 때마다 눈에 들어온 상량의 해 1954년도는, 사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섬뜩한 숫자의 내력을 보여준다.
 반듯하게 들어앉은 한옥의 마당엔 가지런하게 잘린 잔디가 푸릇한 느낌을 더해준다. 앞뜰과 뒤란이 잘 갖추어졌다. 우리 한옥의 미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한다. 아마 이 마을에선 제법 잘사는 축에 속했을 것이다. 

송광사.jpg » 송광사
 대문을 들어설 때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상의 헌헌장부 한 사람이 뜨락을 서성이고 있었다. 빈집으로 알고 수행 차 들어온 일행으로선 낯선 이와의 조우가 달갑지만은 않다. 고요한 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16국사를 배출한 승보종찰 송광사와 청정한 전통사찰 도량의 한맛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선암사를 산의 좌우에 두고 있는 조계산의 선맥(禪脈)이, 산 밑의 빈집이라고 흐르지 말라는 법은 없을 터. 사내는 이치의 행색과 얼굴빛에 순간 눈을 맞추어 본다. 나보단 한참 어리겠는 걸.
 
 알 듯 말 듯한 인사를 나누고 나자 일행은 소기의 명상수행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잰걸음에 들어갔다. 그날 저녁과 다음날 새벽 시간 동안의 앉은 시간 내내, 빠듯하고 밀도 깊은 위빠사나의 여정을 치열하면서도 유유하게 즐기기 시작했다.
 
 마을 안이라곤 하지만 외따로 떨어져 한갓진 시골집엔 뒤란의 대숲에서 불어오는 초여름의 소식들조차 한가롭다. 살갗을 스치는 미풍이 살갑다. 살랑살랑 이마를 건드리는 바람은 누구의 손길이련가.
 대숲에서 우짖는 새들의 노랫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두런두런 오랜 옛이야기를 듣는 듯 귓바퀴가 간지럽다. 저 소리들은 무엇일까. 잃어버린 소식들을 전하는 하늘의 메신저라도 되는 걸까. 재잘대는 소리에 이근이 정화되는 듯 귓속이 다 청정해진다.
 
 벌써 초여름이다. 일행은 여름손님을 대비하여 각기 모기장을 하나씩 뒤집어쓴다. 드문드문 인적을 반긴 모기들이 윙윙 사이렌을 켜고 달려든다. 자슥들, 사이렌을 울리고 달려드니 더 무섭고만.
 툇마루에 앉아 새벽을 깨치는 도반들의 모습도 제각각이다. 등허리는 반듯하나 목이 약간 자라목처럼 삐죽이 나온 자세가 인상적인 이 양반은 앉은 자세엔 이력이 난 신선생이다. 일찍이 요가와 명상 수행을 접하고서 그길로 아예 대학원 사회체육과를 진학했고, 그 방면의 논문까지 일직선으로 써내려간 싸나이다.
 
 앉은 자세가 부드러우면서도 확고부동한 분은 법사인 목우 스님이다. 앉은 표정이 가히 선경에 든 이의 그것처럼 평화롭다. 이분은 가끔 앉은 자세 그대로 잘도 존다. 고개를 끄덕하고 조는 듯하나 흔들리지도 않는다. 역시 강호엔 허명이 없다. 수십 년 간의 내공이 닦인 고수답다.
 중학생 시절에 벌써 요가를 배웠다는 빈목은 결가부좌로 꽉 차게 앉은 태깔이 흠잡을 데 없이 단정하다. 훤칠한 이마에 반사되어진 전등불빛마저 이치의 잘생긴 인상을 도드라지게 한다. 다소 차가운 인상조차 금강석과 같은 지혜의 칼날을 방불케 하니, 세간의 번뇌가 잠입할 일말의 틈이 없어 보인다.

결과부좌.jpg » 부처의 결가부좌 
 이경은 주부로서 자원상담가로서 만학의 꿈을 키워온 늦깎이 학동답게 야심 또한 만만찮은 동료이다. 그네의 표정에선 목표의식 같은 게 읽혀진다. 이번 생에 반드시 어떤 수행의 과보를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결의가 앙다문 입술 사이로 반짝인다.
 문옥은 문어처럼 유연한 몸매를 가졌다. 눈에서 발하는 안광은 타심통도 불사할 태세다. 요가 지도자로서 발군의 실력을 갖추었다. 이 양반은 진정한 요기가 되는 일이라면 몸 사리지 않는 투지가 빛난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이들 여성 수행자들의 자태에선 범접할 수 없는 용맹정진의 기백이 넘쳐난다.
 
 사내는 새벽의 청신한 공기가 좋았다. 들고나는 숨소리마저 적막하게 될 즈음엔 숲속에서 들리던 새소리와 풀벌레소리조차 의식 저편으로 사라지고 없다. 코끝의 한 지점을 관찰함이 지긋하게 쌓이게 되고, 호흡이 그 지점을 들고나며 부딪쳐 일어나는 감각의 세미한 흐름을 따라 알아차림도 더욱 밀밀해진다.
 처음엔 호흡의 결이 뚜렷하게 의식된다. 집중과 관찰이 밀밀관관(密密觀觀)하게 되어감에 따라 호흡도 더욱 가늘고 길고 부드럽게 된다.
 
 조대한 감각에서 정미한 감각으로 알아차려진 감각의 크기가 점점 작아진다. 그러다가도 알아차림의 의식은 수시로 그 대상을 잃고 헤맨다. 길을 잃은 틈으로 온갖 상념의 스펙트럼이 끼어든다. 그 색깔도 현란하다.
 주시의 빛을 정비하여 호흡과 감각과 마음의 틈새를 점검한다. 성성(惺惺)한 관찰의 흐름을 회복하니 적적(寂寂)한 평온의 한맛이 느껴진다. 이 한맛이려니, 하고 순간적으로 집착의 염이 일어난다. 집착이 일어나는 순간, 다시 평온의 경계는 사라진다.
 본래 없던 것을 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것, 무언가 얻으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명상이다.
 무상(無常)한 일이로다. 참으로 덧없는 인생이로다. 사내는 속으로 한숨을 크게 내쉰다.
 이 한순간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명상 2.jpg
  명상이란 지금 깨어있는 이 순간을 통해서 영원으로 들어서는 문과 같은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나’의 본래면목을 일별하는 것, 그리하여 그 우주적 존재인 ‘참나’의 품에 살며시 안기는 것, ‘참나’의 거울 속에 나를 비춰 보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명상이란 깨어있음이다. 깨어있음으로 나의 존재 상태를 알아차리는 그것이다.
 인생이란 꿈속 같다는 것, 꿈속의 꿈속 같다는 것, 꿈속의 꿈속의 꿈속 같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는 것이다. 비몽사몽 같은 인생이다. 어떠한 복도 깨달음의 복보다 더 좋을 순 없다

500.jpg » 무등산 계곡에서 명상하는 민웅기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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