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마디를 따라 칼날 같은 통찰이 스쳐간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너무 쉬우면 반드시 어렵게 되나니/좌우분각 左右分脚  

 

고탐마高探馬의 마지막 자세에서 허리가 왼쪽으로 돌면서 왼발이 왼쪽 사이 방향으로 반보 앞으로 나가고, 오른손이 왼쪽으로 돌아 들어오면서 왼손 끝이 이에 조응해 찔러 들어간다. 계속해서 오른 무릎이 굽혀져 왼쪽 다리와 합을 이루고, 오른 무릎위에 십자수로 모아진 두 손이 들려올라간다. 양손이 부채꼴 모양으로 좌우로 펼쳐지면서 오른 발이 들려올라가 펴진다. 이것이 우분각分脚이다.

좌분각分脚은 우분각에서 허리가 왼쪽으로 돌아 내려오면서 왼손이 허리춤으로 감아져 나와 오른손 아래로 찔러 들어가고, 이어서 다시 왼 무릎이 굽혀져 오른발과 합하고 허리가 들려 올라가면서 몸을 세워 왼발을 차듯이 들어 올리는데 역시 우분각처럼 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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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각分脚은 발을 벌려 들어 올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체의 안정되고 튼튼한 힘의 뒷받침이 기본적으로 필요한데다, 단전에 중심을 잡아서 그 안정됨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고 발을 들어 올려야 하니 초보자들이 매우 힘들어 하는 식이다. 특히 하체의 골반과 고관절이 잘 풀려있지 않은 중노년들이 분각이나 등각을 잘하기는 쉽지 않다.

원만한 분각과 등각수련을 위해서는 반드시 수련 중 일정시간을 할애해서 지속적으로 다리벌리기 연습과 들어올리기 연습을 함으로써, 하체의 힘을 기르고 유연성을 얻는다. 그리고 허벅지의 힘과 균형을 개발해야 한다.

좌우분각은 얼핏 보면 싸울 때 발을 들어 차는 동작이다. 물론 무술적 용도로 쓰일 때는 발차기의 동작으로 쓰였던 게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이나 도둑 등이 끊이지 않았던 중국에서는 무술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리고 자기방어를 위한 방편으로서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무술이나 싸움을 능기로 하는 시대가 아니다.

양생을 위한 수련을 위해서는 수련자의 의식이 파괴하거나 살상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된다. 분각을 할 때도 찬다는 의식을 갖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무위태극선법은 생명을 살리는 양생법이지 생명을 상해하는 무술법으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무술은 자기방어를 위한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살상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무술적 수련으로 몸을 단련시키다 보면 몸에 살상의 기운이 배게 되는데, 이렇게 길러진 살상의 기운은 양생의 기운으로 쓰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기의 주인은 의식이고, 어떤 상태의 의식으로 수련하는가에 따라 기수련 시 형성되는 기의 성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생명을 기르는 양생의 뜻은 예나 지금이나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의 기운을 품부 받아 생겨난 생명은 모두 다 차별 없이 고귀하다. 태극권은 원래 도교수련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살리고 기르는 선도철학과 사상을 존숭한다.

선도전통의 핵심 사상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내단. 이원국 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참조). 중인귀생重人貴生의 인생관, 형신합일形神合一의 생명관,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 체계, 역수반원逆修返原의 선도 이론이 그것이다.

 

첫째가 중인귀생重人貴生의 인생관으로 사람을 중시하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상이니, 그래서 도교 수련의 역사는 양생의 역사라 말해지기도 한다. 물론 인간의 생명을 중시한다고는 하나 어느 생명치고 존귀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중인귀생重人貴生이 이를 잘 드러내준다고 할 것이다.

태극권은 원래 도교 무당산武堂山의 장삼풍張三豊 진인이 만들어 후대에 유전되어 왔고, 지금도 무당산의 모든 도관과 수련인들은 장삼풍 진인을 조사祖師로 모시고 그의 도맥을 계승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태극권을 비롯한 형의권, 팔괘장 등의 내가권內家拳은 무당산의 무당꿍푸로 전인들과 수련자들의 맥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태극권 안에는 본시 도가의 핵심적인 중인귀생의 양생관을 잘 담고 있다.

 

둘째는 형신합일形神合一인데, 우리 몸()과 마음()을 하나의 통일(合一)체로 여기는 사상을 말한다. 갈홍은 [포박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릇 유는 무로 말미암아서 생기고, 형체는 정신을 기다려서 세워진다. 유는 무의 집이고, 형체는 정신의 집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제방에 비유하면 제방이 무너지면 물을 가두지 못하는 것과 같고, 촛불에 비유하자면 초가 다 타면 촛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형체가 피곤하면 정신이 흩어지고, 가 고갈되면 생명이 고갈된다.”

또한 당의 오균이 [형신가고론形神可固論]에서 논술한 내용을 보면, ‘사람은 신체내의 정기신精氣神에 의존해 살고 있으며, 이 신체는 곧 도를 담는 그릇(道之器)’이라고 생각했다.

무릇 사람이 태어남은 일기一氣를 나누어 받아 몸이 된다. 이는 마치 한 국가를 부여 받은 모습과 같으니, 가 있으면 보존하고 신이 있으면 거기에 머무른 다음에야 편안할 수 있다. 몸은 도를 담는 그릇이니, 이것을 알고 수련하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어째서 사람들은 신을 얻고서도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를 얻고서도 그것을 모으지 못하며, 을 얻고서도 그것을 되돌리지 못하는가?”

 

셋째는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수련체계이다. 도교 양생가들이 제시한 성명쌍수 사상은 형신통일의 생명관 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은 심성心性을 가리키고 진신眞神 등으로도 불리어진다. 그리고 명은 대개 생명, 형체를 가리키고, 또 원정原精, 원기原氣 등으로도 불리어진다. 그러므로 심신을 수련하는 것이 성이 되고, 정기를 수련하는 것이 명이 된다. 원의 구처기는 이렇게 말한다.

금단의 비밀은 하나의 성과 하나의 명에 있을 따름이다. 성은 하늘이니 항상 정수리에 숨어있고, 명은 땅이니 항상 배꼽에 숨어있다. 정수리는 성의 뿌리이고, 배꼽은 명의 꼭지이다. 하나의 뿌리와 하나의 꼭지는 천지의 근원이고 시작이다.”

원의 이도순은 [성명론性命論]을 저술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은 선천의 지극한 신으로 일령一靈을 말한다. 은 선천의 지극한 정으로 일기一氣를 말한다. 성의 조화는 마음에 달려있고, 명의 조화는 몸에 달려있다. 견해와 지식은 심에서 나오는데, 사고하고 생각하는 것은 심이 성을 부리는 것이다. 움직이고 응답하는 것은 몸에서 나오는데, 말하고 침묵하고 보고 듣는 작용은 몸이 명을 얽어매는 것이다. 명에 몸이 얽어맴이 있으면 삶과 죽음이 있고, 성이 마음의 부림을 받으면 오고 감이 있다. 이로써 몸과 마음은 정과 신의 거처이고, 정과 신은 곧 성명性命의 근본임을 알 수 있다. 성은 명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명은 성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니,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이치는 하나이다.”

 

넷째, 역수반원逆修返原의 선도이론이다. 도교 내단학에서는 인간의 몸은 작은 우주라는 관점에서 인체를 본다. [음부경陰符經]에서는 우주가 손 안에 있고, 모든 조화가 내 몸에 나타난다.”고 설했다. 인체를 소우주로 보고, 인체는 우주 대천지와 그 본체가 같고 운행법칙이 같으며 생성과정이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순행順行이란 바로 노자의 도는 일을 낳고, 일은 이를 낳으며, 이는 삼을 낳고, 삼은 만물을 낳는다.”(42)는 설을 따라 태어남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기공양생가들은 노자의 근원으로 돌아가 명을 회복한다(歸根復命, 16)”는 설에 근거하여, 내단內丹의 도는 바로 만물이 순행하는 도를 거꾸로 되돌리는데 있다고 생각하고, 이의 수련학설을 매우 정치하게 개발하고 발전시켜왔다. 만물을 합하여 ()’이 되게 하고, ‘을 다시 변화시켜 ()’이 되게 하며, ‘을 다시 하나()’로 복귀시키고, ‘하나를 도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역행이론에 또 하나의 설이 있다. 송원 내단가들은 북송사람인 진단의 <무극도無極圖>로부터 무극태극- 음양오행- 만물화생의 우주론으로 수련 원리를 해석하고, <무극도>를 거꾸로 역행하여 수련함으로써 만물- 음양오행- 태극- 무극에 이르는 원리를 개발하였다. 역수반원의 수련체계가 대개 이러하다.

 

태극선은 도교 무당산의 살아있는 전통이고, 그 안에 선도 수련의 오랜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태극선은 그 전통 안에서 무술이고, 양생술이며, 마음수련이다. 전통사회에서는 무술적 가치도 결코 적지 않았을 터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무술은 공연을 하거나 격투기 대회에 나가지 않는 한 별로 쓸 데가 없다. 물론 자기연마라든지 신체단련의 목적으로 하기도 하나, 전통사회에서의 쓸모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다.

태극선은 움직이는 기공氣功, 동공動功이다. 기공으로부터 나오는 효용이 때로는 무술로, 때로는 양생으로 쓰이게 되는 것이다. 더 높은 수준의 수련의 목표, 즉 양생과 마음수련을 도외시한 채, 무술위주의 전통만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기예技藝란 곁가지로서 보기에 좋을 뿐이다. 기예지말로 삼지 말기를 바라는 장삼풍 도인의 마음을 그의 태극권론 서문에서 읽을 수 있다.

원래의 주석에 이르기를 이는 무당산 장삼풍 조사의 유론으로 천하호걸들의 장수를 원해서 마든 것이니 단지 기예지말 만으로 삼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原註云, 此係武當山張三豊祖師遺論, 欲天下豪傑延年益壽, 不徒作技藝之末也, 장삼풍태극권론)”

 

분각分脚의 초식을 행함에 있어 하체의 단련은 관건이 된다. 하체란 하단전을 단의 중심점으로 하고, 신장을 오장의 중심으로 삼아서, 골반과 허벅지 안팎, 그리고 과(사타구니 근육)와 무릎관절, 종아리, 발목 등을 총칭해서 말하는 것으로, 인체생리적 기능의 중심을 담당한다. 우리 인체는 하체를 중심으로 생명력(원기)을 보존하고 키운다. 그러므로 하체가 튼튼하고 건강하면 장수한다.”는 말은 그런 뜻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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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전통의학은 인체의 생명력의 중심적 장기를 신장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신장을 을 간직하고 키우는 창고라 여긴다. 신장은 음을 주관하는 장기이지만, 그 음 속에 진양眞陽을 간직하고 키운다. 그러므로 양의 장기로서 그 안에 음을 간직한 심장과 대조적이다. 이 심장의 양기()와 신장의 음기()가 서로 교제하여 우리 몸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수련에서는 이 원리를 이용한다. 이를 심신상교心腎相交, 수화교제水火交際, 수승화강水乘火降이라 한다.

 

태극선의 하체 단련효과는 바로 이러한 원리에 기반하여 하체 생명의 중심장기인 신장의 공능을 증대함으로써 을 키우고 강화하는데 주력한다. 신장의 장기를 주관하는 기의 센터는 하단전이므로, 기수련에서는 하단전을 위주로 수련하여 내기를 배양하고 축적한다. 뿐만 아니라 태극선의 모든 식과 세는 하단전을 위주로 기를 운행하고 쌓도록 되어 있는데, 그원리가 담겨있는 구결이 바로 미려정중尾閭正中(무릎을 낮게 굽히고 미려를 살짝 아랫배로 빨아들여 과(사타구니 근육 사이)가 열리게 하는 자세)와 송침직수松沉直竪(척추가 곧게 내리뻗은 자세) 등이다. 이러한 모든 동작과 운용법이 하체와 연관되어 일관되게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고 쇠약해지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징후가 허리의 통증이다. 중노년이 되면 신장의 기능이 저하되고 정이 약해지면서, 그 영향으로 허리가 힘을 잘 쓰지 못하게 된다. 특히 남자들이 그렇다. 사우나에 가서 유심히 살펴보면 나이가 든 사람들의 경우, 배는 나오고 하체는 부실한데, 이것이 바로 그 증거이다. 하체가 약하면 인체의 생리적 기능이 떨어지고 그 징후는 남성에게서는 정력이 약화되는 것으로, 그리고 여성에게서는 아랫배가 냉하고 소화가 잘되지 않으며 열이 위로 치받는 상기증상 등으로 주로 나타나게 된다. “하체의 생명력을 강화해주는 양생법으로 태극선을 따라갈 만한 것이 없다.”는 양생가의 말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

 

태극선은 원리적으로 보면 하체에 에너지가 축적되고, 이 에너지가 전신에 배급되면서 온몸에 기가 충만하게 되고, 동시에 에너지의 순환이 원활하게 됨으로써, 막힘없는 기혈통창이 이루어지게 한다. 이러한 양생효과 때문에 오늘날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인들이 좋아하고 그 수련인구도 날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태극선의 동작 가운데 초보자에게는 가장 힘든 동작중의 하나가 분각分脚이지만, 가장 멋있고 화려한 동작도 분각이다. 분각이 낮은 자세로부터 솟아 올라와 양쪽으로 넓게 펼쳐지면, 흡사 한 마리의 공작새가 두 날개를 활짝 펴고서 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것 같다.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기운이 합해져서 만들어진 물상중의 가장 아름다운 물상이다. 한 떨기 넝쿨장미 숲 같다. 비온 뒤 무지개 뜨는 것 같다. 외딴 섬을 잇는 가교 같고, 새벽 장닭의 힘찬 울음소리 같다. 어여쁜 발레리나 들어 올린 다리 같다.

 

부드러움 속에서 나온 강함을 엿보는 듯하다. 강한 대지 위에서 피어오른 아지랑이 같다. 보드라운 게의 속살 같다. 만고풍상 겪으면서도 지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내는 칠전팔기의 인간승리를 보는 것 같다. 젊은 날 고생은 사서 하는 그런 사람 같다. 바람을 등에 업고 달리는 사람 같다.

 

세상의 크고 작은 일에 부딪쳐서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노자가 말했다.

 

함이 없음을 함으로 삼고,

일이 없음을 일로 삼고,

맛이 없음을 맛으로 삼는다.

큰 것은 작은 것에서 나오고,

많은 것은 적은 것에서 생긴다.

원한을 덕으로 갚는다.

어려운 일을 도모할 때는 쉬울 때부터 하고,

큰 것을 도모할 때는 미세할 때부터 하라!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일도

반드시 쉬운 데서부터 만들어지며,

세상에 아무리 큰 일도

반드시 미세한 데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끝내 일을 크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큰 일을 이루어간다.

무릇 가볍게 응낙하는 것은 믿음이 적게 되고,

너무 쉽게 보면 반드시 큰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오히려 모든 일을 어렵게 여긴다.

그러기에 마침내 어려움이 없게 된다.

 

爲無爲, 위무위

事無事, 사무사

味無味, 미무미

大小多少, 대소다소

報怨以德, 보원이덕

圖難於其易, 도난어기이

爲大於其細, 위대어기세

天下難事, 천하난사

必作於易, 필작어이

天下大事, 천하대사

必作於細, 필작어세

是以聖人終不爲大, 시이성인종불위대

故能成其大, 고능성기대

夫輕諾必寡信, 부경락필과신

多易必多難, 다이필다난

是以聖人猶難之, 시이성인유난지

故終無難矣 고종무난이 (63)

 

노자는 오늘날을 사는 힘든 이들에게 세 마디의 조언을 한다. “행할 때는 무위로 하고(爲無爲)”, “일할 때는 무사로 하고(事無事)”, “세상을 맛볼 때는 무미로 맛보라(味無味)”.

 

무위無爲도 무지無知를 읽을 때처럼 해야 한다. 이때 함이 없음(無爲)’()’의 주체인 가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는다. ‘가 사라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앞에서 도의 쓰임새가 덕으로 나타난다고 읽었다. 달리 말하면 도의 행함이 바로 덕이고 그것은 자연自然의 법을 따른다고 했다.(道法自然, 25)

따라서 도의 덕을 간직한 인간의 도리도 자연의 법을 따르게 되어 있다. 인간의 행함이 자연의 법에 따를 수 있으려면 그 행위의 주체인 사가 자연의 법 안에 녹아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 인간이 행하나 그 행위의 주체인 사사로움이 사라지면서 자연의 빛이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함이 없는 함(無爲)’이란 ()’에서 가 사라진 경지를 말하는 뜻으로 읽는다.

 

노자는 행함이 문제가 되는 것은 행함의 주체가 사사로이행하기 때문이라고 본 것 같다. 사사로이 행하기 때문에 그 행위가 자연의 법에 부합하지 못하고, 도에서 어긋나게 된다고 본 것이리라. 위정자는 사사로이 행하기 때문에 권력을 남용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정치적 행위를 일삼는다. 관리들은 사사로이 행함으로써 백성들을 억압하고 수탈하며, 가진 자들은 사사로이 행함으로 자기가 점유하고 이용하고 있는 재산이나 자원이 자기 개인의 독점적 소유물이나 되는 냥 자자손손 지배하고자 하고, 그리고 사람들은 역시 사사로이 행함으로 그 목적에 집착하고 그 행위에 집착하며 그 결과에 집착하여, 그 집착으로 비롯된 고통으로 삶이 얼룩지게 되니, 그 행함이 자연의 도에 부합하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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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자연의 법에 맞도록 행한다는 것은 어떻게 행함을 말하는가? 자연의 법에 부합한다는 말은 행하는 자가 사심 없이 행함을 의미하는 말로 읽는다. 사심私心없이 행한다는 말은 무심無心으로 행한다는 말과 같은데, 사심 없이 무심으로 행하므로 자연의 도에 합당하게 되는 이치를 담고 있음이다. 자연의 도는 우리 안에 덕이라는 것으로 내재해 있음이니, 그것을 본성本性이라, ‘불성佛性이라, ‘참나(眞我)’라 한다. 따라서 행함이 무심에 바탕 하면 행위의 사사로움이 제거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연의 도에 부합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노자의 함이 없는 함(爲無爲)’은 길 가는 이의 자연스런 삶의 준칙이 된다.

일을 하되 무사로 하라(事無事)’도 같은 이법으로 이해된다. ()이란 무엇이던가? 일이란 원래 모든 존재들의 생존과 자기실현을 위한 존재 방식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일은 존재방식에서 소유적 가치나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바뀐지 오래다. 본디 일이란 다만 소풍 나온 이가 놀다가는 놀 거리요, 장난감이요, 먹을 만큼 먹게 해주고 살 만큼 살게 해주는 생업수단이면 족할 것이다. 현실의 일()은 그렇지 않다. 더 넉넉하고 더 여유롭고 더 풍족하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손 대대로 그 소유를 대물림하고 더 높은 이름을 남기고 더 많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끝없이 추구하는 그런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이란 도가 일하듯이 그래서 덕을 베풀듯이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일을 일삼아서 하게 되니 일에 치인다. 일을 욕망의 눈덩이 법칙에 끌려가듯이 하게 되니 일에 치인다. 일이 사람을 지배하고, 일이 사람을 잡고, 일이 사람을 소외시키게 된다. 휴일을 맞아 조금만 한가하여 일에서 놓여나게 되면, 오히려 일 걱정 때문에 놀지도 못한다. ‘일 중독증에 걸려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무사로 일하라(事無事)’일하되 일삼지 말아라는 말과 같다. 일하되, 그 안에 오로지 존재하라는 말과 같다. 일을 욕망충족의 수단으로 삼아 더 많은 일을 만들거나, 극한의 소유욕을 달성하기 위해 일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위정자에게는 백성들을 그런 일의 노예로 만들지 말도록 경고하는 말의 뜻으로도 읽힌다. 사업가나 경제인들에게는 그들 사업장에서 일하는 직원들과 노동자들로 하여금 무사로 일하도록도와주고(事無事),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도 일삼아서 일하지 않게 되도록(事無事)’ 권고하는 뜻으로도 읽힌다.

 

무미로써 맛보라(味無味)’는 말도 마찬가지의 논리로 이해된다. 맛이란 무엇이던가? 밥맛 나다, 할 맛 나다, 살 맛 나다의 그 이다. 음식에도 맛이 있지만, 사람에도 맛이 있고, 일에도 맛이 있으니, 인생을 사는 데도 참맛이라는 게 있다. 이렇게 맛은 중요하고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한 요소가 된다. 그런데 노자가 문제 삼고 있는 맛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지나치게 추구하는 감각의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다.

감각이란 인간이 접촉함으로써 대상을 인식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감각은 그 물질적인 것, 그 보여지는 것, 그 들리는 것, 그 맛나는 것 이상을 알 수는 없다. 감각에 의존하고, 감각에 탐닉하고, 감각에 집착하면 할수록, 그 감각은 본래 공하기 때문에 허망하다. 즐거운 감각이 사라짐도 고통이요, 괴로운 감각에 노출되어도 고통이다. 그러므로 맛을 극도로 추구하고 탐닉하고 집착하는 것은 참된 앎으로 인도하지도 않고, 참된 행복으로 안내하는 것도 아니므로, 그 맛을 끊고 무미로써 맛보라(味無味)” 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은 머리가 있고(事有君), 말은 종지가 있는 것(言有宗)처럼 하늘 아래 모든 것은 서로서로 기대어 섞여 있으니 그 머리와 꼬리, 그 크고 작음과 많고 적음, 덕과 원한, 어려움과 쉬움, 큰 일과 세밀한 일, 무거움과 가벼움을 각각 별개의 분리되고 고정되어 상호 무관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큰 일은 작은 것에서부터 미리 알아 도모하고, 어려운 일은 쉬울 때 처리하라. 세상사 큰 일도 본래 작은 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이러한 이치를 알면 큰 일도 없고 작은 일도 없게 된다. 성인은 이와 같이 큰일도 크다고 여기지 않으므로 어려움 없이 큰일을 이루어간다. 다만 원한 사지 않도록 하되, 혹 원한이 있거든 복수의 논리로 하지 말고, 덕으로써 갚아야 된다.”라고 우리를 향해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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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양생주]에 소 잡는 백정 이야기가 있다.

소 잡는 명인 포정이 문혜군을 위해 소를 잡은 일이 있다. 그때 손을 놀리고 어깨를 기울이고 발로 밟고 무릎을 기울이는 동작에 따라 휙휙 울리는 뼈 발라내는 소리, 칼로 가르는 소리가 모두 절도에 맞았다. 포정의 몸놀림은 상림桑林에 합치되고 칼을 움직이는 경수經首의 리듬에도 들어맞았다.

이를 본 문혜군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소 잡는 기술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포정이 칼을 놓고 대답했다.

 

제가 즐기는 바는 도입니다. 도를 소 잡는데 응용했을 따름입니다. 처음 제가 소를 잡을 때는 보이는 것은 소밖에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가 온전한 모습 그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소를 마음으로 만나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눈의 감각기능을 멈추고 마음의 눈에 따라 손을 놀립니다. 철리에 따라 큰 틈새를 열어 제치고 빈 곳을 쳐나갑니다. 소가 생긴 대로 칼을 움직이므로 저의 칼날은 뼈와 살이 연결된 곳을 다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물며 큰 뼈가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다! 재주 있는 소잡이가 해마다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소잡이가 다달이 칼을 교체하는 것은 뼈를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저의 칼은 지난 19년 동안 줄곧 사용했고 소 수천 마리를 잡았어도 칼날이 지금 막 새로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소의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은 두께가 없을 정도로 날카롭습니다. 두께 없는 칼로 벌어져 있는 뼈마디 사이에 삽입하므로 공간이 널찍해서 칼날을 놀리기에 충분합니다. 따라서 19년이나 사용했어도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듯합니다.

하지만 칼날이 근육과 골반이 연결된 곳에 이를 때마다 어려움을 절감합니다. 저는 근심하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서 눈길을 고정시키고 손놀림을 천천히 하면서 칼날을 매우 세심하게 움직입니다. 어느 결에 뼈와 살이 확연하게 갈라져 흡사 흙덩이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친 뒤에는 사방을 둘러보고 만족한 기분으로 흔쾌히 칼을 잘 닦아 둡니다.“

 

훌륭하구나. 내가 양생의 이치를 얻었도다.”

 

장자의 이 글을 읽고 한때 알 수 없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적이 있다. ‘양생의 도에 대해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소 잡는 포정의 칼은 우리 마음의 통찰을 비유한 것일 게다. 우리 마음이 깨어있어 통찰이 칼날처럼 예리하고 그 예리함으로 우리 몸의 구석구석을 여과 없이 관통해 나간다. 처음엔 육체를 본다. 보여지고 감각되어지는 대상으로서의 육체를 본다. 그러나 그것으로 족하지 않는다. 양생의 도가 더해져감에 따라 감각의 세밀한 길을 따라 오장육부를 들여다보고 해체해 나간다. 오장육부뿐만이겠는가, 몸의 각 기관들과 부위들과 뼈 마디마디를 따라 칼날 같은 예리한 통찰이 스쳐간다. 그리고 뼈 속까지 들어가서 뼈 속도 해부한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감각의 길도 내려놓고 마음의 길을 따라 무심하게 전신을 관찰하고 해부해나간다. 마음의 길을 따라 전신을 차례로 훑어서 보다가 아예 통째로 들여다본다. 보는 이도 보여지는 대상도 없어지고 머무름만 존재하는 듯하다.

 

처음엔 거친 감각이 나타나고, 관찰이 진행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몸속 어느 구석 어딘가에 크고 작은 걸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마음이 점점 더 적막해지고 동시에 더 성성해짐에 따라 호흡은 느리고 그윽하다가 이윽고 있는 듯 없는 듯하게 되는데, 이때의 감각은 더욱 미세한 데에 이른다. 미세한 감각의 흐름을 타고 더 들어가 보니 거울에 엷은 빛이 반사되어 비추는 것만 같다.

 

일미一味만 남는다

 

민웅가(<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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