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고독과 정면으로 한판 붙는것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 수련일지 20/티끌 속 우주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많은 것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모든 것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네.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온 우주가 머금었고,
 일체의 티끌 속도 역시 마찬가지네.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무량한 시간이 곧 한 생각이고,
 한 생각이 곧 무량한 시간이네.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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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이 깨달음의 게송으로 읊은 법성게의 일구 일구가 나의 마음속을 화안하게 비추고 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천사들의 사랑의 노래 소리처럼, 아지랑이 하늘거리는 봄날, 나풀나풀  돌고 도는 선녀의 어여쁜 춤사위처럼, 젊은 유학생 의상의 깨달음의 노래는 온 산하를 적시는 빗물이 되고, 산과 들판의 나무와 꽃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한줄기 보드라운 미풍이 되어, 종남산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나의 갈급한 영혼에 해갈의 단비를 적셔주고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다가 나는 이 티끌 속의 우주를 본다. 잡초를 뽑아내다가 나는 그 잡초 속의 꽃들을 본다.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에 깃든 나무의 꿈, 지금 나는 그 꿈을 본다.
 한 그루의 나무속에 감추인 숲의 신묘한 비밀을 엿보는 나의 마음에 하늘 꽃이 한 송이 피어든다.
 
 유학생 의상이 겪었을 온갖 고초와 번뇌, 그로부터 피어난 깨달음의 꽃조차, 종남산에 철따라 피어나는 꽃과 나무들, 그곳을 무시로 출입하는 동물들과 그곳에 서식하는 식물들, 그들을 떠받치는 티끌들, 그곳을 흐르는 시냇물, 그곳을 통과하며 스미는 바람들, 쏟아지는 햇살, 은은한 달빛, 별빛 찬란한 밤들, 그 하늘의 은하수의 물결 속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배어들어(相入) 서로가 되었다(相卽). 너는 내게로 와서 나의 꽃이 되고, 나는 너에게로 가서 너의 꽃이 되었다. 나비가 꽃에게로 가서 꽃이 되었고, 꽃은 나비를 보듬어 나비가 되었다.

나비 꽃.jpg
 
 만물은 모두 서로가 서로를 인연으로 해서 존재한다. ‘너’ 없이 ‘나’가 없고, ‘나’ 없이 ‘너’가 없다. 꽃 없이 나비 없고, 나비 없이 꽃이 없나니, 티끌 속에 우주가 깃들어 있고, 그 티끌의 존재로만 우주를 말할 수 있도다.
 
 나의 날숨이 저 나무의 들숨이 되고, 저 나무의 날숨이 나의 들숨이 된다. 저 나무 위에 앉아 놀고 있는 새가 나무와 둘이 아니듯, 내 속의 박테리아 미생물들이 나와 둘이 아니듯, 내가 마시는 한 모금의 생수가 저 하늘 위의 구름과 둘이 아니듯, 저 하늘 위의 구름이 망망대해의 푸른 물결과 둘이 아니듯.
 
 쏘크라테스의 지혜가 지금 우리의 지혜와 둘이 아니듯, 노자와 장자의 도가 하이데거와 소로우와 간디의 지혜와 둘이 아니듯, 지금 우리는 둘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갈마들어가는 ‘相卽相入(상즉상입)’의 진실은 내 속의 우주의 진실일 뿐 아니라, 우주 속의 나의 진실이다.
 
 하나의 작은 티끌 속에 담긴 우주여, 그 우주 속에 안긴 낱낱의 생명들이여. 아름답구나, 티끌 속의 우주가!
 
 그러므로 지금 나의 마음을 스치는 ‘한 생각(一念)’ 속에는 ‘영원(무량)’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 ‘영원(無量)’의 시간 속에 ‘한 생각(一念)’도 배제할 수 없다.
 
 화엄의 인연생기(緣起)릏 명상하는 시간 내내, 줄곧 나의 마음을 비추는 또 하나의 생각머리가 있었다. 위대한 스승 노자의 말씀이다.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
 하늘 그물은 너르고 너르다. 듬성듬성하나 놓침이 없구나.
 
 그래서 장자는 그렇게 말했다.
 “도는 없는 곳이 없다. 저 돌 가운데도 있고, 저 풀섶에도 있고, 시내와 강물에도 있다. 강아지에게도 도가 있고, 패랭이꽃에도 도가 있고, 중생에게도 도가 있다. 오줌똥에도 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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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jpg
 
 "아기는 누구나 태어날 때는 손가락을 단단히 쥐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을 때는 모두 손을 펴고 있습니다. 사람은 태어난 후로는 평생 잡으려고만 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잡을 수 없습니다. 원숭이가 옥수수를 훔치는 광경입니다. 왼손으로 하나를 따서는 오른 쪽 겨드랑이에 끼우고, 다시 오른 손으로 하나를 따서는 왼쪽 겨드랑이에 끼웁니다. 이렇게 두 손으로 쉴 새 없이 따서 겨드랑이에 끼우지만 옥수수는 계속 떨어집니다. 결국 원숭이가 옥수수 밭을 나갈 때는 하나밖에 손에 쥐고 있지 못합니다. 혹시 사람에게 쫓기기라도 하면 그 하나마저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귀빈천에 상관없이 모두 이렇게 잡았다가 다시 놓고 마지막에 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알몸으로 왔다가 알몸으로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남회근 선생의 말씀 중에서)
 
 연길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가는 일행은 즈나, 성페이, 아이,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다. 시안에서 베이징까지 1박2일, 그리고 다시 베이징에서 연길까지 1박2일 걸린다. 합이 2박3일이다.
 침대칸으로 고급지게 자리를 잡고 차창 가를 응시하고 있다. 중국 대륙의 광활함은 막상 경험해보지 않고는 실감이 잘 안 난다. 그것도 열차 여행을 통해서라야 진짜 맛이다,
 
 너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진다. 11월의 끝자락에 선 들판은 바야흐로 곡식 거둬간 휑한 공간에 빈 가슴만 쓸쓸히 남아있는 성싶다. 옥수수 알곡이 잘리어나간 자리엔 껍질들만 어지러이 흩어져있다.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버렸다. 명년 봄에는 다시 그 씨앗들이 뿌려질 것이다. 다시 싹이 나고 자라서 꽃을 피운다. 꽃을 버리니, 열매를 맺는다. 다시 열매를 버리니 빈 들판, 빈 가슴으로 돌아간다. 어머니인 대지는 모든 것을 낳고 자라게 한다. 모든 것을 낳고 모든 것을 거둔다. 결코 소유하지 않는다. 차창 밖 서녘 하늘에 비낀 노을이 황홀하다.
 
 황홀한 들녘을 돌아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달리던 열차는 가뿐 호흡을 내뱉는다. 긴 기적소리를 내지르다가도, 드문드문 외딴 정거장들에 멈추어서 사람들을 푼다. 열차를 기다리던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올라탄다. 다시 이들을 싣고 달린다. 정거장의 개수만큼 타고 달리고 내린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들에 관한 다 못한 이야기들이 가을 하늘을 수놓는다. 유랑자의 홀연한 심사를 다독이는 듯 한 무리의 잠자리 떼가 하늘을 덮는다. 인생이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것, 새삼 바람의 뜻마저 새기고 있다.
 
 유랑 길엔 반가운 일들도 많다. 물색이 다른 이들과 잠깐 잠깐 알은 채를 한다.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저 동베이에 볼일 있어 가요. 한국 사람이고요. 어색한 안부를 묻는 일도 여행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들의 고향을 묻고, 나의 신상을 적당히 털어내며, 얼굴색이 다르면 다른 대로, 호불호에 대한 취향이 같으면 같은 만큼,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맞장구를 치고 너스레를 떤다.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사람 사는 맛이 이런 것일 게다. 이때쯤 꼭 언어가 말썽을 일으킨다. 그런 것도 초장의 심사엔 약간 걸림돌이 되나, 그냥 용기를 내어 눈치껏 그리고 요령껏 대응하면 문제가 없다. 언제어디서나 무소불통인 바디랭귀지에, 서투른 중국말 섞어 적당히 요란을 떨다보면, 제때의 정거장 하차도 아쉬운 게 인지상정이다.        
 
 정들만하면 떠나는 게 여행길이다. 동굴 속의 생활이 적응이 되는 가 싶더니 산상의 토굴로 옮기고, 토굴에 맘 두고 정이 드는 가 싶으니, 다시 시내로 소환을 당한다. 농촌 마을 한가운데 자리한 암자도 지낼 만하니까, 그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한다. 수행길이란 본래 그런 것인가, 재미를 붙일 성싶으면 그만두고 내려오라고 한다. 이유가 따로 없는 게 인생길인가?
 이번 길은 싸부의 일정 탓이다. 제자는 싸부가 가는 곳을 그저 따른다. 다른 이유가 없다. 무엇 때문에 정들만하면 자꾸 떠나고 떠나느냐고 물어볼 데가 없다. 그냥 때가 되도 떠나고, 때가 되지 않아도 떠난다. 인생이란 그렇게 버리고 떠나는 것이라고들 한다.
 
 달리는 열차 칸에서 차창을 스치는 바람 소식에 솔깃하다가, 난 라오스가 들려주는 ‘쥐고 와서 펴고 가다’의 단상에 마음이 머무른다.
 그너메 원숭이들, 대가리가 원 참, 하다가도,....., 원숭이들이 보기엔 원숭이만도 못한 인간들이 더 기가 막히겠다, 한다.
 죽는 순간까지 놓지 못하고 꽉 쥐고만 있는 게 우리네 인간들이니 말이다. ‘나’라고 하는 것, 나의 ‘소유’라고 하는 것이 그토록 나를 붙들고 있는 게 아닌가. 평생 이 ‘나’에 대한 집착과 그 ‘나’의 집착물로서의 ‘소유’를 붙들고서 이만하면 됐을까, 아니야 아직,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 만다.
 저승사자를 기다리게 할 온갖 이유를 대본들 통하기나 하겠는가. 사자의 입장에서도 기가 찰 일이다. 조금 더 시간을 내어준들, 도대체 어쩌겠다고? 이러니 원숭이들이 웃지.    
 
 기차는 시간이 되면 떠난다. 기적소리를 드높이며 늘 머물렀던 자리를 박차고 떠난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다만 떠난다. 인생이란 열차 칸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잃을까?
 
 난생 처음 베이징에 당도했다. 연길로 가기 위해선 반대편의 역에서 갈아타야 한다. 6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이 있다. 중국 도반들은 늘 나의 음식 취향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준다. 점심식사로 ‘베이징카오야(북경오리구이)’를 선택했다. 사천의 민물고기 매운탕과 서안의 양고기 샤브샤브엔 어느 정도 입맛이 물렸다. 소문으로만 듣던 북경오리구이 맛의 진수를 이제 확인할 차례다.
 듣던 대로 ‘베이징카오야’는 내 입맛에 딱 맞다. 입에 살살 녹아들었다. 이 음식점이 정통한 곳인지는 모른다. 음식취향엔 욕심이 한도 없을 테니, 이쯤해서 만족이다. 그런 다음엔 난 늘 북경 여행자들에게 ‘베이징카오야’를 강추 하곤 했다.
 
 역전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눈여겨본다.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한심들하게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이게 바로 ‘만만디’(느린 습관)였다. 만만디, 그러니까 슬로우 라이프(slow life)다. 요즈음 중국의 거리에서 이 만만디의 습성이 그대로 남아있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동거지에선 ‘만만디’가 그들을 특징지우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택시나 자동차들의 행태로만 보면 중국도 이미 ‘만만디’가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이란, 딱하게도 인간들로부터 ‘만만디’의 여유를 빼앗아버린다.
 
 수행길에선 늘 느릿함을 즐긴다. 바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 느릿함의 한가운데 서야 고독에 마주할 수 있다. 수행이란 단지 ‘고독’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의 참된 의미를 깨치기 위해서, 그 고독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그 고독과 정면으로 맞닥뜨린다. [
 중용]은 그것을 ‘愼獨(신독)’이라 했다. 신독, 즉 ‘홀로 삼감’의 경지에서만 참 자유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조금만 외로워도 그 고독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다. 고독으로부터 탈출해서 음악을 듣거나, 밭일을 하거나, 친구들을 불러 바비큐 파티를 하거나 한다.
 홀로 있어도 홀로 있지 못함은 진정, 고독이 아니다. 고독은 밖의 소음을 차단하고 내면의 고요함으로 침잠해 들어갈 절호의 기회이다. 고독을 마주하고, 고독이라는 통로를 통과해 나아감으로써만, 심연에 감추어진 참나를 만나게 된다.
 
 고독을 거부하는 이는 ‘참나’를 조우할 기회조차 얻을 수가 없다. 그리고 ‘참나’를 발견하고 조우하는 일만큼 우리 인생에서 근원적인 일도 없다. 그런 까닭에 수행의 여정은 ‘홀로 삼감’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을 우선시한다.
 
 여행길에서 고독을 만나고, 고독을 친구 삼으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 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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