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나?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 수련일기 8/소치는 사람

 

이 아침, 초기불교 경전인 <수타니파타>를 꺼내든 사내의 마음속엔, 몇 해 전 인근의 춘향의 숲 가운데 단출하게 정좌한 아름답고 평화로운 절 개천사에서, 주지 스님과 도반들이 함께 독송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해 초여름부터 겨울까지 사내를 비롯한 도반 일행들은 몇 달 동안을 별빛 반짝이는 숲속의 절간에서 보냈었다. 매주 한 번씩 법당의 마룻바닥에서 예불을 하고, 그곳 법당의 부처님 앞에서 태극권을 수련했다. 수련이 끝나면 차방에서 스님이 내어주는 향그러운 차를 마시며 태극과 무극의 세계를 내어다보는 이론공부에 공을 들였다. 뿐만 아니라, 매주 한날을 잡아 도반들과 어울려 저녁공양을 지어먹고, 주지 스님과 <수타니파타>를 공부했다.
 
 자신의 태자리를 찾아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들처럼, 마음의 본향을 찾아  도시를 빠져나온 사람들의 유유한 발길들이 숲으로 숲으로 향해왔을 것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중국수련의 여정으로부터 돌아와, 이제 갓 입세간의 초년생의 마음으로 신선한 출발을 시도하던 때였다. 
 
 귀에 익숙한 낯익은 경구들조차 그 시간엔 참신했다. <수타니파타>엔 방랑자로서의 붓다의 가르침들이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느낌 그대로 잘 기록되어 있어, 오히려 더 인간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종교적 도그마의 껍질을 뒤집어쓰지 않은 날것의 그대로의 언어, 언어 너머의 인간의 모습들이 소박하고 여과 없이 설해진 경전의 구절구절들이, 오늘따라 비 그친 계곡의 물살을 타고 날아든 청량한 바람의 소식처럼 사내의 가슴을 씻기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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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이미 밥도 지었고 우유도 짜 놓았습니다. 마히 강변에서 처자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내 움막 지붕에는 이엉을 덮어 놓았고, 집 안에는 불을 지펴 놓았습니다. 그러니 신이시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성내지 않고 끈질긴 미혹도 벗어버렸다. 마히 강변에서 하룻밤을 쉬리라. 내 움막에는 아무것도 걸쳐놓지 않았고, 탐욕의 불은 남김없이 꺼버렸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모기나 쇠파리도 없고, 소들은 들판의 우거진 풀을 뜯어먹으며, 비가 와도 견뎌 낼 것입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내 뗏목은 이미 잘 만들어져 있다. 욕망의 거센 흐름에도 끄떡없이 건너 벌써 피안에 이르렀으니, 이제는 뗏목이 소용없노라.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내 아내는 착하고 허영심이 없습니다. 오래 함께 살아도 항상 내 마음에 흡족합니다. 그녀에게 그 어떤 나쁜 점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내 마음은 내게 순종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있다. 오랜 수양으로 잘 다스려졌다. 내게는 그 어떤 나쁜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는 놀지 않고 내 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모두 다 건강합니다. 그들에게 그 어떤 나쁜 점이 있다는 말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스승은 대답하셨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속해있지 않다. 스스로 얻은 것으로 온 세상을 거니노라. 남에게 소속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소 치는 다니야가 말했다.
 “나에게는 갓 태어난 송아지도 있고, 젖을 먹는 어린 소도 있습니다. 새끼 밴 어미소도 있고, 암내 내는 암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암소의 짝인 황소도 있습니다. 그러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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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악마 파피만이 말했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기뻐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사람들은 집착으로 기쁨을 삼는다. 그러니 집착이 없는 사람은 기뻐할 것도 없으리라.”
 
 스승은 대답하셨다.
 “자녀가 있는 이는 자녀로 인해 근심하고, 소를 가진 이는 소 때문에 걱정한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은 마침내 근심이 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사람은 근심할 것도 없다.”
 
 스승의 말씀이 길을 떠나는 사내의 등 뒤에 긴 여운을 드리운 듯, 공항의 출국장 대합실엔 석양의 지는 햇빛도 찬란하였다.   
 길을 떠난다는 것, 길닦음의 여정을 출발한다는 것, 그것은 지금부터 내게 무엇인가. 내가 버릴 것은 무엇이고, 내가 얻을 것은 또 무엇인가.
 
 백설이 눈부신 히말라야 설산의 정상을 탐방하는 등정자의 그것처럼, 수도자의 의식은 지금 드높은 창공을 향해 비상을 시도하고 있었다. 저 하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거기 아무것도 없어도 좋았다. 삶이란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이라지만, 나고 죽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므로. 삶이란 다만 길을 걷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므로.
 설산의 광휘를 우러러 다가가보다가도, 그 광휘란 단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안내하는 지팡이요, 안심처에 불과할 것이므로.
 
 산정(山頂)을 오르려는 자여, 그리고 그 길을 힘겹게 오르는 자여,
 그대 지치고 힘들 때, 목전의 곤고한 일상이 감당해 나가기 버거울 땐,
 한번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떠 보시구려.
 길가에 핀 들꽃 한 송이, 당신의 쌓인 피로 단박에 씻어줄 묘약이 될 줄 또 모른다오.
 
 구만리 길을 올랐다 내리면 또 다른 세계에 떨어질 것이다.
 오르는 길과 내리는 길을 굽이치고 굽이치다 보면, 삶이란 그렇듯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일지도 모른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을 찾는 길과 피안에서 차안으로 복귀해 들어오는 길의 여정이 정녕 둘이 아닌 것, 그것이 오늘 길 떠난 이의 ‘말머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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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歸何處(일귀하처)?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인가?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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