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막] 2005년 정동영과 반기문의 평화체제 논쟁 사건내막

 

D&D Focus 2010년 1월호


한반도 운명을 건 평화체제 논쟁,

반기문과 정동영의 대혈투!


스티븐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12월 8일~10일 평양 방문을 전후하여 ‘한반도 평화체제’를 문제를 둘러싼 비상한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 북한이 미국과의 ‘적대관계 청산’을 강력히 제기하는 가운데 한반도에서 정전체제를 대체할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향후 한반도 안보지형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진행되어 온 것인가? 본지는 당시 정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이와 관련된 숨은 비화를 발굴․추적하여 보도한다.


 


라이스 국무장관의 깜짝 발언


정동영과 반기문.

한 명은 집권 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였으며, 또 한 사람은 ‘세계 대통령’이라는 유엔 사무총장이다. 한국정치의 거물 중인 거물인 두 사람은 참여정부에서 통일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으로 같은 시기에 근무했다. 이 두 사람의 숙명적 관계는 그동안 세간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2005년부터 이 두 사람은 한반도 운명을 건 대혈전을 벌였다. 남북한과 주변국이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에 대한 찬성과 반대 입장으로 갈리면서 각기 이 문제에 대한 진보와 보수 입장을 대변하는 대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드라마의 시작은 2005년 3월에 시작되었다.

2005년 3월 20일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한 일성으로 “북한이 주권국가인 것은 사실이며 6자회담에서 북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은 불과 한 달 여 전에 북한에 대해 “폭정의 전초기지”라며 “지구촌에서 추방되어야 할 정권”이라고 말한 그녀의 이 돌연한 발언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과 기대가 뒤섞인 논평을 내 놓았다.

그러나 이날 청와대를 방문한 라이스는 노 대통령에게 더욱더 놀라운 말을 했다.

“이전에 반기문 장관께도 말씀드렸지만 미국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관심이 있다. 향후 한반도에서 정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다자간 논의를 시작할 용의가 있다.”

노 대통령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저 여자는 얼마 전과 180° 다른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지?“

두 시간에 걸친 회담 동안 노 대통령은 앞의 한 시간 동안 독도문제를 장시간 거론했다. 라이스의 발언은 약 한 시간에 걸쳐 강한 톤으로 독도 문제를 거론하는 노 대통령의 말이 마무리된 직후에 나왔다. 노 대통령은 라이스의 이 돌연한 발언에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뜻밖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라이스가 돌아 간 직후 참모들에게 말했다.

“아까 라이스가 말한 평화체제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반 장관에게 뭘 말했다는 건가?”

이에 반기문 장관이 머뭇거리다가 답변했다.

“사실은 얼마 전에 미국에서 제가 라이스 장관을 만났는데 그 때 한 말입니다.”

노 대통령이 놀라서 물었다.

“그러면 아까 한 말하고 같은 말을 들었다는 거요?”

“예, 그렇습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노 대통령이 언성을 높였다.

“아 그런데 왜 지금까지 그 사실을 당신 혼자만 알고 있어?”

라이스의 말 한마디에 청와대와 NSC, 그리고 외교안보부처들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이 날 라이스 장관이 2005년 초에 반 장관을 만나 “CSCE(유럽안보협력회의)과 같은 안보공동체 구상을 동아시아에서도 적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라이스의 ‘평화체제’ 발언은 개인 반기문에게 한 말이 아니라 대한미국 정부에 한 말이다. 그러나 반 장관은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관리하다가 노 대통령에게 혼쭐이 났다.

라이스의 평화체제 발언의 의미는 6개월 후인 9월에 라이스 국무장관의 측근인 필립 젤리코(Philip D. Zelikow) 자문관이 작성한 보고서를 통해 더욱더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북한 핵 문제와 평화협정 체결을 동시에 논의하는 것”이 다. 당시 나온 용어가 ‘광범위하고 새로운 대북 접근법’이었는데, 이제껏 미국의 네오콘이 선호한 강압적인 방식의 대북정책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실주의적 접근이 아닐 수 없었다.

라이스의 발언은 한반도 평화체제 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고 동북아 다자안보체제까지 염두에 둔 포괄적인 구상이고, 이것은 일찍부터 미국이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보면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공존번영의 질서를 지향하는 ‘동북아 균형자론’과 라이스 장관의 구상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고, 김정일의 ‘통 큰 접근’과도 맞아떨어지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안이었다.

그러나 반기문 장관의 생각은 달랐다. 전통적으로 외교부는 만일 평화협정이 체결된다면 그것은 남북한 사이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지 북한의 주장처럼 미국과 북한 간에 체결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유엔사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북한의 기만전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 간의 평화협정 문제를 검토해 볼 수도 있겠으나 이마저도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으며, 6자회담에서도 논의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2005년 초에 라이스가 평화체제를 거론했을 때 반 장관의 답변은 이러했다.

“북한의 기만전술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반 장관은 라이스 장관의 청와대 방문이 있고 나서도 평화체제 논의에 대한 자신의 부정적인 견해를 거두지 않았다. 다음은 「세계일보」 8월 22일자 기사다.

“북 핵 해법 조율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반기문 장관은 8월 20일에 ‘한반도 평화협정 문제는 북핵 6자회담이 마무리되는 상황을 봐가며 풀어가는 게 순리’라고 강조하면서 ‘선 6자회담, 후 평화협정’ 방침을 분명히 했다. 반 장관은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과 평화체제 구축문제는 6자회담에서 논의할 성격이 아니라면서 ‘관련 당사국들이 6자회담과는 별도로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포럼을 통해 이 문제를 논의하자는 의견이 한미와 북한 간에 교환됐다’고 설명했다. 반 장관은 ‘미국은 모든 북 핵을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한국은 북측의 평화적 핵 이용권에 대해 다소 문을 열어 놓은 것처럼 비치고 있다’면서 ‘그러나 북한의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이 폐기돼야 한다는 게 한미 간 공통된 입장인 만큼 전혀 이견이 없다’고 강조했다.”

라이스의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구상을 명확하게 거부하는 논조다.



정동영 VS 반기문의 갈등


이 보도가 있고나서 당시 NSC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정 장관은 외교부가 주장하는 ‘남북 평화협정론’은 냉전의 유물이며 오래된 고정관념이라고 보았다. 남북미 3자 협정이든, 남북미중 4자 협정이든 형식에 구애받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단지 북한의 기만전술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비정상적인 불안정한 정전상태를 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었다.

반 장관이 워싱턴에서 돌아 온 직후 정 장관 주재로 고위급 외교안보전략회의가 열렸다. 정 장관이 반 장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거 미국에서 한 말이 뭡니까? 왜 평화체제를 반대하는 말을 했습니까?”

그러자 반 장관이 발언의 이유를 설명했다.

“평화체제는 안 됩니다. 한반도에 다자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한다는 것은 유엔사령부와 주한미군의 존립근거를 허물어뜨리는 북한의 기만전술입니다. 게다가 핵 문제를 처리하는 6자회담의 본질과도 무관하고....”

길게 들을 것도 없이 정 장관이 책상을 치면서 거의 반말로 말했다.

“아니 지금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그 따위 생각을 갖고 말이지, 외교부 장관이 말이지. 그런 냉전적인 시각으로 외교를 하니까 제대로 될 리가 있나?”

정 장관은 자신이 6월 17일에 김정일을 만나 한반도 정전체제를 영구적인 평화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말을 전달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논의를 하겠다고 공개적인 발언을 해왔다. 그런데 반 장관이 전혀 엉뚱한 말을 하고 다니는데 대해 격분했던 것이다.

반 장관 얼굴이 시뻘개 졌다.

이후로도 반 장관이 언론에 조금만 이상한 말을 해도 정 장관은 당장 전화를 걸어 다그쳤다.

“아니 외교부는 왜 그래요? 당장 내 방으로 오시오.”

그러면 반 장관은 정부 청사 별관인 외교부로부터 헐레벌떡 쫓아왔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다자가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협정이 국가안보에 부정적이라며 반발했다. 특히 유엔사령부와 주한미군의 지위에 조금이라도 위해를 주는 것이라면 결사반대였다. 진정한 평화는 한미동맹의 표상인 한미연합사령부와 굳건한 안보태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무슨 조약이나 협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게 안보진영의 철통 신조였다.

한편 반 장관의 워싱턴 발언이 있고나서도 통일부와 외교부는 수시로 평화체제 문제에 대한 이견을 표출시켰다. 정부 내에서 이 두 부처는 전혀 손발이 맞지 않았고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 갔다.

평화체제 문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사안이며 우리를 깊은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복잡한 문제다. 주지하다시피 53년 한국전쟁을 종료시킨 휴전협정은 한국이 당사자로서의 지위가 박탈된 채로 미중북 3자 간에 체결되었다. 이를 근거로 북한은 이제껏 한국을 배제한 채 미국과 직접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를 통해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고 안전을 보장해야 핵 문제를 비롯한 안보 현안이 타결된다는 주장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북한은 그 다음 순서로 북한의 안전을 위협하는 유엔사령부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할 것이 확실시되었다. 이는 1996년 4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4자회담을 제안한 이래 북한 측의 일관된 주장이었고, 이로 인해 4자 회담은 정전체제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평화체제에 대해 아무런 합의도 이루지 못한 상황이었다.

한국정부는 한국을 배제한 평화체제는 있을 수 없으며, 앞으로 한반도 평화체제는 주변국이 아니라 남북 간에 체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라이스의 발언 이후 한국정부는 이제껏 남북한이 주체되고 미중이 지원․보장한다는 기존의 2+2 방식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정동영 장관이 정부는 더 이상 평화협정 형식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결정하고 청와대와 이러한 입장을 공유한 것이다. 그러나 외교부는 이에 대해 완강하게 반대하며 집요하게 방해를 했다. 적어도 북한 핵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평화협정 문제를 논의할 수 없다는 주장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


     

베이징 6자회담 장으로 날아 온 정부 훈령


북한은 2005년 7월 22일에 담화를 통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게 되면 핵 문제의 근원인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핵위협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은 비핵화 실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4일 후부터 베이징에서 시작될 제4차 6자회담을 앞두고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평화체제 논의에 들어오라는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2005년 7월 26일부터 베이징에서 개최된 제4차 6자회담에서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는 라이스 장관이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거론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외교부였다. 당시 정동영 장관과 이종석 NSC 차장은 외교부가 정부 입장과 달리 평화체제 논의를 회피하는 술수를 부릴 것을 우려했다. 우리 측 6자회담 대표인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6자회담 대표단에 박선원 안보전략비서관을 포함시켰다. 외교부가 정부 입장을 잘 준수하는지를 감독하도록 하는 일종의 ‘감시병’이다. 이에 대해 박 비서관은 기자에게 다음과 말했다.

“‘감시병’으로 갔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진압군’이 되고 말았다.”

6자 회담 장에서 외교부는 여전히 평화체제 논의에 부정적이었다는 뜻이다. 이를 ‘진압’하느라고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편 9월 19일까지 계속된 6자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정부 훈령이 두 번 회담장으로 날아들었다. 첫 번째 만든 훈령은 NSC가 만들어 노 대통령 재가를 받아 박선원 비서관이 가지고 갔다. 두 번째 훈령이 날아 간 배경은 이러하다.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에 정동영 장관은 긴급히 NSC 사무차장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대표단에게 반드시 ‘평화체제를 논의한다’는 문구를 6자회담 공동선언문에 넣으라고 지시를 했습니까?”

이 차장은 “물론”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정 장관의 이어지는 말.

“외교부를 믿으면 안 됩니다. 분명히 안 넣으려고 할 것입니다. 문서로 아예 문구를 만들어 대통령 훈령으로 다시 보내십시오. 그리고 대통령 지시를 이행 안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6자회담 공동선언문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한다”는 문구가 들어가게 되었다. 공동선언문 제4항에 나와 있는 문구는 다음과 같다.

“직접 당사자들은 한반도에서의 영구 평화체제를 위한 협상을 적절한 별도의 포럼을 통해서 평화협정 체제를 협상하기로 했다.”

이 합의문에 대해 정동영 장관은 그의 회고록 『개성역에서 파리행 기차표를』에서 “감동적”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존 네그로폰데 미 국무부 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9․19 공동성명의 목표는 야심찬 것으로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을 대체할 수 있는 영구적인 평화체제를 협상하기 위한 중요한 의지다.”

이렇듯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일취월장으로 발전하는 시기에도 이를 못마땅해 한 미국의 네오콘은 9․19 공동성명 직후부터 돌연 북한의 위폐 및 마약제조 문제를 들고 나오며 급격히 미북 관계를 악화시키기 시작했다. 북한과의 대량살상무기 전쟁에 위폐문제를 필두로 미 재무부가 ‘참전’하면서 상황은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첨예하게 미국과 북한이 대치하던 상황은 2006년 10월 북한이 핵 실험을 감행하면서 전대미문의 안보위기로 상승되자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아예 꺼낼 상황이 못 되었다. 이 시기 미국의 정책은 강경파는 강경파대로, 온건파는 온건파대로 각기 움직이는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부시 대통령은 시계추처럼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6자회담에서 평화체제에 대한 합의를 한 것에 대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그러나 이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2007년부터 상황은 급격히 평화체제 논의로 다시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2006년 11월에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에 참패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한국전 종료 가능성 및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한 미북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부시 대통령은 먼저 한반도 정전상황을 종결시키는 ‘종전선언’을 남북미 3자가 진행할 수 있음을 밝혔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의 거듭되는 질문에 대해 부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함께 임기 중에 북핵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자, 저 쪽에 김정일 위원장이 앉아 있고 여기에 당신과 내가 앉아서 함께 종전선언을 하면 되지 않느냐.”

당시 30분 정도 예정됐던 라이스 장관의 노 대통령 예방 시간이 1시간 20분으로 늘어날 만큼 회담은 시종 활기를 띠었다.

부시가 하노이로 달려와서 이 말을 하기 이전인 11월 9일은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한 날이고, 보수강경파의 상징인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경질 당한 날이기도 하다. 한편 라이스 국무장관을 정책적으로 보좌하는 젤리코 보좌관이라든지 힐 차관보 본인도 역시 과거에 동유럽, 구소련에 근무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있었던 유럽에서의 이른바 헬싱키 프로세스를 한반도에 적용해서 한반도에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핵 문제를 푸는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한편 한미 외교 실무라인 차원에서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가동되고 있었는데, 이 때 미국 측 대표로 나온 국무부의 동아태담당 수석부차관보가 다름 아닌 현재 주한미국대사인 캐슬린 스티븐스다.

서주석 실장은 2007년 10월에 한 토론회에서 하노이 정상회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당시 부시 대통령이 분명히 언급한 것은 종전조약의 체결이었다. 김정일 위원장과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본인 3자 간에 한국전쟁을 법적으로 종결짓는 종전조약, 평화조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는데 그 부분이 종전선언이라는 아이디어로 변한 부분이 있었다.”



국무부 부장관 발언에 기절한 조선일보


한편 2007년 3월 5일 방한한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은 국내에서 여야 정치권 및 언론인과 미 대사관에서 만나 중요한 언급을 한다. 그 핵심 대목은 이렇다.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를 내년 상반기 중 종료하는 것이 부시 대통령의 확고한 생각이다. 부시 대통령의 이 같은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한·중·일·러 등 관계국들과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해 나갈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시점이 2008년 상반기라고 말한 것은 미 국무부가 ‘2008 회계연도 업무계획 보고서’에서 제시한 북핵 폐기 시한과 일치한다. 이제 한반도 평화체제와 한반도 비핵화는 일란성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 개념이 되었다. 이는 종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기 위한 남과 북, 미국, 중국 4개국 정상회담이 내년 상반기에 열릴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은 3월 11일에 절망적인 어조의 칼럼을 내보낸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2·13 6자회담 합의를 계기로 ‘핵을 가진 북한’의 지위가 부상하면서 한반도 주변의 전통적인 동맹·적대관계가 교차하며 재조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에 있어 북한이 어제의 적대 국가가 아닌 것처럼 한국이 어제의 ‘친구’가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취임 이후 지난 6~7년간 입만 열면 북한을 ‘악의 축’이니 독재국가니 인권탄압의 나라니 하면서 매섭게 공격해오던 부시 미국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보여줬듯이 요즘 북한과 김정일에 입을 다물다시피 하고 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집어던졌을 2·13 합의를 ‘성공적’이라며 칭찬하고 있다. 달라져도 크게 달라졌다. 부시는 더 이상 ‘원칙’의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북한 핵에 사실상 굴복한 셈이다.”

한국전쟁 종전선언(조약)과 평화협정 문제가 급격히 고조되면서 2007년 말의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이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미국과 남북한은 마치 빠징코 게임기의 3개의 숫자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처럼 평화체제에 대해 완벽히 일치된 합의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기류는 2007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의 10․4 선언에 까지 연결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현 정전체제를 종식시키고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했다.”

6자회담 차원에서 주로 거론돼오던 평화체제 논의를 한반도 차원에 접목시킨 이 내용은 `남북관계와 6자회담의 선순환 구조'를 재확인시키는 동시에 평화체제가 앞으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의 최대 이슈가 될 것임을 상징적으로 알린 것으로 평가되었다.

한편 이러한 합의가 나오기까지 평화체제 문제에 대한 주무 부처가 통일부냐, 외교부냐는 논쟁은 양 부처 사이에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당시 외교부에 아프간 인질 구출문제 등 산적한 외교 현안이 많은데 “그런 문제나 잘 처리하라”며 외교부의 개입을 견제했다. 결국 외교부의 외로운 저항은 완전히 ‘진압’된 셈이다.

이렇게 2005년 벽두부터 2007년 말까지 2년여 동안 진행되어 온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는 정권이 교체되면서 현재까지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는 것은 분명하나 최근 미국은 이제까지의 합의사항을 기초로 새로운 평화체제 논의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이러한 평화체제에 대한 합의는 국가 간의 합의사항이기 때문에 이제 와서 돌이키기는 어렵다. 오바마 행정부가 이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는 가운데 이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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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월간 군사전문지 <디펜스21+> 편집장, 한겨레 군사사이트 <디펜스21> 전문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