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영] 한국에선 왜 SF가 번성하지 못했나 벗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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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업가에게 SF를 읽으라고 권유한 이유

 
최근 경영 월간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이하 HBR)가 ‘비즈니스 리더가 공상과학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라는 엘리엇 페퍼(Eliot Peper)의 글을 실었습니다. HBR은 SSCI(Social Science Citation Index)급 학술 저널의 하나이기도 한데요, 경영전략면에서 공상과학소설의 필요성을 강조한 글을 실은 것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페퍼는 공상과학소설 작가입니다. 경제적 불평등을 배경으로 한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큐멀러스>(Cumulus) 외에 다수의 SF 소설을 썼습니다. 페퍼는 추세외삽법에 기반한 미래예측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추세외삽법이란 일종의 트렌드 분석입니다. 이런 방식의 미래예측은 패러다임 전환을 야기하는 기술 변화에 대응할 수 없게 합니다. 그는 공상과학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공상과학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틀을 재구조화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더나아가 기존의 가정, 즉 추세외삽법에 의한 가정이 매우 강건하고 합리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변할 때, 이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점이고, 이로 인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및 애플 등이 SF 작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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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는 2015년 말에, SF 소설집 <Futures Vision>을 출간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마이크로소프트가 SF 작가들을 초대해서,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하고 있는 소프트웨어 등을 견학시키고, SF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킵니다. 그래서 나온 소설이 <Futures Vision>입니다. 참고로 이 소설은 킨들 버전으로 무료로 받아 볼 수 있습니다. 킨들은 일반 PC에서도 설치가 가능한 소프트웨어 버전도 있어, 하드웨어인 킨들이 없이도, 킨들용 책을 PC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SF가 주는 과학적 상상력과 시각의 전환이 유럽과 미국이 현재의 세계 주도권을 확보한 이유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한국의 SF, 공상은 있지만 과학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공상과학의 전통은 어떨까요? 우리나라에선 공상과학이 그렇게 발달하지 못한 듯합니다. 역사적으로는 거의 없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최근 조금씩 성장하고는 있으나 필요한 것에 비하면 참 아쉽지요.
 시각을 세계로 돌려서 보자면, 공상과학소설의 시원은 천문학자인 케플러가 1608년에 쓴 <솜니움(somnium)>입니다. 솜니움은 꿈을 의미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달에서 본 지구를 그리고 있습니다. 과학적 합리주의, 계몽주의는 유럽에서 SF 소설의 붐을 가져왔지요. 허버트 조지 웰스(H.G. Wells), 쥘 베른(Jules Verne) 등이 19세기 말의 영국과 프랑스의 공상과학소설가였지요. 웰스는 미래학자의 출현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베른은 <해저 2만리>의 저자이기도 한데요, 번역가 김석희씨는 쥘 베른을 “영감을 받은 몽상가, 앞으로 인류에게 일어날 일을 오래 전에 미리 ‘보고’ 글로 쓴 예언자”라고 하지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보자면, 한자문화권을 포함해서 서유기전을 공상문학의 기원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현재까지 밝혀진 최초의 한문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인데, 이는 혼령과 만나는 등 공상소설입니다. 최초의 한글소설은 16세기 초의 <설공찬전>입니다. 당시 신분사회에 대한 비판이 그 이면에 있습니다. 설공찬전은 서유기전이나 금오신화와 같이 공상소설이지 과학소설은 아닙니다. <홍길동전>도 신분사회에 대한 불만과 개혁이 담긴 공상소설입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포함해서 보면 과학이 소설의 소재로 등장한 경우를 필자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과학이 발전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세종대에 이순지라는 분은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주장했는데요, 이는 달에 비친 그림자가 둥글다는 것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이순지 선생은 서양의 코페르니쿠스 보다 반세기 정도 앞선 분입니다. 정약용 선생께서 수원 화성을 건축하기 위해 무거운 것을 나르기 위한 거중기를 설계했지요.
 대학에 격물치지(格物致知)가 나오는데,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서 지식에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 선생께서 어류도감의 일종인 자산어보를 지었지요. 정약용 선생께서는 자식에게 학문하는 자세를 가르치면서, 닭을 기르면 닭을 관찰하고 이에 대한 글을 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당시 선비들이 인문학적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에 대한 소양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65년도에 이정문 화백이 서기 2000년도를 상상한 그림을 제시하기는 했습니다. 이정문 화백은 원격진료(eHealth), 전기자동차, 전자신문, 태양열 주택, 휴대용 TV, 인터넷 교육, 민간 우주 여행, 움직이는 도로, 컴퓨터 일상화, 인터넷으로 레시피 공유 등을 전망했는데요. 시기의 선후는 있지만 거의 정확한 예측이었지요. 그러나 이는 서구의 미래예측을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면 지나친 것일까요?
 

aa.jpg » 이정문 화백이 1965년에 그린 2000년대 생활상.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6040103101
 
 우리나라에서 공상과학의 문화가 척박한 이유는 자유로움의 부재, 발칙함에 대한 금도(襟度)가 부족하였기 때문이지 않은가 싶습니다. 세계 최초의 인쇄 신문인 ‘조보(朝報)’가 조선의 선조에 의해 중단되었다는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면, 우리나라에 공상과학소설이 유행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지금도 발칙하고 엉뚱하며 터무니 없는 상상력을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의 분위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일본으로 눈을 돌려서 보면, 그들의 미래에 대한 시각이 보다 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세기 무렵의 일본의 한 잡지는 일본의 기대수명이 늘어나게 되어, 게이샤도 나이가 들어서 서비스를 한다는 미래예측을 싣기도 했습니다.(배일한, 2017).
 포스트 휴먼으로 인한 디스토피아를 그린 ‘은하철도 999’, 뇌-컴퓨터 인터페이스와 포스트 휴먼을 그린 ‘공각 기동대’, 로봇에 대한 상상력을 펼친 ‘철완 아톰’ 등을 보면 일본의 공상과학 문화의 풍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윤기영, Futurist, FnS Consulting 대표
synsaje@gmail.com
 


곽노필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nop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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