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영] 불확실성 증가가 미래학을 부른다 벗님글방

yes-1183407_960_720.jpg » 픽사베이

 

계량적 학문의 아름다움과 강력함

 

계량적 접근은 아름답고, 정밀합니다. 과학의 제1요건인 재현 가능성을 높입니다. 그래서 경제학, 사회과학 및 정책학까지 이 계량적인 접근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과학을 통해 우리는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으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타고라스, 다윈, 아이작 뉴턴,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튜링 등 무수한 과학의 대가들이 인류에게 남긴 유산이 현대의 과학문명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그러나 인간과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에 대해서도 이 과학적 방법론이 무소불위일 수 있을까요? 19세기의 기계론적이고 과학적 세계관은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불가능하다고 헀지요. 1987년에 Paul Hirsch, Stuart Michaels과 Ray Friedman이 사회과학이 실질적 가치를 추가하고 사회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계량적이고 수학적 방법론에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한 것은 필연입니다.

 

지식이 늘어날수록 불확실성도 증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이 늘어날수록 우리가 모르는 것은 더욱 늘어나며, 지식이 증가할수록 불확실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합니다. 즉, 학문의 근본적 목적 중 하나인 미래에 대한 대응기능은 약화됩니다.
프로이트가 주장했던 무의식은 과거에는 전체 의식과 무의식의 합에서 80%를 차지한다고 했지요. 심리학과 뇌 연구를 통해 인간에 대해 더욱 많이 알게된 지금, 그 무의식의 영토는 95%로 확장되었습니다.
천체물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우주와 자연을 더욱 잘 이해할 것이라 믿었지요. 그러나 인류는 우주의 95%가 암흑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알 수 없는 물질이 우주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론물리학은 빅뱅 이전을 궁금해하며, 평행우주론의 가설을 강화시키고, 이 우주가 시뮬레이션일 수도 있다는 증거를 하나 둘씩 찾고 있습니다. 천체물리학을 통해 우리가 아는 것도 늘어났으나, 우리가 모르는 것도 늘어났습니다.
인간의 의식이란 허구일까요? 데카르트가 가장 근원으로 삼았던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인류에게 보편타당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불교의 '이 뭐꼬'라는 화두는 데카르트의 cogito와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뇌과학의 발달은 이 cogito가 뇌의 어디쯤 있는지를 밝혀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의식과 의지가 이제는 해부당하고 분석당하는 객체로 전락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인간의 의식이 양자역학적 현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cogito는 허구에서 실재로 전환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모름도 모르는 영역’과 ‘모르는 것을 아는 영역’
 

인간이 더 많이 알수록 더 많이 모르는 역설은 어디서 일어날까요? 그것은 '알지 못함도 모르는' 무지의 무지의 영역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영역'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의 촛불이 높아질수록, 그 촛불이 닿는 영역도 넓어지지만, 그 너머의 경계선도 넓어지고 확대되는 것입니다.
이 무지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인류가 인식하는 불확실성의 크기는 커질 수밖에 없겠지요. 여기에 더 나아가 지식의 확대는 지식의 역동성을 증가시킵니다. 지식과 지식이 만나서 새로운 지식을 잉태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변화의 역동성이라 합니다. 지식의 기하급수성, 지수적 법칙인 무어의 법칙 등이 이에 해당하지요.
세계화는 복잡성을 증가시킵니다. 접촉면이 많아지기 때문이지요. 지식의 증가도 이 복잡성을 증가시킵니다. 인식의 불균형과 지식의 불균형은 그 경우의 수를 다양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같은 민족 혹은 같은 사회의 구성원이라도 동일한 인식의 틀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상징적으로는 세대차라고 합니다만, 세대 안에서도 무수한 인식과 지식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불확실성을 직시하는 미래연구의 필요성

 

우리는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지식이 늘어났으나, 이로 인해 미래에 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예측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과학이 인간의 무지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변화의 역동성을 증가시키며, 복잡성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과 시점에 불확실성을 직시하는 미래학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과 시점에 기존의 과학적 방법론에 치중하는 일부 학자가 잠시 멈추어 서서 뒤 돌아보고, 앞을 내다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 드리면, 현재의 추세가 지속되는 경우의 미래는 매우 불행하답니다. 온난화, 양극화, A.I.에 대한 소유권 문제, 스마트 로봇과 전쟁 도구, 합성생물학 등으로만 보자면 미래가 밝을 수 없겠지요. 정책학자이면서 미래학자인 Jehezkel Dror의 글을 아래 잠시 인용합니다.

“21세기는 누구에게 그렇게 즐겁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나는 22세기 혹은 그 이후의 시대가 더욱 공정해 질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100년 내외에, 전세계 인구 규모는 일정한 수로 안정화 될 것이다. 손상되었던 환경은 치유될 것이며, 새롭고 더욱 공평한 경제 시스템이 만들어질 것이다. 지구적인 직접 민주주의는 달성될 것이다. 유전공학, 인공지능 및 나노 기술은 우리 지구에 있는 생명체를 변형시킬 것이며, 달과 화성 및 우리 태양계의 행성계에 (그리고 우리 태양계를 넘어서)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리처드 브로티간이 매우 이른 시기에 이해했듯이, 우리 인류와 달 등에 이식된 생태계는 '우아한(loving grace) 기계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나는 21세기를 회피하고, 좀 더 먼 미래로 건너뛰어 바로 가고자 한다. 나와 동행하겠는가?”(Dror, Yehezkel. 1996. Improving Critical Choices. Futures 28(6-7) p.559)

미래연구는 현재의 추세가 지속되는 미래에 대한 대안을 불확실성 속에서 제시하는 것이 본연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미래연구자는 근본적으로 회의적 낙관주의자이어야 합니다. 미래학의 대부인 Jim Dator교수는 그의 글에서 T. S. Elliot의 시를 인용하며, 회의적 낙관주의자인 미래연구자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Only The fool, fixed in his folly, may think
He can turn the wheel on which he turns.
‘자신의 어리석음에 집착하는 바보만이
자신이 올라 탄 차륜을 제가 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

 

453.jpg » 출처 : 배일한, http://it.chosun.com/news/article.html?no=2826240


소위 4차 산업혁명과 미래연구

 

Dror의 21세기 언급은 최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언급과 일치합니다. 세계경제포럼의 Klaus Schwab은 ‘디지털  혁명, 생명과학기술 및 나노 기술’로 인해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할 것으로 예견했지요. 그는 그 용어는 독일의 industrie 4.0에서 유래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 변화 결과는 industrie 4.0 이후를 넘겨보았지요. 그래서 그는 정치, 경제 및 사회의 질적 변화가 도래할 것이나 그 방향은 모른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전망은 공통됩니다.
피터 드러커의 ‘지식기반사회’, 레이 커즈와일의 ‘특이점’, 피터 디아만디스의 ‘Abundance’, MIT 에릭욜프슨 등의 ‘제2 기계시대’, 제레미 리프킨의 ‘제3차 산업혁명’, ‘노동의 종말’, ‘한계 비용 제로 사회’, 폴 메이슨의 ‘후기 자본주의’, 이어령의 ‘후기 정보사회’, 우리나라 NIA의 ‘초연결사회’, ‘지능정보사회’ 등이 그것입니다. 세상의 변화를 냄새 맡고 보는 사람은 하나 둘이 아니라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되는 것입니다.
소위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미래의 변화는 인간에 대한 정의,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와 윤리체계, 사회경제 시스템 등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산업혁명 직후의 미래에 대한 성직자와 귀족 그리고 농노의 불안한 눈매와 우리의 그것은 닮아 있을 것입니다.
소위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근본적 변화를 앞에 두고, 이에 대한 선행적 고민과 대안의 제시가 미래연구자의 역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 근본적 변화에 전통적인 계량적 방법론의 역할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재현 가능성이란 데이터를 전제로 하며, 모든 데이터는 과거 데이터이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 정부과학위원회의 말과 같이 미래는 비워져 있기만 한 것은 아니나, 가능성의 공간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지요.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미래연구자의 다양한 연구를 기대하고, 아울러 정책당국자와 기업의 의사결정권자가 보다 먼 미래를 전망하기를 바랍니다.

 

윤기영(퓨처리스트, FnS컨설팅 대표)
synsaje@gmail.com.

 

 


곽노필 한겨레신문 선임기자 nopil@hani.co.kr
페이스북 페이지 '미래가 궁금해'
트위터 '곽노필의 미래창'
TAG

Leave Comments


profile한겨레신문 선임기자. 미래의 창을 여는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 곳간. 오늘 속에서 미래의 씨앗을 찾고, 선호하는 미래를 생각해봅니다. 광고, 비속어, 욕설 등이 포함된 댓글 등은 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