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달, 기러기아빠의 종착역 뽀뇨육아일기

내 평생에 이런 시간이 올까? 약속된 다섯달이 지났다. 어떻게 이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라는 존재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는 여행을 통해 왠지 성숙해진 느낌이다.

지난 다섯 달의 이야기를 짧게 되돌아 보았다.

1. 나이 마흔의 라이프스타일

혼자 지내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보니 새롭게 눈 뜬 것이 있다.

바로 ‘라이프스타일’이다.

내가 30년 이상 살아오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되돌아보다보니 때로는 흔들릴 때도 많았지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조금은 보이는 듯했다.

 

‘어떤 당을 지지한다’거나 ‘지구를 살리는 운동’등 거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삶의 스타일, 내 본성에 맞는 혹은 나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알게 모르게 이를 취해왔던 것이다.

앞으로 40년 이상의 인생을 더 살아야 하는 마흔을 앞둔지라

더 이상 내 길이 아닌 것에 흔들리지 말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행복했던 몇 가지 가치를 선택하고자 이 노트를 만들었다.

노트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다.

‘라이프스타일’이기에 내 몸, 의식주, 취미 등등 작은 것들부터 정의를 내려간다.

 

제목을 ‘나이 마흔의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정했는데

반드시 이렇게 살아가겠다기 보다는 이런 기준을 통해 내 삶을 정의 내려보고 싶었다.

물론,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내 모습이 다르겠지만 내가 보는 나의 모습과 다소 일치되는 모습을 만들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목표 : 죽기 전까지 현업에서 즐기며 일을 하기

-의 : 생활한복, 목스카프, 운동화. 몸이 편안해야한다. 격식과 비용은 최소한으로 한다. 친환경적 소재를 지양한다. 리사이클&업사이클

-식 :로컬푸드, 작은 텃밭을 가지자. 구매는 오일장에서. 제철과일과 채소의주의 식사. 아침은 과일과 쥬스. 점심 식당 밥은 찬 먼저, 밥량은 조절, 야식은 먹지 않는다. 음주운전 금지, 음주후 대리운전.

-주 : 개인주택 마련을 위한 10년 프로젝트. 최소한의 텃밭구비, 음식준비는 함께. 환기 및 청소는 매일.

-사람 : 그 사람입장에서 생각한다. 공손히 거절할 줄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눌 줄 안다. 아날로그의 중요성

-일 : 집중력을 높인다. 효율성을 도모한다. 기술을 도입한다. 전문가에게 물어본다. 병행하지 않는다. 80까지 즐겁게 일한다.

-일과 : 하루 수면 8시간을 확보한다. 11시에 잠들고 7시에 일어난다. 아침은 산책, 저녁엔 사색, 밤에는 독서 시간을 갖는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출근전, 퇴근후에 가진다. 매일 백팔배.

-건강 : 걷는다. 좋은 먹거리를 가려먹는다. 웃는다.

-취미 : 대금연습. 인터뷰.

-대외활동 : 지연, 학연, 혈연의 자연스러운 모임, 지향점이 분명한 사람들과의 교류

-종교 : 성당활동

     

라이프스타일을 작성하며 지키기 어려운 것을 되돌아보게 된다.

예를 들면 ‘11시에 잠들고 야식은 먹지 않고 독서시간을 갖는다’라는 것.

 내가 하기는 힘들지만(혹은 하고 있지 않지만) 누구나 가지고 싶은 라이프스타일이 비집고 들어온 것인데

이상과 현실에는 역시나 거리감이 있다.

 

‘나이 마흔이 되니 위기감이 생겼어요’

 

뭐 이런 이유도 있겠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진데다가 다양한 사람을 만나다보니 이런 노트가 생긴 것이다.

2.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

저녁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

그동안 가족과 함께 살며 아내의 배려로 사람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지난 5개월 동안은 정말 자유로웠다.

다양한 사람을 만나 저녁을 먹기도 하고 강연회에 참석하여 수업을 듣기도 하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서귀포 성당에서 매주, 전체 과정이 7번이나 되었던 로컬푸드 강연에서는

 전국의 내노라하는 강사들이 방문하였는데 ‘먹거리’와 ‘공동체’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밤 8시가 지났는데도 100명이나 되는 성당의 신자들이 한명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강의를 경청하는 모습이

내게는 신기하고 또 감동적이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며 보낸 시간도 정말 좋았다.

정작 새로 이사온 집에 초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대접할 만한 입장이 못되다보니 남의 집에서 맛있게 밥만 얻어 먹은듯 하여 죄송할 따름이다.

이야기 듣기를 나름의 재능으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팟캐스트 인터뷰인데

가족이 없는 사이를 못참고 지난해 잠시 중단한 ‘제주이민 인터뷰’를 다시 재개하는 한편

 ‘특별한 제주의 장소에서 들려주는 인생이야기’가 컨셉인 ‘오나의 제주’도 시작하였다.

휴대폰에 소형 마이크를 꼽고 궁금한 점을 묻고 귀담아 들은 후에 이야기를 편집하는 과정은

내게 행복을 주었다.

남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정말 소중한 일인데

‘인터뷰’를 핑계로 인맥도 쌓고 결과물도 만들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3. 술먹고 외박하기

이 것은 절대 내가 원하던 바가 아니다.

서귀포로 이사하다보니 친한 형들이 있는 제주시에 가서 술을 먹어야 했고

안전이 최우선인 아내의 지침(!)에 따라 게스트하우스, 혹은 찜질방에서 잤을 뿐이다.

시설 좋고 조용한 방에서 편하게 쉬고 아침에 개운하게 목욕까지 하고 서울출장을 가는

가성비 최고의 숙소가 바로 찜질방이다.

술을 한잔도 안마시고 저녁만 먹고 차를 몰고 서귀포로 가느냐,

이왕 술먹을 거 많이 먹고 제주시에서 자고 가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친한 형들의 강권 혹은 권유인데

동생으로서 마지못해 후자를 선택했다.

물론 아내가 있었다면 전자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동안 동생의 취한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던 형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서비스라면 서비스일까.

착하기만 한 동생에게도 이런 시간이 있었음을 형들은 기억하기 바란다.

4. 마음가는데로 드라이브하기, 제주여행하기

제주에 사는데 무슨 제주여행일까?

요즘 많이 생각하는 부분이자 필에 꽂힌 부분이다.

제주에 내려와 사는 것에 대한 초심이 없어지고 일상에 파묻혀갈 무렵,

비슷한 시기에 이주한 옛 직장동료가 잡지를 출간했다.

 창간호인데 ‘제주에 살며 제주를 여행하는 것’이 컨셉이다.

 

살아보는 듯한 여행이라..

 

표지에서부터 김영갑씨의 사진에 붙여진 제목까지 잊고 있었던 나의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내 이름은 ‘뽀뇨아빠’이전에 ‘뽀(별명)’였다.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다보면 원래 이름을 되찾아 주면서 마법이 풀리는 너무나 감동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잡지를 펼치는 순간, 바로 이 느낌이 들었다.

당연히 나는 그때 혼자였다.

한참을 앉아 책장을 넘기다 노을을 뒤로 한 채 차를 달렸다.

늘 가는 곳이지만 매일 다른 느낌을 갖는 다는 것.

일상에서 언제든 여행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여유와 마음가짐.

 

제주 서쪽을 달려 매달 열리는 작은 벼룩시장에서 친구들을 만나 수다도 떨고

나름 쇼핑도 하고 맛있게 간식도 사먹고.

아침 일찍 열리는 강연에 가서 커피와 빵으로 배를 채운 후에 영혼을 채우기.

제주 동쪽을 달려 1인 헤어샵에서 머리도 하고

동네책방에서 내 책을 확인하며 흐뭇해하기.

몇 년만에 제주에 여행온 친구와 맛있게 저녁을 먹고 뿌듯한 마음에 집으로 되돌아오기.

이 여유로움은 내게 ‘내 자신을 발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는 절대 이 기분과 느낌을 잊지 않을 것이다.

5. 나와 마주하기, 백팔배

우연히 부처님 오신날 마음이 허전하여 백팔배를 한 것을 시작으로

매일 절을 하고 있다.

 퇴근길 동양에서 가장 큰 절이라는 ‘약천사’에 들러 절을 하는데

운이 좋으면 스님이 염불까지 해주신다.

매일 매일이 다리가 쑤시고 잡념에 사로잡히긴 하지만 머릿속에 남는 한가지 생각을 소재로 짧은 문장을 남긴다.

 

 “내 인생의 주인되기”.

 

처음에는 내 삶을 누군가에게 공유하고 싶어 시작했는데

요즘은 내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생각에 적고 있다.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가 언젠가 제본이 되어 책이 된다면

아마 아이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당연히 나에게도 소중한 기록이 될 것이다.

백팔배를 하니 자연스레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전신운동이다보니 불필요한 살이 빠지게 되는데 워낙에 힘든 운동이라

저녁을 심하게 많이 먹는 약간의 부작용도 생겼다.

처음엔 절을 잘못하여 무릎이 까지기도 했는데 유투브에 공유된 영상을 보고 자세를 바로 잡았다.

의외로 주위에 백팔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단식’을 주기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따라 조만간 몸을 쉬게 해줄 생각도 가지고 있다.

우연한 시작이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관계의 면에서 파급력이 큰 것이 백팔배인듯하다.

6. 가족의 소중함을 간절하게 느끼기

거의 매주 전주를 찾았다.

처가에 도착하는 순간 나에게 안기는 뽀뇨를 힘껏 안아주었다.

아내를 안으며 그 동안의 고생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이를 엄하게 대하기도 하고 항상 위해주시는 장인 장모님은 어찌나 고마운지,

거의 매주 뽀뇨에게 선물을 사주는 처형은 또 얼마나 소중한지.

전주에서 되돌아가는 날이면 늘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내가 그 마음을 알고 터미널까지 마중을 나오는데

이야기하다 버스를 두 번이나 놓쳐 택시를 타야했다.

바보같은 생각이지만 나만 혼자 아무도 없는 제주로 되돌아가기 싫었다.

내가 어른만 아니었어도 가기 싫다고 떼를 썼을 것이다.

 대학시절 1년에 한두번 고향에 내려올까 했는데 다시 올라갈 때 아팠던 마음이 떠올랐다.

한참 전에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시외버스를 올라타던 중학생때의 기억도 떠올랐다.

그 마음의 중심에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이 있었고

나는 다섯 달의 시간동안 매주 그 마음을 확인해야 했다.

셋째를 낳지 않는다면 나에게 다시는 혼자있는 시간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다섯 달의 시간동안 재미있게, 의미있게 잘 보냈다.

곧 아내와 뽀뇨와 하나와 함께 보낼 시간이 어떨지 기대되고 흥분된다.

그 시간은 또 얼마나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줄까?

 

<아침에 찾은 강연프로그램, 강의가 너무 좋아서 질문하는 장면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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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끝에 있는 종달리 1인 헤어샵에서 일생 최고의 돈을 주고 머리를 했다>

제주이민 인터뷰1.png제주이민 인터뷰1.png

 

<인터뷰는 늘 행복한 일이다. 사우스카니발 강경환님을 인터뷰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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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뇨와 아내가 없는 출판감사회였지만 백여명의 지인들이 축하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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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하나 사진을 전합니다. 뽀뇨하나아빠의 리얼야생스토리! 기대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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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전업주부가 꿈이었다 현실이 된 행운남,엄마들의 육아에 도전장을 낸 차제남,제주 이주 3년차…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프렌디. pponyopap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