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만 남겨두고 아버지는 가셨으니 뽀뇨육아일기

오늘밤에도 침대에서 밀려났다. 4살 딸아이가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잔다고 “아빠 침대에 오지마”라고 불호령을 내린 지 몇 달이 지났다. 처음엔 침대에서 세로로 자는 딸아이 발에 밀려서, 혹시나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질까봐 자다가 깬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아이가 떨어질까봐, 아이 발을 피하려고 침대 끝에서 칼잠을 자야하는 신세에서 벗어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니 며칠간은 위로가 되었다. 

날이 갈수록 아내 옆에서는 멀어지고 아빠 자리는 침대의 아래쪽 좁은 방바닥에 깔린 이불 위라는 생각에 어제는 ‘하층민으로 전락한 아빠’의 신세가 가여웠다.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절대 침대를 허락하지 않는 뽀뇨지만 하루에 딱 두 번은 허락한다. 동화책 읽을 때와 아빠 등에 말타기 할 때.

“내가 어릴 적엔…”이라고 하면 ‘구닥다리’라는 이야기 듣기 십상이지만 오늘의 화두가 아빠니 창원의 가족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워낙에 묵직(?)한 분이셔서 ‘대화’라는 것을 나눠본 기억이 많지 않다. 완행버스가 한 시간에 한번 올까 말까한 시골이라 ‘아빠’라고 부르는 집이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내심 부러웠다. 지금처럼 침대가 있지도 않았지만 항상 내 자리는 벽을 마주한 곳. 잠을 자고 있으면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가 무섭고, 잘 때 얼굴 한번 보자며 깨우는 것이 싫어서 나는 늘 벽을 보고 잠이 들었다. 지금에야 ‘정이 많았지만 표현을 잘 못하는 아버지’로 기억하지만 나에게 아버지는 존재 자체로 무게감이 있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아버지’는 사라지고 ‘아빠’만 남았다. 항상 ‘엄마’를 통해서 이야기해야 했던 ‘아버지’와 “침대에 올라 오지마”라고 직접 호통을 칠 정도로 친구 같은 ‘아빠’는 과연 같은 자리에 있는 ‘그 아버지/아빠’인가? 뿌리 모양으로 가계도를 그려보면 위에서 내가 뻗어나오게 한 사람 중 한명인데 그 아버지와 이 아빠는 전혀 다른 종족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남자가 사냥을 하고 여자가 집안일과 농사를 했다면 이제 여자도 사냥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절대 여자가 대신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자부심을 가졌건만 이제 ‘대신할 수 없는 일’은 없어졌다. 아내의 영역이 넓혀지니 남편의 영역 또한 넓어지게 된 것이 사냥하던 아버지를 결국 집으로 불러들인게 아닌가 싶다. 

30년 동안 ‘아버지’가 사라지는 시대 변화를 겪으며 혼란스러울 때도 가끔 있지만 ‘벽만 보고 잠을 자던 아이’보다 ‘웃으며 호통치는 아이’가 낫다는 판단에는 흔들림이 없다. 아침에 아이 손을 잡고 어린이집 봉고에 태우고, 라디오를 들으며 설거지를 하고, 계란과 우유가 다 떨어졌는지 살피고, 빨래를 널고 또 걷고를 반복하다보면 과연 미래의 아빠와 엄마는 가정 내 역할에서 아이에게 어떻게 구분이 될 것인가 궁금해진다.


나에게 아빠란 무엇인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니라 가끔은 친구가 되었다가 가끔은 엄마도 되었다가 결국엔 그 누구의 엄마, 아빠도 아닌 ‘홍창욱’ 그 자체로 가족들에게, 내 자신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성격에도 안 맞는 ‘아빠처럼 굴기’보다 가족 내의 한 구성원으로서 개성을 존중받는다면 나 또한 자유로워지겠지.


(*한겨레신문 2013년 10월 22일자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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