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선사의 입산/도인열전 3 도인열전

국선도 청산선사 3/청산의 뜻과 탄생

  
청산은 병자(丙子)년인 1936년에 충남 천안군 풍세면 용정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호적에 등재하기를 본가가 있는 수원에서 하였고, 또 수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스스로 고향을 수원이라고 말하였다. 
 청산의 본관은 제주 고씨 영곡공파 중시조 35대손이다. 본명은 한(漢)자, 영(泳)자를 썼지만 나중에 스스로 경(庚)자, 민(民)자로 바꾸어 썼다.
 청산거사의 ‘청산(靑山)’은 산중수련을 할 때 스승이신 청운(靑雲)도인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 ‘청산’이라는 도호에 ‘거사(巨篩)’라는 별호를 붙인 까닭은, 큰 효로써 하늘을 받들고, 하늘의 큰 가르침을 본받아 도를 세상에 펼치겠다는 뜻이었다. 거사에 왕대 사(篩) 자가 쓰인 것은 스승 사(師) 자 위에 있는 대나무(竹)가 곧 큰 효(孝)를 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거사보다 선사라는 용어를 쓰는데, 이 호칭은 1984년도에 재입산하신 이후 제자들이 청산을 더욱 높여 부르면서 익숙해진 호칭이다.
 
 청산이 태어날 때 부친(필자의 조부)은 아주 좋은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부친은 충북 단양에 있는 한 암자에서 백 일을 정하고 기도정진을 하고 있었는데, 생전에 내가 “어떤 식으로 기도 정진하셨어요?” 하고 여쭈어 보니, 그때가 추운 겨울이었는데 매일 새벽마다 냉수마찰을 하고는 방에 들어가 벽에 점 하나 찍어놓고 종일 그 점만 바라보며 정신통일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시니까 어떠셨어요?” 하고 다시 여쭈어보니, “처음에는 점이 삐뚤빼뚤하게 움직이다가 어느 정도에 가면 신작로같이 큰 대로로 보인다”고 설명해주셨다.  
 여하튼 그렇게 백 일 수련을 마칠 무렵 부친은 기이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서 참으로 높은 산에 오르게 되었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고개를 드니 문득 엄청나게 큰 보름달이 나타나 온 천지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게 아니겠어. 잠시 그대로 보고 있으니까 그 큰 보름달이 내려오며 내 품에 안기었지! 그러고는 잠에서 깼는데 그 태몽을 꾸고 나서 네 애비를 낳은 거야!”
 전해 듣기로는, 청산의 4대조 할아버지 되시는 분이 고종황제의 글선생이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도 그런대로 잘 사는 집안이었고, 특히 조부 되시는 분은 학식이 있는데다가 덕망도 있고 종교적인 신앙도 깊은 분이었다. 한때는 “수원을 다닐 때 고아무개의 땅을 안 밟고는 못 다닌다”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유한 적도 있었다.
 
 청산의 조부가 젊었을 때의 일화 한 토막이 있다. 
 하루는 무슨 날이어서 새 옷을 입고 나들이를 하였는데, 하필이면 그날 길가에 온몸에 욕창이 나서 피고름이 흐르는 병자가 쓰러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문둥병이나 지독한 피부병이 흔하던 시절이었으니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도 누가 흉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소 의협심이 있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성정이 있었던지라, 조부는 스스럼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환자에게 입히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환자를 업고 집으로 데려와 며칠 동안 의원을 불러 치료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이 같은 조부의 선행은 주변에 소문이 났고, 입이 있는 사람들은 다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니 반드시 보답을 받으리라”라고 한 마디씩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 가세가 갑자기 기울게 되었다. 그렇게 평화롭던 집안이 심하게 흔들리자 식구들은 식구들대로 뿔뿔이 흩어지고 청산의 부모가 조부를 모시게 되었는데, 그것도 잠시뿐 결국에는 부모마저 어린 청산을 조부에게 맡기고 만주로 떠나게 된다. 그때부터 조부와 어린 청산 둘이서만 살게 되었는데 그때 조부는 청산을 끔찍이 사랑해주셨다고 한다.
 조부는 연세에 비해 정정하신 편이었고 저녁마다 청산에게 한문을 가르쳐주는 것이 낙으로 삼으셨다. 하지만 일상이 고달프고 힘든 것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다. 청산은 청산대로 학교를 마치면 조부 몰래 빨랫줄 장사부터 남의 집일까지 하고 저녁에는 조부가 가르쳐주는 한자를 배우면서 지냈다. 

청산 인물.jpg
 
 그러나 그런 생활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그때가 청산의 나이 열두 살,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어린 청산은 자기 때문에 조부님이 더욱 고생하시는 것 같아 효성스런 마음에 입이라도 하나 덜어드린다는 생각으로 외가에 간다는 말을 남긴 채 무작정 집을 나왔다. 하지만 어렵게 찾아간 외가는 이미 뿔뿔이 흩어져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동네를 다 뒤지다시피 하며 외가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사람마다 말이 다 달랐다. 
 그러다가 요행히 큰외숙의 친구라는 이가 한 말이 믿음이 가서 그이의 말을 따라 충청도 어디에 있다는 태학산 해선암이라는 절을 찾아가기로 했다. 큰외숙이 그 절 옆 어디에 오두막을 짓고 산다고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물어물어 찾아가 보니 다행히 큰외숙이 그 절 위에 실제로 살고 있었다. 그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은 청산은 큰외숙의 오두막이 좁았으므로 해선암 주지의 허락을 받아 냇가 옆에 임시로 거주할 토막집을 짓고 머물게 된다. 
 어린 시절의 청산은 몸집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체격이 다부지고 눈빛이 형형하여 어른들도 눈이 마주치면 얼른 피할 정도였다. 집념이 강하고 잘 참는 성격이어서 뭐든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아무리 어려워도 반드시 이뤄냈다고 한다. 하다못해 개구쟁이들 사이에서 싸움을 할 때에도 상대가 아무리 힘이 세고 나이가 많고 몸집이 크다고 해도 악착같이 달려들어 꼭 이겨서 직성이 풀려야 그만두지, 이기지 못하면 싸움을 그치지 않을 정도였다.
 반면에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도 있어서 개나 고양이, 토끼 같은 동물을 사랑하여 특히 아꼈고, 또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네 애비가 어릴 때에 그림을 얼마나 잘 그렸다고. 겨우 걸음마를 뗀 아기였는데도 그림을 곧잘 그렸어. 한번은 단군 할아버지라고 어디서 보고 와서 그림을 그렸는데 어찌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똑같이 그렸는지! 뭐 새우도 잘 그리고, 짐승들도 잘 그리고…….”
 할머니가 생전에 내게 해주신 말씀이다.

글 진목법사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