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서있다. 발은 땅에 깊이 박힌 듯하고, 손은 자연스럽게 내려져 있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아랫배를 안으로 빨아들인다. 두 무릎 사이를 붙이고 턱을 당긴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 호흡에 몸을 맡긴다. 미소가 가득하다. 긴장감이 없다. 고요다. 무언가 시작될 듯하다. 기운의 탄생이다. 곧 비움으로 이어진다. 번뇌와 욕망을 내려놓는다. 나의 생각과 기운을 다 내려놓고, 하늘과 땅에 나를 맡긴다. 내가 한 점 바람이 되고, 한 가락 물소리와 새소리가 된다. 노자는 말했다. “비움이 지극함에 이르고, 고요함을 굳세게 지켜라.”(치허극 수정독: 致虛極 守靜篤, <노자>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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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는 나란히 태극권을 시작했다. 무등산의 깊은 계곡. 숲이 우거져 햇빛도 비껴간다.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도 때로는 우렁차게, 때로는 가냘프게 물소리와 화합한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의 기운이 정수리 백회혈에 차갑게 내리꽂힌다. 땅에서는 따뜻한 기운이 발바닥 용천혈을 통해 스멀스멀 올라온다. 두 기운은 아랫배의 하단전에서 만난다. 서로 얼싸안으며 회오리바람이 일어난다. 회오리바람은 점점 커져 온몸을 휘감았다가, 점차 사그라든다. 온몸의 모공이 열린다. 그 모공으로 풀냄새가 스며든다. 머리는 마치 텅 빈 호박 속같이 청량하다. 관절 마디마디가 윤활유가 흐르는 듯 부드럽고 오장육부는 조화롭게 제자리를 잡는다. 노자는 말했다. “무거움은 가벼움의 뿌리가 되고, 고요함은 움직임의 주인이 된다.”(중위경근 정위조군: 重爲輕根 靜爲躁君, <노자> 26장)

 

 중국 아미산에서 태극권 원형 배워

 

 남편 민웅기(57)씨는 부인 황수정(49)씨의 태극권 사부였다. 둘은 태극권을 하며 부부가 됐다. 부부는 무등산 자락에 집을 짓고, 함께 태극권을 한다. 집 앞의 잔디밭에서, 계곡의 바위 위에서 부부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태극권에 몸을 맡긴다.

 민씨는 허약했다. 30년간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장폐색과 복막염 수술도 받았다. 체중이 50㎏을 밑돌았다. 전남 해남이 고향인 그는 전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수와 순천의 와이엠시에이(YMCA) 사무총장을 맡아 학창시절 못다 이룬 사회변혁 운동에 몰두했다. 나빠진 건강이 그를 힘들게 했다. 30대 중반 사회활동을 중단했다. 요가와 명상에 몰두했다. 절에서 100일간 머물기도 했다. 귀농을 해서 토종닭도 키우고 염소도 키웠다.

 우연히 태극권을 하는 스님을 만났다. 제자가 됐다. 그 스승을 따라 태극권 본토인 중국에 갔다. 중국 서안(시안)의 종남산(중난산) 자연토굴과 정업사 토굴에서 수련했다. 종남산은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10년간 수련했다는 곳이다. 토굴 수련은 힘들었다. 새벽 3시에 기상해서 2시간 명상과 요가를 했다. 참장공을 1시간씩 하루 세 번 했다. 참장공은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발끝을 11자로 나란히 하고서 양 무릎을 약간 굽힌 자세로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채 부동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태극권 투로(품새·동작)를 배우고, 노장사상을 배웠다. 노자가 쓴 <도덕경> 5천자를 모두 외웠다. 수련 장소를 사천성(쓰촨성) 아미산(어메이산)으로 옮겼다. 아미산은 중국 도교의 집성지였다. 티베트고원의 끝자락인 아미산에서 양씨 태극권의 원형(108식)을 배웠다. 대중이 쉽게 배우도록 만든 간화 태극권의 원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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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자는 2500년 전에 살았던 최고 학문의 경지에 오른 학자이자 수련을 성취한 도인입니다. 태극권은 도교의 제1 경전인 노자도덕경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노자의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함이 없음으로 하지 못함이 없다) 사상은 태극권의 기본 사상입니다.” 그는 “태극권은 내 안의 태극 일기(一氣)가 우주 태극의 일기와 하나가 되는 권법이자 양생법”이라며, 무위태극권은 ‘무위의 자리에서 무불위한 공능을 행한다’는 사상에 바탕을 둔 수련법”이라고 설명한다.

 3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민씨는 무등산 기슭에 태극권 수련을 위한 송계선원을 세웠다. 그리고 노자의 사상과 태극권을 연결한 <태극권과 노자>를 쓰고, 송계선원에 무등산인문학당을 만들어 고전을 강의하고 있다. 곧 <춤추는 노자>, <다시 꿈꾸는 장자>도 낸다.

 

 인체 에너지의 중심은 하체

 

 부인 황씨는 피아니스트였다. 광주에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황씨는 민씨에게 태극권을 배우며 잃었던 건강도 되찾고, 평생의 반려자도 찾았다. 화순문화원에서 태극권도 지도한다. “음악을 하니 소리에 예민해요. 자연 속에서 태극권을 하면 땅에 기어다니는 개미의 사각거림도 들려요. 스스로의 숨소리도 자세히 들려요. 자연과 하나 됨이 느껴져요. (남편과) 함께 태극권을 하면 환희심과 함께 편안함이 몰려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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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는 나란히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낮춘다. 한쪽 다리를 굽히고, 다른 쪽 다리를 뻗는다. 한 손은 어깨와 수평하게 뻗어 손가락을 모아 쥔다. 다른 손은 하단전을 거쳐 허벅지선을 지나 부드럽게 내민다. 하세(下勢)이다. 꼬리뼈가 바위에 닿을 듯싶게 상체를 반듯하게 유지한 채 낮춘다. 하세는 골반을 풀어주고 허리를 유연하게 만들고 하체를 튼튼하게 한다. 인체 에너지의 중심은 하체에 있다. 하체를 단련하는 일은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

 하세는 하심(下心)에서 나온다. 마음을 놓아야 한다. 마음을 놓으니 무심하게 된다. 무의 자리를 알게 된다. 무의 자리에서 보니 세상의 도가 강물처럼, 바다처럼 넘쳐나는 것을 경험한다. 황씨가 땀을 닦으며 말한다. “자연이 너무 고마운 스승입니다. 하늘과 땅, 눈과 비, 나무와 꽃들의 숨결과 호흡하며 그들의 차별 없는 기운 속에 태극의 춤을 한바탕 추고 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충만함이 가득 차오릅니다. 그 밝고 환한 기운의 흐름을 타고 살아갑니다. 태극권이 태극선이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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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