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爲의 자리에서 無不爲를 행한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40/ 무극으로 돌아가다/수세 收勢

 

 

가슴 앞에 모아진 두 손의 십자수가 정남향(예비식과 같은 방향)으로 돌아오고, 몸 안쪽을 향해 있던 두 손의 장심이 아래의 땅 쪽으로 향한 채, 두 손이 아래로 내려오는데 이와 동시에 구부려있던 두 무릎이 펴진다. 겹쳐있던 두 손이 단전 앞에서 나누어져서 원래의 자리, 즉 좌우 측면으로 돌아오고 그런 다음에 왼발이 들려와서 오른발 옆에 나란히 놓인다. 예비식의 자세와 같은 자세로 돌아왔다. 이것이 수세收勢.

수세收勢는 자세를 거두어들이는 식이다. 처음 초식을 일으키는 식인 기세와 상대되는 식이다. 무위태극선108식 투로의 마지막 초식이다. 장공의 식을 완결지우는 식이 된다.

 

기세가 무극에서 태극의 일기가 동해 나오는 식이라면, 수세는 십자수를 통해 거두어들인 태극太極의 일기가 다시 무극無極으로 복귀해 들어감을 뜻하는 식이다. 기세를 시작으로 태극선의 투로가 전개해나오면, 각각의 초식의 행법은 태극을 체로 하고 음양을 용으로 하여 펼쳐진다. 양과 개합과 허실과 강유가 물상物象과 기세氣勢를 이루며 뜻을 펼치는데, 그 본체는 전체를 하나로 통섭하고 균형과 조화를 아우르는 태극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극선을 행공하는 중에는 끊임없이 음양 이기와 조화로운 기운인 충기沖氣에 의해 온갖 다채로운 형상과 기세를 펼치게 되나, 어느 한 찰나도 행공자의 의식이 그 근본인 태극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축기와 연정화기 연기화신 단계에서 행공하는 이의 용의법用意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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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선 수련은 일차적으로 육체를 단련하고 형을 익히며 초식의 원리를 체득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수련한다. 그럼으로써 생명의 기초적인 힘을 기르고, 강한 체력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것이 입문수련과 축기築基수련의 요체이다. 이 단계에서는 태극 구결 중의 이른바 동작 구결을 위주로 하여 동작과 자세, 초식을 익히고 수련한다. 호흡은 자연호흡에 맡기고 몸의 동작과 자세, 그리고 초식을 바르고 정확하게 익히고 그런 다음에는 도탑게 숙련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단계가 수련의 단계가 되고, 사계 중 봄()의 구결이 이 단계에 해당된다.

 

다음으로 단련된 육체의 힘을 바탕으로, 복식호흡을 배합하여 초식을 수련한다. 동작의 음, , , 유에 따라 들숨과 날숨을 배합하여 행하는데, 조금도 호흡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특히 이 단계의 요령이다. 그리하여 동작과 함께 하는 호흡이 순일하게 이루어지고, 동작의 원활함과 원만함이 더해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연정화기煉精化氣, 연기화신煉氣化神의 단계에 빨려들어가게 된다. 이 과정에 진입하면 수련자는 정수련 단계에서 표준으로 삼았던 태극 구결의 내용을 내려놓고, 의식을 더 밀밀密密하고 관관關關하게 하여 호흡과 운기에 초점을 맞추어 수련하게 되는데, 이른바 운기運氣 구결을 위주로 수련한다. 이 단계가 본격적인 수련의 단계가 되며, 여름()과 가을()의 구결이 이에 해당된다.

 

동작과 초식의 운행이 순조롭고 자유롭게 되고, 이에 따른 호흡이 순일하여 무리가 없게 되면 다음 단계의 수련에 진입하게 된다. 수련의 세월이 무르익고 순숙되면 마음은 이제까지 의지해온 동작 구결과 운기 구결을 잊어야 한다. 이제까지 원칙과 표준으로 삼아왔던 동작과 운기 구결을 마음속에서 내려놓고, 이른바 지혜 구결을 의지해서 각각의 초식들의 의미하는 바의 지혜 공부에 전념한다. 이 단계의 공부는 연신환허煉神還虛와 연허합도煉虛合道에 해당한다. 겨울()의 구결이 이 공부에 해당된다.

 

무위태극선은 무위無爲의 자리에서 무불위無不爲한 공능을 행한다는노자의 사상에 종지를 둔 수련법이다. 지혜 수련 단계에서 마음 씀(用意)은 무극을 체로 삼고 태극을 용으로 삼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동작 수련이나 기수련 단계에서는 마음을 쓸 때, 태극을 체로 삼고 음양을 용으로 삼는다. 그러나 지혜 수련의 단계에서는 마음과 형상의 근본을 무극에 둔다. 무극을 뿌리로 하고, 태극을 줄기로 삼으며, 양을 잎과 꽃으로 삼는다. 태극을 수련하되 무극에 짝한다. 노자의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를 핵심요결로 삼는다. 심신불이心身不二를 통해 아타불이我他不二의 문으로 들어간다. 무극의 자리가 행공할 때 무위無爲의 자리가 됨이다. 그러므로 무위無爲의 태극 수련은 불이不二의 경계에 드는 지혜의 공부가 된다.

 

무릇 온갖 것은 무성하게 쑥쑥 자라지만

모두가 결국에는 각기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고요함이라 하고

고요함을 본성으로 돌아감이라 한다.

본성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夫物藝藝, 各腹歸其根. 부물운운 각복귀기근

歸根曰靜, 靜曰復命. 귀근왈정 정왈복명

復命曰常. 知常曰明. 복명왈상 지상왈명(16)

 

뭇 생명들은 태어나면 자라고, 자라면 무성하게 되고(夫物藝藝), 무성하게 되면 사그러들어서, 다시 그 뿌리로 되돌아가게 된다(各腹歸其根). 우리 인생도 그토록 나서, 자라고, 왕성하게 활동하다, 늙어지면, 그 뿌리로 되돌아간다. 마치 태극선의 투로가 무극으로부터 비롯되어서 태극의 일기가 나오고, 양의 잎과 꽃을 피우기 시작해서 온갖 종류의 형상과 기세를 펼치다가, 때가 다하면 다시 태극으로 합류하여 무극의 본디 자리로 되돌아옴과 같다. 에서 동이 생하여 나오고, 다시 동의 때가 다함으로 정으로 되돌아감이다(歸根曰靜). 이러한 정은 동의 극이 다하게 되어 들어가는 고요함이다. 무극의 자리는 본디 고요함(本寂)’이고, 그것이 본성의 자리이다.

 

그 움직임의 극에 이르러 고요함의 바탕으로 되돌아오게 되면, 본디 하늘로부터 품수 받은 바의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靜曰復命). 고요함 속에서 나온 만물은 고요함을 벗어나서 움직임으로써 이름을 갖고 그 이름값을 하게 되나, 멈추어야 할 때가 되면 이름을 버리고 다시 고요함의 본바탕으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고요함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늘 그러함()’이라 했다(復命曰常). 그러므로 늘 그러함’, 즉 상은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 속에서 변화를 타는 것이다. 파도를 타서 파도와 하나가 돼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변화를 탐으로써 변화 자체가 되는 불변함’, 즉 상이 되는 것이다.

 

노자는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이 밝음이라고 술회한다(知常曰明). 무위無爲는 그 밝음속에 들어가 저절로 밝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극無極의 자리가 이와 같음이다.

공이 이루어지면

몸은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길이다.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9)

 

유정무정의 존재들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제몫의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몫을 다하도록 필요한 바의 본성을 타고났을 것이다. 서로 제몫을 다함으로써 온생명이 존재하게 되고 온생명의 몫이 그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낱낱의 존재들은 자기 몫을 다 완수하게 되면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된다.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功遂身退)이 하늘의 도(天之道)라고 말하는 뜻이 여기에 있다. 스스로 이룬 공에 집착하여 몸을 물리지 못하게 되면 재앙이 올 것이다. 그것이 하늘의 도이다. 노자가 말한 뜻이 그렇게 읽혀진다.

 

나눔이 시작되니

비로소 이름이 생겨났다.

이름 또한 이미 있게 되면

무릇

장차 그침 또한 알아야 한다.

그침을 알아야

위태롭지 않다.

 

始制有名. 시제유명

名亦旣有, 명역기유

夫亦將知止, 부역장지지

知止, 可以不殆. 지지 가이불태 (32)

 

노자에게서 도의 또 다른 이름은 통나무다. 통나무가 쪼개져서 그릇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그래서 도는 늘 그러하듯이 이름이 없다(道常無名), 이 통나무는 비록 작지만(樸雖小) 천지조차 감히 신하처럼 부리지 못한다(天地不敢臣也). 이름 없는 통나무는 늘 아래에 처한다. 강과 바다가 아래에 처하니 온갖 시내가 흘러들어오는 것처럼(道之在天下, 猶川谷之於江海. 32). 아래에 처하니 겉보기에는 한없이 작아 보인다. 늘 무욕한다. 욕심이 없으니 작다고할 만하다(常無欲, 可名爲小. 34) 무명의 통나무는 장차 욕심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無名之樸, 夫亦將無欲. 37). 그토록 아래에 처해 무욕하게 되니 작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커다란 천지조차 감히 그를 부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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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나무는 쪼개지고 가공되어서 그릇으로 만들어진다. 그릇으로 만들어지고 나면 이름이 생긴다(始制有名). 통나무 시절에는 원형 그대로 있어서 나뉨이 없다. 따라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릇이 생기고 용도와 모양과 가격이 생기면 이름이 붙는다. 개념이 생긴다. 가치가 생긴다. 옳음과 그름(是非)도 생기고, 좋음과 좋지 않음(善惡)도 생기고, 좋아함과 싫어함(好惡)도 생긴다. 그런데 이름이 있고 나면(名亦旣有) 그 이름의 한계도 따라서 생긴다. 한계가 생기니 그쳐야할 때도 있기 마련이다(夫亦將知止). 무한한 통나무를 나누어 쪼개고 나니 유한한 그릇이 되고, 이에 따라 유한한 이름도 따라 붙게 된 것이다.

 

유한한 존재는 이름 또한 시한부로 존재한다. 생겨나오는 때가 있으면 그쳐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그쳐야할 때 그쳐야한다. 만약 그치지 않으면 위태로울 것이다. 그런 까닭에 모든 이름은 자기 한계를 알아야 하고 그쳐야할 때를 알아야 한다. 그침을 알게 되면 위태롭지 않다(知止, 可以不殆)는 말이 그것이다.

사람도 그 그릇의 때가 다하면 돌아간다. 그 이름을 뒤로하고 통나무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復歸于樸.) 그렇게 한평생을 뒤로 하고 돌아가면 무극의 품에 안기게 될 것이다(復歸於無極. 28).

인생의 겨울에 우리는 무극으로 돌아갈 준비를 잘해야 한다. 한때 무성하고 잘 나가던 사람들도 갈 때는 가야 한다. 만물이 제각기 무물無物의 상태로 되돌아감과 같이 그렇게 되돌아가야 한다(復歸於無物. 6).

의 화두다.

 

만 가지 것들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

萬法歸一 만법귀일

一歸何處 일귀하처

 

인생의 겨울에 풀어야 할 화두가 된다.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네.(山山水水)”

 

하늘 아래 만물들은 무상無常한 존재들이다. 끝없는 변화의 물결 속에서 넘실댄다. 산이 영원히 산일 수 없고 강이 영원히 강일 수 없는 것이 하늘 아래의 이법이다. 그래서 무상하다. 인연법에 따라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된다. 바위가 땅이 되고 그 땅이 산이 되고, 다시 산이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바다가 구름이 되고 구름이 나무가 되고 나무가 바람이 된다.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런데 깨어나서 보니 산은 산(山山)’이다. 깨우치고 난 후 아무런 분별의 마음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니 물은 물(水水)’이다. 이름이 없는 상태, 나뉨이 없는 혼연한 상태, ‘이 없는 청정淸靜한 상태에서 여과 없이 그대로 보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한 판의 태극의 춤사위가 끝났다. 양을 접어 태극의 온전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태극은 다시 무극의 품에 안겼다.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처럼.

극이 없어 혼돈한 가운데로 돌아갔다. 원형의 이름 없는 통나무의 질박함으로 되돌아갔다. 나고죽음도 없고, 오고감도 없고, 끊김도 영원함도 없고,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아 공한 그곳으로 돌아갔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네!” (끝)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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