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칠성을 마음에 새긴다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34/크게 이룸은 모자란 듯이 보인다/상보칠성 上步七星

  

   

하세로부터 허리를 전환해서 오른발이 앞으로 나가고, 동시에 오른손이 권으로 바뀌면서 들어오는 왼손의 아래에 십자 모양으로 들어간 형세를 취하니, 이것이 상보칠성上步七星이다. 왼발에 체중이 다 실리어 있어 왼발이 실하고 오른발은 허하다.

 

상보칠성上步七星은 북두칠성에 발을 올려놓는다는 뜻의 초식이다. 북두칠성은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이다. 천상의 왕국을 뜻하니 천국이라고도 하고 극락이라고도 한다. 북두칠성에 발을 올려놓았으니 인간이 천상의 세계에 들어감이다. 수련자의 의식이 하늘의 본성에 계합함이다. 사람이 하늘의 도와 합일해 들어감이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은 도가의 지고한 목표이다. 하늘은 크다. 하늘은 너르다. 하늘은 가이 없다. 하늘은 맑다. 하늘은 밝다. 하늘은 청정하다. 하늘은 혼연일체이다. 하늘은 가물하다. 하늘은 높다. 하늘은 깊다. 하늘은 사통팔달한다. 하늘은 텅 비어있다. 하늘은 신령함으로 가득하다.

내가 그런 하늘을 닮아있음이다. 하늘의 별이 내 마음에 북두칠성을 아로새긴다. 칠성삼매에 들어감이니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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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은 하늘에 올려놓고, 다른 한 발은 땅을 딛고 있다. 하늘의 맑음을 품고 땅의 탁함에 처한다. 하늘의 밝음을 안고 땅의 어두움을 비춘다. 하늘의 청정한 국토에서 마음을 쉬나, 세간의 혼탁함에 몸을 담고 있다. 높은 하늘에 뜻을 두나 저 낮은 민중의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가없이 크고 너른 하늘이 삼라만상에 일일이 스며들어있음이다. 사통팔달한 밝은 지혜의 옷을 입었으나, 사사로운 일에 처해서는 둔하고 미련한 듯하다. 일곱 개의 차크라를 열고 당념當念에 현존하니, 북두칠성의 신성한 빛이 몸과 마음의 구석구석을 비추지 않음이 없다.

 

도는 스스로 그러함을 따르네.”

생명을 기름은 마음 없음으로 해야 되느니.”

道法自然 도법자연

養生無心 양생무심 (태극구결)

 

태극선의 투로는 낮과 밤의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것 같기도 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인생 사계를 사는 것 같기도 하다. 어두우면 고요히 잠기고 밝으면 움직여 활발하다. 추우면 움츠리고 더우면 내뿜는다. 음과 양을 반복하며 허와 실을 반복한다. 왼쪽으로 가려거든 먼저 오른쪽으로 향하고 그 오른쪽이 극에 달하면 다시 왼쪽으로 향한다. 위로 솟구치려거든 먼저 아래로 가라앉고 밖으로 펼치려거든 먼저 안을 돌본다.

이것이 자연이다. 자연스런 방향과 자연스런 리듬으로 자연의 음률을 타듯, 바다의 파도를 타듯, 석양의 노을빛에 벌 나비가 너울너울 춤추듯 하게 된다.

 

도란 이렇듯 나비의 황홀한 춤사위를 닮았으니, 반짝하여 있는 것을 좇으나 실체가 없는 듯이 숨어버리고, 흐릿하여 없는 듯하나 모양 없는 모양만 화려하고 현란하다. 태극선의 투로는 자연의 도를 따라 걸림 없이 돌아가니, 모양() 없는 모양, 없는 물이 되어 황하고 홀하다. 그 속에 정기가 지극하게 자라고(精之至也), 그 속에 믿음이 도탑게 쌓인다(其精甚眞). 밖의 큰 길이 안의 작은 길을 타고 돌아간다. 밖의 큰 태극이 안의 작은 태극을 의지해 작용을 한다. 태극을 가슴에 안고, 무극을 등에 업으니 자연의 도가 이보다 더 참되랴!

 

생명을 살림은 태극을 살림이다. 음을 등에 지고 양을 가슴에 품고 태극의 큰 바퀴를 타고 돌아가니 조화로움이 지극하다(和之至也). 지극한 조화로움을 아는 것이 상이다(知和曰常). 나와 우주안의 상을 아는 것이 밝은 지혜다(知常曰明. 55). 그러므로 생명의 힘을 키우고 살림도 그 항상됨을 배우고 익힐 때 일어난다. 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양생이 된다. 양생은 마음 없는 마음(無心)으로 들어가 상주불변常住不變의 큰 길에 합류해 들어감이다.

 

크게 이루어진 것은, 모자란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찬 것은, 빈 듯이 보인다.

그 쓰임이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곧은 것은, 구부러진 것 같고,

크게 솜씨 좋은 것은, 서툰 것 같고,

크게 말하는 사람은, 더듬는 것 같다.

움직임으로 추위를 이기고,

고요함으로 더위를 이기는데,

깨끗하고 고요함이

하늘 아래 바름이 된다.

 

大成若缺, 대성약결

其用不弊, 기용불폐

大盈若沖, 대영약충

其用不窮, 기용불궁

大直若屈, 대직약굴

大巧若拙, 대교약졸

大辯若訥, 대변약눌

躁勝寒, 조승한

靜勝熟, 정승열

淸靜爲天下正 청정위천하정 (45)

 

대성大成이란 무슨 의미일까? 크게 이룬다, 크게 성공한다는 말이니, 인간사의 크게 이룸은 완전함을 의미한다. 결핍됨이 있어서는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이룸은 반드시 낡아짐이 있게 되고, 부족한 것을 채우게 되면 반드시 다함이 있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다.

노자는 온전한 도는 자연 그대로 이미 다 갖추고 있으므로, 거기에다가 인위적인 완전함을 추구하거나 보완함으로써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온전한 도를 훼방하는 것이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대성大成의 대는 무의 의미로 읽는 것이 좋다. 무성無成이 되니 애초에 이룰 것도 없게 된다. 이룬다고 하는 순간, 자꾸 자연에 뭔가를 더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노자의 사유법으로 말하자면, 인위를 덜고 덜어서(損之又損) 무위에 이르지 않으면(以至於無爲) 참된 길에 들어설 수가 없다. 노자는 도는 닦으면 닦을수록 더 덜어 진다라고 했다.(爲道日損) 그러므로 무위자연에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대성大成의 도리가 된다.

자연은 원래 덜고 덜어서 도달하는 지경이므로 그 안에 뭔가 결핍된 듯이 보이나(若缺), 그렇게 부족한 듯이 보일 때 오히려 크게 이룰 수 있다(大成若缺)는 말은 역설의 화법을 말하는 것이 된다. 크게 이루어 결핍된 것처럼 보이나,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다(其用不弊). 그렇게 대성大成하니 하지 못함이 없지 않겠는가?(無爲而無不爲. 48)

 

대영약충大盈若沖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은 언어적 형식으로는 반대의 말이다. 세간의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역시 반대가 된다. 그러나 노자에게서 이 둘은 통일되어 있다. 빔에 의지해서 참은 자기를 실현하고, 참을 통해서 빔은 그 쓰임이 있게 된다. 반대편에 있는 서로에게 사무치고, 갈마들어가서 그 서로를 통섭하여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의 영성은 비어있으나 가득 참과 같다. ‘빔으로 가득 차있음이다. 영성이란 본래 공함의 다른 이름이다. 이나 충은 비존재를 뜻하는 말이 아니다. 공과 충은 스스로의 고정된 모습을 고집하지 않음이니, 하게 된다. 하니 하게 되고, 영하니 하게 된다. 하게 되니 신령함의 무불위無不爲한 공능이 작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 즉 빔은 신령한 작용이 무궁무진하게 나오는 산실이 되어, ‘가득 참()’의 공능이 나오게 하는 것으로 읽는다. 그리하여 크게 참은 마치 빈 것처럼 보이나, 그 쓰임에는 다함이 없게 된다(其用不窮).

 

대직약굴大直若屈도 마찬가지의 이법으로 푼다. 곧은 것과 굽은 것은 반대이다. 언어적 개념으로는 서로 모순이 된다. 그러나 노자가 말하고자하는 것은 그러한 형식논리나 언어적 분별상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그 언어 이전의 자리에 서서 바라봄을 뜻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측량을 하면 직선과 곡선은 결코 같지 않다. 같을 수가 없다. 서로 모순이다. 그런데 우주선을 타고 저 너머에서 바라본 지구는 직선이라는 것이 없다. 곡선밖에 없다. 다시 말해 큰 직선은 곡선을 안에 담고 굽이쳐 있는 꼴이다. 그러하니 굽이로 통하지 않고서 크게 난 곧음은 없다는 말이 된다.

 

이런 이치를 도덕이나 행위에 적용해도 마찬가지가 된다. 노자는 큰 길은 굽이쳐있는 작은 길들이 모여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리고 곧음()이라는 것도 결국, 하늘 아래 뭇 생명들과의 어울림을 통해서 나타나고, 그 어울림의 형식과 내용이 바로 굽힘()’이 됨을 통찰하고 있는 것으로 풀어진다.

그러므로 크게 곧음은 하늘 아래 뭇 생명들을 한데 살리고, 한데 깨우치고, 한데 어울리게 하는 그러한 큰 길을 말하게 되니, 반드시 작은 길들 안에서 자신을 굽히고 자기를 낮춤으로써, 큰 어울림으로 한길이 되는 것을 뜻하게 된다. 그리하여 곧음과 굽음은 상대편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고 화해함으로써, 큰 길 안에서 스스로를 실현하게 된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크게 솜씨 좋은 것은, 마치 서툰 것 같다는 말이다. 세상사의 이치로 보면 기교가 많음과 서투름은 모순이 된다. 그러나 노자의 말의 참 뜻은 다른 데에 있다. 기교()란 인위적으로 가공하고 다듬는 솜씨이다. 서투름()은 그러한 기교가 부족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노자는 교와 졸, 이 둘은 지양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기교()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문명을 지나치게 정보와 기술, 과학에 종속적인 시스템으로 꾸미게 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라 사람들의 심성도 점차 자연성을 떠나게 되고, 인류의 삶의 양식도 밖의 물질적 대상과 꾸밈 위주로 변해갈 수밖에 없게 된다. 서투름()은 늘 극복해야 할 대상이므로 인류문명의 발달사는 서투름을 제거하여 완벽함을 추구하는데 그 초점이 맞춰져있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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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이 둘의 지양과 통일도 그 모범식을 자연에서 찾는다. 자연은 인공수로를 만들어 물을 공급하지도 않고,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실시간으로 사진을 전송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인공부화를 시켜 대량으로 병아리를 만들지도 않고, 한 곳에 수십만 마리의 소를 집단사육하지도 않는다. 자연은 성장호르몬을 주사함으로써 과일의 크기를 몇 배나 크게 불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연은 원자폭탄을 개발하거나 미사일을 개발해 인류의 생존과 평화를 위협할 기교도 없다.

인간의 눈으로 본 자연은 뭔가 늘 부족하다. 어수룩하다. 서툴다. 그렇게 여기므로 인간은 자신들의 지식과 기술로 자연을 보완하거나 개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연에 인위적 장치를 가공하고 덧붙이면 더욱 완전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노자가 보는 자연은 다르다. 서투름 투성이처럼 보이나 완벽한 솜씨를 갖고 있다. 식물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동물이 제공하고, 식물은 동물에게 자신의 몸과 씨앗과 잎을 제공함으로써 서로 간에 완벽하게 공생한다. 먹는 음식과 배설하는 똥오줌이 순환하여 한 가지도 버릴 것 없이 완전하다. 그러므로 밥이 곧 똥이고, 똥이 곧 밥이게 된다.

숲속에서 동물들의 배설물들이 한꺼번에 쌓여서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보고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함부로 배설하고 함부로 방뇨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숲은 완벽하게 모든 것을 잘 처리한다. 독수리가 뱀을 잡아먹어서 뱀의 종이 단멸될 소지라도 있는가. 칡넝쿨이 소나무를 감고 올라가니 칡넝쿨의 괴롭힘으로 인해 소나무들이 멸종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대교약졸大巧若拙이 이와 같다. 서투름 투성이로 보이는 자연은 일점일획의 빈틈도 없이 정교한 솜씨로 자연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로부터 배우는 것이 대교약졸大巧若拙의 지혜일 것이다.

 

대변약눌大辯若訥이란 크게 말하는 사람은, 마치 더듬는 것 같다는 뜻이다. 대변은 말을 솜씨 좋게 잘한다는 그런 뜻으로 쓰인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것이다. 기교 있는 연설능력이나 아름답게 치장하는 언사도 아니다. 논리적인 화술로 대중을 사로잡는 능변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큰 뜻의 말을 일컫는 것이다.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다. 진실하여 공감이 가는 그런 말, 서로 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화해의 말, 상대방의 아픔에 연민의 정을 보내는 한 마디,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 절망스러운 사람에게 사랑해요, 난 당신을 믿어요! 라고 격려를 보내는 사랑의 언어, 이런 말들은 큰 말이다.

나의 이해와 욕망과 알음알이를 드러내는 말은 아무리 화술이 능하고 언변이 뛰어나도 상대방의 절실함에 부합하는 말은 못 된다. 그런 것은 작은 말에 불과하다.

말이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섬기고, 상대를 모시는 뜻을 담게 되면 힘이 있게 된다. 큰 말은 큰 길의 언어가 되기 때문에 큰 힘을 낸다. 이런 말은 서툴다. 어눌한 것 같이 들린다. 기교로 말을 일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자는 신실한 말은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을 주지 못한다.(信言不美, 美言不信. 81)”고 했다. 진실한 말은 번지르하지도 않고, 과장됨도 없어서 어눌한 듯 하게 된다. 그런 말의 뜻으로 풀어지는 말이 대변약눌大辯若訥이다.

 

움직임으로 추위를 이기고(躁勝寒), 고요함으로 더위를 이기는(靜勝熟) 것은 하늘아래의 이법이다. 음과 양, 동과 정은 하늘아래의 질서가 생성되고 변화되는데 필요한 필수적인 요인이다. 그리고 인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늘 아래의 법칙을 따르며 살아가게 되니, , 정의 이법은 인간의 삶의 양식을 받침하는 핵심적인 원리가 된다.

이 두 가지 상반된 요인은 하늘 아래에서 둘 다 매우 긴요하고 필수적이나, 그중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은 깨끗함과 고요함이다(淸靜爲天下正). 왜냐하면 청정淸靜이 상도常道의 본체가 되기 때문이다. 깨끗함과 고요함이 상도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상보칠성은 양 방향에 걸쳐있는 초식이다. 무와 유, 음과 양, 정과 동, 허와 실의 두 방향을 두루하게 소통한다. 장자가 말한 양행兩行의 뜻에 통한다. 기실 두 개의 갈림길이라는 것도 인간의 이분법적 분별심에 다름 아니다. 애초에 모순과 같은 것은 있지 않다. 사람의 생각이 그것을 모순으로 볼 뿐이다.

 

두 갈래의 길은 본래 둘이 아니다(不二). 그 둘이 아님을 밝게 알고 실천하는 것, 그것이 상보칠성의 길이 된다.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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