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황하고 홀함이여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 교실/황하고 홀하도다/도련후 倒攆猴 

 

 

도련후倒攆猴는 원숭이가 뒤를 흘끔흘끔 보며 뒷걸음을 치는 모습을 본뜬 것이다. 허리가 오른 방향과 왼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두 손이 교차하고, 두 발은 서로 교대로 반 보씩 뒤로 물러나면서 초식이 전개된다.

우식은 오른손의 장이 어깨너머 위쪽 대각선 방향에서 귀를 향해 접혀와서 허리가 전환함에 따라 가슴 앞으로 나오고 계속해서 들어오는 왼손과 교차해 앞으로 나아간다. 좌식은 왼손이 왼쪽 어깨너머 대각선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허리의 선전운동과 함께 우식과 같은 방식으로 귀를 향해 와서 가슴 앞으로 진행해 나온다. 우식과 좌식을 번갈아가며 세 번 반복하고 나서 사비식으로 이어진다

 

도련후는 뒷걸음으로 물러서는 행공법이다. 좌우를 번갈아서 뒤쪽의 기운을 탐색해가며 매우 신중히 한 걸음 한 걸음 후퇴해 간다. 말하자면 후퇴가 곧 전진이 된다. 노자의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것 같다(進道若退)”를 실천하는 모양이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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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지난 시절의 길이 아득하다. 해서 보니 홀했다. 홀해서 다시 보니 황했다. 황홀하고 홀황한 흔적들을 돌아보며 조심조심 나아간다. 홀 속에 황이 있고 황 속에 홀이 있다. 황홀한 가운데 인생의 길이 놓여있다.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고 생명이기도 하고, 마음이기도 하고 혼이기도 하고 영이기도 했다. 의식의 스펙트럼을 따라 황하기도 하고 홀하기도 했다. 왼쪽의 길로 가는 듯했으나 돌아보니 왼쪽이 아니다. 오른쪽의 길로 돌아가야 된다고 방향을 틀었으나 돌아보니 오른쪽도 아니었다.

 

그 순간이 영원하리라고 믿었으나 영원하지도 않았다. 지리한 장마처럼 길게 느껴졌던 때가 훗날 다시 보니 한 찰나의 일이 되고 말았다. 이름을 좇아서 헤매기도 하고, 실질을 숭상함으로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줄 알고서 다 잡았다고 생각했으나, 잡은 것도 없고, 놓친 것도 없어, 꿈속처럼 황홀하다.

 

고요히 물러서며 뒤를 돌아보니, 스스로 걸어온 삶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 훑어보는 중년의 여유가 묻어난다. 이제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흐린 필름을 되돌려감듯 기억의 자취를 따라서 겹겹이 인연되어진 인과因果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 같다.

어느새 백발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았다. 가을의 은행잎이 노란색으로 아름답게 채색된 것처럼 말이다. 이제 그이는 팔씨름으로는 아들 녀석을 이기기 쉽지 않게 되었다. 한때는 근동에서 그이의 힘자랑을 대적할 자가 없었을 것이다. 엊그제 옆 동네와 친선 축구시합을 가졌다. 한 시간 뛰고 일주일 동안 몸살을 앓았다. 차마 발설하기 힘든 나이 듦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20대의 시절에는 30대의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혹여 나이 듦의 흔적이 내 인생에 끼어드는 날이 없도록 바랐을 것이다. 자취방같이 허름한 살림에서 시작한 빈털터리의 인생에 바야흐로 이름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름 있음(有名)’을 따라 들어간 인연의 숲, 그 숲은 끝도 없는 분단과 독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람 잘 날 없는 혼돈 속이었다. 누가 지었을지도 모를 업들을 청산하기 위해 더불어 업들을 재생산하다 보낸 나날이었다.

 

그땐 모든 것이 명쾌했었다. 당위적 명제가 그대로 우리 삶의 현재를 압도하고 있었으므로, 여러 다른 이들도 모두 다 같은 시대의 같은 문제의식, 그리고 같은 실천으로 같은 삶의 방식을 행위해야 한다고 단정했을 것이다. 문제들의 숲 속에 처함을 위안삼아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문제 됨의 뿌리를 탐구하는 데까지 나의 지혜가 미치지 못했을 것이므로. 세상을 뒤바꿀 문제의식과 인연되어진 패러다임과 관계망들에 따라서 열정과 분노를 조직하고 실천하는 일, 그런 일들 속에 묻혀 젊은 한때 심각했을 것이다.

 

평생의 일로 삼고자 했던 한때의 각오와 결단도 새로운 시절, 새로운 인연의 이끌림을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분노와 열정의 시기를 뒤로하고, 자유와 낭만의 시절을 좇아 산골의 작고 소박한 터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복잡다단한 도시문명을 내려놓고 한적한 산자락에 자리를 튼 셈이다.

 

하늘과 땅에 기대어 사는 삶, 새소리와 바람소리와 물소리가 뼛속까지 절어있는 내 묵은 때를 씻어내려준다. 변변한 기술 하나 없는 나로서는 헐린 돌담을 쌓는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다. 간섭하지 않아도 잘 자라는 들꽃을 키우고 감상하는 것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소일거리가 된다. 어미닭이 종종거리는 아기 병아리들을 데리고 봄나들이를 즐길 때면, 나도 으레 나들이를 나서곤 했다. 사람의 그림자가 그리운 날에는 이웃마을에 마실을 갔고, 그곳에서 문명의 이탈자들과 어울려 차와 술을 벗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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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가 땡초에게 길을 물었다. 땡초가 입을 열어, 그대는 20대에는 방황했고, 30대에 한자리했으나, 40대에는 얼어붙어있었는가? 라고 물었다. 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땡초가 다시 물었다. 얼음이 녹기 시작했는가? 50대 초입에 들어선 지금, 동토에 봄이 찾아왔는데 그런가? 도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자는 나이 50지천명知天命했다고 했다. 중년의 가을이 왔다. 저 높고 푸른 하늘이 나에게 무엇을 명했는지를 알 것도 같다. 피할 수 없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오늘의 내가 있을 것이다. 뿌리지 않고 거둘 수 있는 것은 없다. 인생의 가을에 우리는 또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화엄경에 인과因果의 노래가 있다.

 

꽃 속에 열매가 맺어 있고(因中含果),

열매 위에 꽃을 담고 있네(果上含因).

원인이 결과의 바다를 포함하고 있으니(因該果海),

결과가 원인의 근원에 갈마드네(果徹因源).

 

꽃은 원인이요, 열매는 결과가 된다. 수행은 인이요, 깨달음은 과가 된다. 우리의 인생은 인이요, 우리가 증득한 지혜는 과가 된다. 이것이 인과因果의 법칙이다. 인과의 바퀴를 굴리며 돌아가는 인생길이 무엇인가 하고 노자에게 물었다.

 

큰 덕의 모습은

오로지 도를 따를 뿐이다.

길의 만물됨이

오로지 황하고 홀하다.

홀하고 황하도다!

그 가운데 모습이 있네.

황하고 홀하도다!

그 가운데 물()이 있네.

그윽하고 어둡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네.

그 정기가 참으로 참되도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이름 사라지지 아니하니

이로써 뭇 처음을

살필 수 있구나.

뭇 처음의 모습을

내 어찌 알랴!

이 길로 알 뿐이지.

 

孔德之容, 唯道是從. 공덕지용 유도시종

道之爲物, 惟恍惟惚. 도지위물 유황유홀

惚兮恍兮, 其中有象; 홀혜황혜 기중유상

恍兮惚兮, 其中有物. 황혜홀혜 기중유물

窈兮冥兮, 其中有精; 요혜명혜 기중유정

其精甚眞, 其中有信. 기정심진 기중유신

自古及今, 其名不去, 자고급금 기명불거

以閱衆甫. 이열중보

吾何以知衆甫之然哉? 오하이지중보지연재

以此. 이차 (21)

 

공은 크다는 뜻으로 풀어, 공덕지용孔德之容은 큰 덕의 모습으로 읽는다. 큰 덕의 모습은 오로지 도를 따른다는 뜻으로 쓴 것이 유도시종唯道是從이다. , 즉 인도의 근거가 천도에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도가 물이 되는 것을 말해 물화物化라고 한다(道之爲物). 온갖 물에 길이 스며들어 물이 된다. 그것이 길이 베푸는 덕이고 길의 쓰임이다. 길의 쓰임이 물이 되는 것, 그것이 즉 물화物化이다. 도가 물속에 들어가서 물이 되니 오로지 황하고 홀하다(惟恍惟惚). 우리의 눈앞에 전개되는 아침 안개가 황홀하듯이, 개구리가 알을 낳아 올챙이가 되고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아침저녁으로 귓전을 울림이 황홀하듯이, 겨울 하늘에 실구름 하나 없이 맑으니, 청명하기 그지없어 홀황하듯이 하늘 아래 모든 물이 그토록 황홀하다.

 

홀혜惚兮를 음미해 보자. 홀이란 눈앞에 보이지 않는 듯한 존재의 특성을 가리켜 쓴 말이다. 긍정의 어법으로 써서 없는 듯하다로 읽는다. ‘= 비유非有로 읽는다는 말이다. 비유非有있는 것을 부정하는 뜻이나, ‘비유非有 = 로 바로 등치시키지 않는 것이 이 경우의 독법이다.

노자는 홀혜惚兮와 나란히 황혜恍兮를 같이 썼다. 황혜恍兮는 언뜻 보기에 뭔가가 있는 것 같아쓰는 말이다. 홀과 반대의 입장에 있으니 긍정의 어법이다. ‘있는 듯하다의 뜻으로 읽어 황이라 했다. 그리고 = 비무非無로 읽는다. 마찬가지 논리로 = 로 등치시키지 않고 읽는 것이 노자의 원의를 놓치지 않는 요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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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풀이하는 배경을 설명해 보자. 경문에 홀하고 황하도다!(惚兮恍兮) 그 가운데 모양이 있음이여.(其中有象)” 라고 한 뜻을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우리가 바라보니 눈앞에 뭔가 없는 것 같은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 같은데 없지도 않다(). 그래서 자세히 바라보니 그 없는 것 같고 있는 것도 같은(惚兮恍兮) 그 가운데에 어떤 모양()이 있더라(其中有象)는 것이다.

모양()이란 무엇인가? 어떤 물의 실체는 아니나 그 실체가 반영된, 혹은 우리 마음에 투영된 표상表象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홀혜황혜惚兮恍兮 = 비유비무非有非無 =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읽는다. 현상에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기 쉬우나, 잘 들여다보니 모양 같은 것이 없지 않다는 뜻을, 이중부정의 어법을 빌어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순서를 바꾸어서 말했다. 있는 것 같고 없는 것도 같은데(恍兮惚兮), 그 있는 것 같고 없는 것도 같은 그 속에 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其中有物)고 했다. 은 도가 외화된 것이다. 도가 이 물에 의지해서 작용을 나타내는 것이다. 역시 황혜홀혜恍兮惚兮 = 비무비유非無非有 = 색즉시공色卽是空으로 읽는다. 현상에 반짝이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서, 즉 존재하는 것 같이 여겨 들여다보았더니, 그 모양은 사라지고 물의 실상만 있지 않는 것처럼드러난다는 뜻이다.

언어를 대단히 아껴쓰는 노자가 중언부언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노자를 읽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요소이다. 노자가 홀혜황혜惚兮恍兮, 황혜홀혜恍兮惚兮를 이유없이 반복할 리가 없다고 볼 때, 홀과 황의 아낌의 언어쓰기를 통해서 그가 진정으로말하고자 하는 뜻이 가감 없이 드러날 것이다.

 

그윽하고 어둡도다! 그 가운데 정기가 있네.(窈兮冥兮, 其中有精)”는 무슨 뜻일까? 그윽하고 어두운 경지가 무엇일까? 도가 물화되어 나타난 경계는 황하고 홀하고, 홀하고 황하다. 그토록 황홀함 속에 만물의 형상과 정기()가 있다. 의 알갱이를 정기라 하거늘 생명의 에너지를 말함이다. 을 물로서 존재케 하고, 그 물의 작용을 이루어 스스로를 실현해 가는 것, 그것을 정기라 한다. 이러한 정기는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 길러진다. 한밤의 어두움 속에서 정기가 자라나고, 한겨울의 그윽한 적막 속에서 생명의 힘은 키워진다.

수련에 있어서도 같은 이법으로 통한다. ‘그윽하고 어두움의 사유를 명상冥想이라 하거늘, 수련의 경계에서 도달하는 마음의 경계를 나타냄이다. 마음은 다른 말로 바꾸면 의식이다. 의식은 정, , , , 을 아울러 통섭하는 말이다. 생명체를 통째로 이르는 말이 즉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이 내면을 향할 때, 그것을 명상이라 한다. 명상 상태에서 정기가 키워지고, 명상 상태에서 지혜가 증득된다. 그러므로 정기지혜’, 이 두 가지는 명상의 열매가 된다.

 

그 정기가 몹시 참되도다(其精甚眞)! 그 가운데 믿음이 있네(其中有信).” 물화된 세계에서 도의 진실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정기이다. 이 정기는 도의 작용을 실현하게 해주는 에너지이다. 정기는 안으로는 만물 스스로의 자기생명을 유지하고 재생산하게 하는 생명력이며, 밖으로는 조건 지어진 관계망들과 교섭하게 하는 동인이 된다. 이 생명력이 없으면 만물의 만물됨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물 가운데서 가장 참되지 않을 수가 없다.(其精甚眞)

 

그리고 이 정기가 있으므로 만물 안에 도의 질서와 궤칙이 존재하게 되고 작동하게 된다. 정기, 즉 만물의 생명력은 만물들 간에 겹겹이 쌓인 관계망 속에서 서로 거래하고 교섭하게 하는 약속된 징표와 같다. 신표와 같은 것이다. 의 세계에서 도를 실현하고 작동하는 것이 바로 정기이기 때문에 이 정기는 물과 물 사이의 거래와 교류, 순환을 가능케 하는 실질적인 질료와 같은 것이다. 그 가운데 믿음이 있다는 말(其中有信)은 그런 뜻으로 읽는다.

 

도는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으면 도가 될 수 없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 도의 이름 없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自古及今, 其名不去)

그것은 혼연함으로 하나이다(混而爲一). 홀과 황이 새끼꼬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무와 유가 교차함으로 새끼꼬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존재한다(繩繩兮). 이름을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다(不可名). 임무가 끝나면 원래의 물 없음의 상태로 되돌아간다(復歸於無物). 이렇게 물되어, 물 없음(無物)의 상태로 반복하여 오가는 것을 일러 모양 없는 모양(無狀之狀)’이라 하고, ‘물 없는 물(無物之物)’이라 한다. 이것이 홀황忽恍의 뜻이다.

 

도는 맞으려고 해도 그 머리(시작)를 볼 수도 없고(迎之不見其首), 따라가려고 해도 그 꼬리조차 볼 수도 없다(隨之不見其後). 시작도 끝도 잡을 수 없으니, 옛날의 도를 붙잡아 오늘의 있음을 비추어본다(執古之道, 以御今之有). 그러한 것을 말해서 도의 맥락(是謂道紀. 14)이라 한다.

홀하고 황한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다. 그 속에 참 길의 흐름이 있음이여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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