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휩쓰는 회오리바람의 기세 무위태극선 교실

민웅기의 무위태극선/가장 훌륭한 것은 물과 같다/루슬요보 樓膝柪步  

 

루슬樓膝이란 무릎의 모양이 층을 이룬 것 같아 붙여진 이름이며, 요보柪步란 손과 발이 서로 엇갈려 나가는 동작을 형용해서 나온 이름이다. 백학량시가 용이 연못에서 솟아오르며 승천하는 모습을 연상시킴과, 아울러 학이 비상하기 직전에 날개짓을 하는 듯한 호방한 기개를 펼쳐 보이고 있는 식이라면, 루슬요보는 질풍노도처럼 몰아오는 기세가 온 사방을 삼킬 듯한 초식이다. 좌우의 회전운동 가운데 앞으로 전진하는 초식의 전개가 마치 회오리바람이 사막을 휩쓸고 지나가듯 하다.

 

오른 어깨 뒤로 대각선 방향에서 장이 형성되어 귀 끝을 스칠 듯 얼굴 앞을 지나 정면에 오른 손의 장이 펼쳐지고, 다시 왼 방향으로 돌아 나오면서 왼손의 장이 펼쳐진다. 도도하기는 거센 파도 같다가도 바람 걷힌 호수의 잔잔한 물결 같이 되기도 한다.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물소 같기도 하다가, 코 씩씩 불고 질주하는 성난 코뿔소 같기도 하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소리 같기도 하고, 사납게 떨어지는 폭포수 같기도 하다. 나선형으로 돌아 나오는 품새는 우아한 발레리나의 유연한 몸짓을 닮아있는데, 이어질 듯 끊길 듯 감아 돌아가는 동작의 변화가 묘연하다. 노을빛 짙은 저녁 무렵, 한가로이 떠도는 솔개의 눈빛을 닮아있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같다. 히말라야 트래킹에 나선 탐방객들 같다. 선방에서 용맹정진하는 수행자들 같다. 묵묵히 논밭을 가는 농부들 같다. 길가는 나그네 두리번거리는 모습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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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손의 양과 음, 실과 허가 뚜렷하게 나뉘며, 대칭과 협조가 원활해야 한다. 허리를 중심으로 양손과 양발이 조화를 이루어 변화함에 떨끝 만큼이라도 억지스러운 힘이 들어가면 안 된다. 무릎의 각도는 적절하여야 한다. 미치지 못하면 쌍중雙重(쌍중은 한쪽으로 편침이 제대로 안 되어 무게가 양쪽에 어정쩡하게 걸쳐있는 것을 말함)의 결함을 가져오니 허실전환이 자유롭지 않고, 지나치면 균형을 잃거나 무릎관절을 상하게 되니 잘된 편침을 이루도록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움직이는 가운데 미려가 정중이 되도록 아랫배에서 의식을 놓치지 않아야함도 태극수련자의 빼놓을 수 없는 주의사항이다. 특히 상체가 앞으로 기울지 않도록 함으로써 선전旋轉이 영활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허리를 중심으로 두 손과 두 발은 대칭과 협조를 이루어야 하고,

이어져 꿰어 나오는 것이 원만하고 활달해야 한다.”

 

對稱協調 대칭협조

連貫圓活 연관원활(태극구결)

의념으로 기를 운행하고,

기로써 몸을 운전하게 한다.”

 

以意行氣 이의행기

以氣運身 이기운신

 

뜻을 사용하되 힘을 쓰면 안 된다.”

 

用意不用力 용의불용력 (태극구결)

 

루슬요보는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필수적인 태극권 행공의 요소를 두루 담고 있다. 기본에 충실해야 전부를 이룰 수 있다. 루슬요보 수련은 의, , 일심염삼一心念三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수련할 때 한 마음에 의식, , 몸의 세 가지를 담아 이 세 가지가 혼연일체가 되어야 함을 이르는 구결이다. 이 일심염삼一心念三은 동시에 의식분별의 다양성을 알아차리는 것과, 몸 안의 내기와 몸 밖의 외기를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몸 안의 오장육부와 뼈 속 골수, 피부모공의 개폐와 털끝의 미묘한 떨림까지 한 마음에 다 통째로 알아차림을 의미한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무심無心 속에서만 가능하다. 무심 속에서만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도달한다. 도법자연道法自然에 노닐게 될 때, 몸은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며, 안팎의 기운이 조화롭게 되어 자유자재하게 될 것이고, 마음은 밝음을 얻어, 길 가는 도상에서 꽃을 보게 될 것이다. 노자가 길 가는 이에게 당부하는 말을 경청해보자.

 

훌륭한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열심히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한다.

중간치기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 한다.

하치리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낄낄대고 비웃는다.

그 하치리 사람들이 웃지 않으면

오히려 도가 되기에 부족할 것이다.

 

上士聞道, 상사문도

勤而行之, 근이행지

中士聞道, 중사문도

若存若亡, 약존약망

下士聞道, 하사문도

大而笑之, 대이소지

不笑不足以爲道. 불소부족이위도 (41)

 

길 가는 이들이 노자에게 길을 물었다.

선생님! 참된 길이 어떤 길입니까?”

노자는 가만히 듣고 반문한다.

그대는 상사上士인가, 중사中士인가, 하사下士인가?”

 

2,5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고 만다. 마치 인기 코메디언의 우스갯소리를 듣고 박장대소하듯이 말이다.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웬 도?” “도가 밥 먹여준대?” “도 보단 돈이 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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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치기들은 그보단 더 낫다. 그들은 도를 들으면 앞에서는 삐긋이 웃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기도 한다. 그러나 돌아서면 싹 달라진다. “현실을 생각해야지. 이론과 현실은 달라!” 그들은 명상서적을 끼고 다니며 여러 사람들 앞에선 이야기도 즐긴다. ‘를 알음알이의 대상이나 혹은 교양인의 장식물 쯤 여긴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끼워 넣는 상품가치로는 제격이라고도 생각한다.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지금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좀 한가하면 도 닦으며 살아도 괜찮겠어!”

 

우리가 서 있는 길은 다음에 가는 길이 아니다. 한가로울 때 과외로 가는 길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 순간 간다. 누구의 눈치를 보며 갈 것도 없다. 둘이라면 둘이서, 셋이라면 셋이서, 그도 저도 아니면 홀로 그냥 간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바른 길을 찾는 것이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참된 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법칙을 따른다. ‘고통을 여의고 행복을 얻는 길’, 그런 길이 지금 여기에있다. 노자는 말을 잇는다. 그 길은 물과 같은 길이라고.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살아가면서 낮은 땅에 거하기를 잘하고,

마음 씀씀이는 깊고도 그윽하며,

베풀어 줄 때는 사랑으로 잘하고,

말함에는 믿음이 넘치고,

다스릴 때는 질서 있게 잘하고,

일할 때는 능력 있게 잘하고,

움직일 때는 때에 맞게 잘한다.

무릇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도다.

 

上善若水. 상선약수

水善利萬物而不爭. 수선리만물이부쟁

處衆人之所惡, 처중인지소오

故幾於道. 고기어도

居善地, 거선지

心善淵, 심선연

與善仁, 여선인

言善信, 언선신

政善治, 정선치

事善能, 사선능

動善時. 동선시

夫唯不爭, 부유부쟁

故無尤. 고무우(8)

 

계곡 옆에 자리 잡은 우리 수련장에서 지난 가을과 겨울의 100일을 지냈다. 수련장이라 할 만한 시설을 갖춘 것은 없으나, 무등산의 기슭에 자리를 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인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시무지기 폭포가 있어 이 물이 고스란히 흘러 들어오니 사시사철 물이 풍부하게 흐른다. 하우스 수련장 안에 텐트가 하나 있어 이곳이 내 개인 쉼터이자 수련실이다. 텐트 안에서는 계곡물소리가 여과 없이 그대로 다 들린다. 비라도 심하게 쏟아지는 날엔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이 소란하다.

 

계곡물소리는 처음엔 소음처럼 시끄러웠다. 수련에 방해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었는데, 지내다보니 오히려 이근청정耳根淸淨 수련에 좋은 재료가 되었다. 계곡의 물소리에 주파수를 맞추고 물소리의 파장에 마음의 파장을 맞추어 앉아 있으면, 그대로 입정入靜이 된다. 처음엔 귀로 듣는 듯하지만 귀로 듣지 않고, 그리고 마음으로 듣는 듯하지만 마음으로 듣지 않는다. 중궁의 현빈玄牝의 자리를 가만히 지키고 앉아있으면, 밖의 소란스러움은 이내 잠잠히 잦아들고 소리를 느끼는 자도 듣는 자도 소리도 없이 그냥 떨림만 있게 된다.

 

내가 소리가 되어버렸는지, 소리가 내가 되어버렸는지 모를 지경이 되면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명상하곤 했는데,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물 흐르는 소리가 배어들었다. 노자의 상선약수는 내 마음속에 파문이 되어 밥 먹을 때도, 그릇을 씻을 때도, 그리고 화장실에서 뒷일을 볼 때도, 오직 의 영상만 가득했던 것 같다.

나에게 노자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물에게 인격을 부여해준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인격이 아니라 신성神性 그 자체였다. 물은 거의 에 가깝다고 말한 대목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이 도를 깨달은 이가 성인이고, 이 길을 가는 이가 도인이고, 그리고 이 길은 사실 모두가 다 가는 그런 길이었다. 왜냐하면 만물만생이 이 길에서 한치라도 벗어나 본 적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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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그냥 길이다. 계곡에만 강가에만 바다에만 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물은 땅속 어디에라도 있고 풀이나 나무나 미생물이나 곤충이나 하늘 나는 새들이나 고라니 멧돼지 그리고 이들의 똥 속에도 있고, 저 맑은 하늘에도 있다. 우리 몸은 아예 물길로 이루어진 것 같다. 몸 전체가 뼈 속까지 다 물길이다. 물길은 크게 나 있기도 하고, 작게 나 있기도 하다. 큰 물길에서 작은 물길이 갈라져 나오고, 다시 이 작은 물길들이 큰 물길로 합류해 들어온다.

 

물은 아래쪽으로 잘 흐르는 것 같지만 꼭 물이 아래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다. 백두산 천지를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란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백두산 정상은 해발 2,744미터나 된다. 그 정상에 있는 봉우리들이 둘러쳐 감싸 안고 있는 하늘의 못이 바로 천지. 이 하늘의 못은 물 깊이가 평균 수백 미터란다.

현지에서 들은 얘기다. 예전에 중국정부가 여기 천지에다 배를 띄우려고 했었는데, 못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워낙 거센 바람에 그 계획을 포기했다고 했다. 그 높은 곳에 위치한 하늘아래 연못이 소용돌이를 친다면 다른 원인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바로 천지의 바닥으로부터 솟아올라오는 물의 기류 때문일 것이다.

 

! 그럴 수가 있구나. 나는 그때 물이 위에서 아래로만 흐른다는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우리 몸에도 머리 꼭대기까지 물길이 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이 자연이고 길이었다.

물이 못 미치는 데가 없고 물길이 나지 않은 곳이 없는 데서, 편만이 존재하는 도의 보편성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하면서 물은 거의 도와 같다라고 노자가 강조한 이유는 뭘까?

 

물은 첫째, 온갖 것들을 이롭게 한다는 점이다(水善利萬物). 물이 없으면 뭇 생명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가 없으니, 물이 곧 생명이나 다름없다.

둘째, 물은 다른 존재들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不爭)’는 것이다. 하늘아래 낱낱의 생명체들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다른 생명체들과 생존을 경쟁하며 살아간다. 서로 협력하고 서로 경쟁하니 이를 두고 상생相生 상극相剋한다고 말한다. 싸우는 것도 그러한 생존방식 중의 한 가지일 테다.

그러나 노자가 관찰한 바의 물은 다르다. 자신()이 필요한 모든 곳에 물을 보내 그들의 목을 축이고 밥을 먹여주며 그들의 세탁을 위해 자신을 더럽히지만, 그들과 싸우질 않고 경쟁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이 그렇게 다투지 않을 수(不爭)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노자의 무사無私무욕無欲이고 불가의 무아無我사상과 상통한다.

물은 자신의 사심이나 욕심이 없기 때문에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자기의 개성이나 모양, 색깔, 향기 그 어떤 것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고 다만 자기를 필요로 하는 것들의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일부나 전부가 되어줄 뿐이다. 원통형의 그릇에 담기면 원통형이 되어주고 사각형의 그릇에 들어가면 거기에 맞춰 사각형이 되어준다. 녹차 잔에 들어가서는 맑고 향기로운 찻물이 되어 마시는 이의 정신을 맑게 해주고, 그들의 온갖 스트레스를 씻어내려 준다. 매운탕 속에 들어가서는 얼큰한 맛으로 먹는 이의 식욕을 돋구어주고, 샤워물로 쓰일 때는 인간들의 군상에 끼인 때구정물을 말끔히 씻어주고, 변기에 들어가서는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쓰고 남들의 뒤태를 깨끗이 정리해준다.

셋째, 물은 남들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를 잘한다는 점이다(處衆人之所惡). 사람들은 모두가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음식, 더 아름다운 맵시, 더 명예로운 일, 더 귀한 자리, 더 높은 직위, 얻기 어려운 재화 등을 좇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분주하지만 물은 그렇지 않다. 물은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즐겨 처하고, 남들이 가장 꺼리는 일도 마다 않고 나서고, 그리고 물은 소통이 단절된 그 어느 곳까지 도달하여 만물만생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소통하도록 그 자신이 전령사가 된다.

 

그러하니 물은 성인의 모습을 닮았고, 그 자체로 최고의 선이고, 거의 도에 다다른 것이다(故幾於道). 이러한 물의 덕을 담아 칭송하는 것이 경문의 일곱 가지 선이다. 7의 덕을 갖추면 이미 길 가는 이의 덕을 다 갖춘다는 말이니, 그것이 물의 덕을 본받는 인간의 길이 된다. 그렇게 참된 인간을 장자는 참사람眞人이라 했다.

 

지인은 자기가 없고(至人無己),

신인은 공이 없고(神人無功),

성인은 이름이 없다(聖人無名).” (장자, 소요유)

 

참사람은 이름이 있어도 이름을 잊으며, 공이 있어도 공에 머물지 않으며, 그러므로 참사람은 자기라고 할 만한 것도 있지 않아, ‘망아忘我무아無我의 지경에 이른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 한 몸을 위하고, ‘을 세우고, ‘명예를 얻으려고만 한다. 이 세 가지 굴레에 속박되어 일생을 고통 속에 마친다. 어찌 한 순간이라도 참된 행복을 향유할 수가 있을까?

 

무리지어 태극권 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장강대해가 물결치는 것 같다. 그 강물에 달빛이 비추니 태극선경에 들어 소요하는 이들의 마음에 둥근 달이 환하게 떠 있다. ‘월인천강月印千江’(하늘의 달이 비추어 천 개의 강물에 달 도장을 찍은 것과 같음을 비유한 말. 하늘의 천성을 품부 받은 인간들의 마음의 본성이 환한 빛으로 깨어남의 의미)의 노래가 밤이슬을 적신다.

글 사진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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