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은 생존을 위한 경보체계 장수박사의 건강 삼위일체

 장수박사의 건강 삼위일체 7/아픔의 귀함을 알아야

 

당 현종 시절, 안록산의 난리가 일어난 것은 희대의 미녀가 황제를 정사를 돌보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심취하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미모를 유명한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고개 돌려 짓는 미소, 백가지 매력이 뿜어나고(回頭一笑 百眉生)”. 얼마나 매혹적이었으면 고갯짓 눈빛 하나에 사나이의 심금이 울리고 천하가 흔들렸을까? 오죽했으면 아편 꽃에 그 당사자의 이름을 따다가 양귀비라고까지 하였을까? 양귀비꽃에서의 추출성분은 강력한 진통제이면서 기쁨과 만족감을 가져다 주는 몰핀이다. 그러나 이러한 몰핀은 중독현상을 야기하여 사람을 폐인화하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점을 가져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종이 양귀비에 빠졌다가 나라를 망치는 아픔을 당한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러한 아편의 효과를 웅변하고 있다. 바로 기쁨은 아픔을 동반하고 다니는 야누스적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다가 화타가 수 시간에 걸쳐 칼로 어깨에 생긴 종기를 수술 하는데도 불구하고, 관운장은 바둑을 두며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장면에서, 그에 대한 존경과 신격화가 더하여짐을 누구나 느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픔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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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픔은 몸이 아프든지 마음이 아프든지 본인의 것이다. 누구도 대신 아파해줄 수가 없다. 병이 무섭고 두려운 것은 아프기 때문이다. 특히 말기암환자가 겪는 처절한 통증과의 투쟁을 지켜보는 가족 친지의 괴로움의 본질은 그 아픔을 나누지 못하고 달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한 통증들이, 병원 응급실에 찾아가 간단한 치료에 의하여 씻은 듯 사라질 때 신기하게 느껴 본 적은 없었는가? 어떠한 기전에 의하여 아픔이 생기고, 없어지는가? 약물 투여에 의한 통증의 치료는 분명히 어떤 분자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무엇일까? 이러한 아픔은 종래 많은 의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어 왔고, 이제 그 구체적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아픔의 생리
 
 아픔은 본인에게는 매우 괴로울지 몰라도 생체가 지닌 가장 중요한 보호기구중의 하나이다. 즉 통증은 생체가 외부로부터 받는 나쁜 자극이나, 공격, 또는 내부에 생긴 여러 병적 상황을 알려주는 수단으로써 생체가 이에 대한 대비를 하도록 하는 경고성 감각이다. 이러한 통증은 신체적인 감각이면서 사실은 주관적인 정서적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 일정한 유해자극에 대하여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통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경험과 학습에 따라 아픔의 정도가 크게 다르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하여 후송된 군인들은, 같은 정도의 부상을 받은 민간인들보다 통증을 느끼는 정도가 낮다. 전장에서의 부상은 안전한 장소로의 후송을 뜻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 실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개의 발바닥에 전기 쇼크를 주면 통증이 유발되나, 전기 쇼크와 더불어 동시에 먹이를 주는 훈련을 하면, 통증반응이 없어지고, 침을 흘리고 꼬리를 치는 반응을 보인다. 침술의 경우에도 동양인에게 흔히 행하여지나, 서양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효과가 별로 없다는 사실은 침술에 대한 사회적 암시가 진통효과에 중요함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통증을 느끼는데는 개인적 및 사회적인 학습과 경험이 매우 중요한 인자이다.


 통증에는 칼에 찔리거나 바위에 눌렸을 때와 같이 유해한 자극에 대하여 중추에서 경계가 명확하고 예민한 통각을 느끼는 생리적 통증이 있다. 생리적 통증은 척수반사를 유발하고 자율신경반응과, 각성 및 정서반응을 유발하여 더 이상의 손상을 피하게 하는데 그 궁극적 목표가 있다. 그리고 염증 반응에서 보이는 염증성 통증은 손상된 조직을 제거하고, 조직을 치유 회복시키는 생체방어 반응의 하나이다. 한편 신경조직 자체에 손상이 가해지면 특유한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유발된다. 생리적 통증과 달리 저절로 또는 가벼운 촉각에 대해서도 심한 통증이 초래되는 것은 신경세포의 손상으로 새로운 신경연결망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통증에는 위치적으로는 체표에서 느끼는 통증과 심부조직에서 유래하는 심부통증이 있다. 체표통증은 비교적 그 원인을 파악하기 쉬우나, 심부통증은 둔하고, 경계가 분명치 않으며 원인이 확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두통이나 근육통이 예이다. 또한 심부통증과 다른 양상의 장기통증이 있다. 내부 장기근육의 수축, 이완, 혈류이상 등에 의하여 초래되며, 흔히 원래의 장기와 멀리 떨어져 있는 피부 부위로 통증이 연관된다. 통증은 병적변화가 발생한 해당부위가 아닌 다른 부위로 통증이 연관되거나 투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진단에 조심을 기하여야 한다. 극단적인 예로 유령통증이라는 특수 경우가 있다. 다리가 절단된 뒤에도 수개월 또는 수년간 없어진 다리와 발가락의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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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통증을 느끼는 데는 무엇보다도 유해자극을 감지하는 수용체, 즉 유해감수기(nociceptor)가 제안되고 있다. 이러한 유해감수기는 기계적 물리적 자극뿐 아니라 여러 가지 화학물질들에 대하여도 반응한다. 외부, 내부 요인에 의한 물리적 손상과 그로 인하여 말초에 유리되는 많은 물질들이 통각을 가지게 하는 요인으로 거론되고 있으나, 이들이 유해감수기에 특이적으로 작용한다는 증거가 부족하여, 아직 통증의 분자적 기전은 명료하지 못한 실정이다.
 
 기쁨의 분자: 엔도르핀의 발견
 
 통증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통증을 달래주는 아편과 같은 진통제의 작용방법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분명한 진통효과가 있는 물질이 어떻게 아픔을 달래주는가를 밝힘으로써 통증의 기본기전을 밝히고, 통증을 달래 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들의 개발이 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70년대 중반 미국의 스나이더박사는 아편 주성분인 몰핀이 생체 내에 작용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몰핀과 선택적으로 작용하는 수용체(receptor, 受容體)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그와 같은 수용체를 찾던 중, 뇌신경세포와 장상피세포에서 이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생체 내에 이러한 몰핀과 반응하는 수용체가 본디 있다면, 이들 수용체는 몰핀과 같은 외부로부터 들어온 알칼로이드성 물질이 아닌, 본래 생체 내에서 이들 수용체와 작용하는 어떤 고유물질이 있을 것이라고 다시 추론하였다. 그러한 몰핀수용체에 반응하는 물질이 바로 기쁨을 주재하는 또는 반대로 아픔을 조절하는 물질일 것으로 가정하여, 많은 노력 끝에 이들 수용체와 반응하는 생체 고유의 물질이, 뇌신경세포와 부신피질세포에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분리 정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다섯 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간단한 펩티드성 물질들임이 밝혀져, 이들을 “엔케팔린”이라고 명명하였다. 나아가서 이러한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뇌하수체에서는 엔케팔린 보다 크기가 더 큰 분자가 발견되었으며, 이들 역시 엔케팔린과 유사하게 수용체와 반응하고, 생체내 효과도 몰핀과 비슷하다 하여 생체 고유 몰핀과 비슷한 물질이라는 뜻에서 엔도르핀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들과 생체내 수용체와의 반응은 개체의 아픔을 덜어주고, 기쁨을 가져다 줌을 확인하여 이들을 기쁨의 분자 또는 행복의 분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엔케팔린이나 엔도르핀의 발견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분자로 설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이와 유사한 많은 물질들이 차례로 발견되어 사람의 감정과 관련 있음이 거론되었고, 이러한 물질들의 수용체들이 역시 다양하게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감정을 주재하거나 제어하는 물질이 차례로 개발된다면, 분노의 분자, 슬픔의 분자도 발견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 않을까? 또한 이러한 분자들과 반응하는 수용체들이 발견된다면 인간의 감정인 기쁨, 슬픔, 분노, 즐거움의 작용기전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분자들을 조작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이나 느낌을 제어하는 것이 언젠가는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할 경우 인간의 감정 조절시스템의 인위적 제어를 통하여 인간사회에 항상 기쁨이 충만하고 아픔이 없는 사회가 될지, 아니면 역으로 엄청난 사회적 낭패가 초래될지 걱정이 앞선다.
 
 기쁨의 탐닉은 중독을 초래한다.
 
 아편이 통증을 완화하여,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하여 준다는 것은 수천 년 전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아편사용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중독이라는 부작용이다. 아편중독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회적 병폐가 초래되고, 가정이 파탄되고, 개개인은 파멸의 길로 가야만 하였던가? 기쁨의 물질이 다른 한편으로 중독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의 엄정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실제 사람에게 중독을 초래하는 것은 대부분 사람의 감정과 관련된 기호품들이다. 술이 그렇고, 담배가 그렇고, 이와 같은 마약들이 그러하다. 좋아해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사용을 한 결과 중독을 초래하고, 중독은 다시 계속적 사용을 요구하는 피드백 시스템이다. 너무 좋아하면 비싼 값을 치루게 된다(多愛必大費)는 옛 가르침이 바로 생명현상에도 적용된다. 따라서 사람살이에는 끊어야 할 것, 참아야 할 것이 단호하게 요구되고 있고, 인생이란 기쁘다가 슬프고, 울다가 웃는 변화가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고 있다. 삶에는 항상 좋은 것만, 항상 기쁨만 계속될 수 없음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죽음과 늙음, 좋고 궂은 일, 낮과 밤의 모든 변화에 생체가 그대로 순응하면 이러한 무리한 사건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의 감정분자시스템이 이미 분명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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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이러한 기쁨분자의 작용기전이나, 중독이 되는 과정은 어떻게 설명이 되고 있는가? 사람의 기쁨은 생체 내에 엔케팔린이나 엔도르핀과 같은 기쁨분자들이 생합성되어 나온 다음 이들이 특정 수용체와 결합함으로써 발현된다. 따라서 기쁨분자의 생합성이 적어지면 기쁨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을 때, 즐거운 일이 일어났을 때, 규칙적인 운동을 할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이와 같은 기쁨분자 생성이 증가된다고 알려졌다. 아울러 기쁨분자의 정확한 작용기전을 알기 위하여서, 그 기쁨분자와 반응하는 수용체를 확인하는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종래 아편의 다른 용도였던 지사제로서의 기능도 설명이 된 것은 장내 상피막에 이러한 몰핀의 수용체가 발견되었고, 결과적으로 장의 연동운동을 제한하여 설사를 효과적으로 그치게 함이 밝혀졌다. 폐세포에서도 수용체가 발견되어, 아편사용시 초래되는 또다른 의학적 문제였던 호흡마비의 기전이 설명되게 되었다. 기쁨분자들의 작용에는 이러한 분자의 생성도 중요하지만, 그 표적수용체가 반드시 있어야만 효과를 나타냄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아편과 같은 물질이 수용체와 반응하여 세포내 어떤 변화를 초래하고, 어떻게 하여 감정에 변화를 초래하는가는 또다른 숙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편의 수용체가 뇌신경세포만이 아닌 장상피 및 폐세포에도 발현한다는 사실은 기쁨이 지나치거나, 반대로 너무 우울한 경우 우선 먹는 것을 처리하는 소화과정과 숨을 쉬는 호흡과정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람의 감정, 기쁨과 괴로움이 바로 생존에 필수적인 숨쉬는 일과 먹는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이다. 감정이 생명현상의 필수적 과정을 제어할 수 있다는 분자적 기전이며, 바로 이러한 현상의 과학적 구명은 몸과 마음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진리의 오묘함을 더욱 뚜렷하게 해준다.
 
 아픔은 이기심의 본질이다.
 
 아프다는 것은 본디 본인만의 것이다. 어느 누구도 대행해 줄 수 없다. 아픔에는 천하장사도 없다. 아프면 누구나 괴로워하고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먹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모두 싫어져 버린다. 아프게 되면 온통 세상이 나 혼자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기쁨은 나누어 가질 수가 있다. 그러나 아픔은 본질적으로 나누어 가질 수가 없다. 사람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아픔, 괴로움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의 원리를 아직도 잘 모른다. 반면, 그 반대되는 기쁨의 경우, 기쁨을 주관하는 물질이 발견되고, 그 수용체가 발견되어, 감정생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열리고 있다. 아픔에도 이와 유사한 아픔의 분자가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아픔의 경우에는 기쁨의 경우와 같은 명확한 분자, 또는 수용체가 알려져 있지 못하다. 정말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못 찾고 있는 것인지? 아픔이란 단순하게 기쁨의 분자가 결핍되었을 때 초래되는 간접적인 느낌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아픔을 직접 주재하는 또다른 분자들이 있는지 정말 궁금하기만 하다. 기쁨은 생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오히려 중독과 같은 위험을 초래한다. 그러나 아픔은 생존의 중요한 경보체계이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아픔은 일단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위험을 알리는 신호임을 알아야 한다. 병이 들었을 때, 다쳤을 때 아픔을 통하여 우리는 생체 이상을 감지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게 된다. 아픔은 바로 생존을 위한 경보체계의 핵심이므로 기쁨과는 그 가치를 크게 달리한다. 따라서 아픔은 생명이 삶을 유지하기 위한, 또는 살아가는 과정에 당연히 겪어 내야 할 업보중의 하나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종교적 표현의 근간을 이루는 것도 바로 이러한 아픔이 생명의 중요한 본연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박상철 (전남대 연구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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