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천지에서 하늘의 문을 두드리다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 수련일기 22/백두산에 오르다

 
 밤이 길었고 어둠 깊었지만 새벽의 미명은 밝아오고 있었다. 간밤에 꾼 꿈의 기억조차 새벽의 미명을 따라 하얗게 사라지고 없다. 가슴 속 미미한 떨림조차 신선한 마당에, 아침의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오늘 드디어 백두산에 오른다.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꼭대기엘 오르는 것이다. 그토록 소망하고 그리워했던 그곳, 통일 동산으로 간다. 그곳엔 천지가 있다. 우리의 목마름을 풀어줄 생명의 샘이 있다. 하늘 아래 하늘과 잇닿은 신성의 바다, 그곳에 가면 나의 본래면목을 투명하게 비춰줄 하늘 거울이 있다. 그 거울에 나를 비추어보자. 그 투명한 물빛에 나의 낯짝을 씻어보자. 답답한 가슴 풀어헤치고 그 하늘에 소리쳐보자. 하늘빛 뚝뚝 떨어져 맺힌 이슬방울들, 그 달콤함에 입맞춤해보자.
 
 그곳에 가면 저 반도의 남녘땅 어느 골짝에서 온 보리 건달의 소원을 빌어보자.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낱낱이 고백해보자. 그곳에 가면 아아타타, 좌좌우우, 남남북북, 천천지지 간의 화해와 통일을 빌어보자. 네 이웃을 사랑하는가 물어보자. 네 이웃이 진정 누구인가 물어보자. 가장 가까이 있는 자와 가장 멀리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자. 아, 그곳에 가면, 왜 서로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지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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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늘은 땅을 덮고 있는지, 왜 땅은 하늘의 소리를 내야 하는지 들어보자. 그곳에 가면, 왜 사람에게서 하늘의 음성이 들리는지, 왜 하늘은 하늘다웁고, 땅은 땅다웁고, 사람은 사람다워야 되는지 들어보자. 그 신성의 바다에 얼굴을 묻고 나와 우리를 들여다보자.         
 
 이번 일정은 2박3일로 잡혔다. 길지 않은 것 같지만 짧지도 않다. 즈나와 성페이, 아이, 나, 이렇게 네 명이다. 중국 애들이 나의 속마음을 티끌만큼이라도 알 리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들이 나의 오랜 염원과 바램, 그리고 지금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서툰 중국어로 아침부터 열심히 설명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오늘의 날씨에 대해 백두산 정상의 천지신명께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쾌쾌청청한 날씨를 허락하옵소서.
 현지의 주민들이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 이곳 백두산 천지 관광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문제는 날씨라고들 했다. 밖의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백두산 정상과 천지의 날씨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백두산 천지를 촬영하기 위해서 몇 번을 거듭하고 거듭해서 올랐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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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 상공의 기류 변화가 하도 신기막측하고 예측불허한 까닭에 행운이 따르지 않고선 단번에 그 아름답고 황홀한 백두산천지의 장관을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이 정황을 따져보아 확실했다.    
 태생이 낙천적인 나의 성격상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다른 도리가 없다. 나의 발길 인도하시는 하늘님에게 맡기기로 했다.
 
 교통수단은 대절 택시를 이용하기로 했다. 중간에 안도와 돈화를 거쳐 이도백하까지 가는 데 걸리기로 예정된 시간은 네 시간이다.
 가는 길의 도중에 온갖 감회가 내 심중을 스친다. ‘백두산’ 지명이 근래 들어 공식적으론 장백산으로 쓰이고 있다. 연변 자치주의 관할로 있던 백두산 관광과 개발에 관한 모든 권한이 중국정부의 직할인 ‘장백산 관리위원회’로 넘어갔고, ‘백두산’이란 이름은 이제 이곳의 공식적 명부에선 자취를 감추어버렸다는 쓸쓸한 얘기들이 들렸다. 그런 말을 듣고도 도리가 없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만 부글부글 끓는다.
 
 동북공정이든 서남공정이든 북방공정이든, 중국의 그런 정책적 문제가 역사적 맥락을 저버리고 진행되고 있다는 데 이르러선, 그것도 명백한 과거사를 왜곡하고 주변국들의 역사인식과 충돌을 불러일으키면서까지 자국 위주의 국가주의적 정책을 노골화하고 있는 데 대해선, 이해당사자인 민족국가의 한 시민으로서 뿐만 아니라, 화해와 통일의 방향으로 세계사적 방향을 추동시켜 나가야할 소이를 담지하고 있는 세계적 시민의 일원으로서, 궁극적으론 우주적 주권의 한 담지체로서, 결코 묵과할 수만은 없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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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0만 평방킬로미터인 남한 면적의 70%에 달하는 7만 평방킬로미터가 이곳 백두산의 바닥 면적이라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가고가도 끝이 없는 언덕길을 따라서 우리를 태운 차는 달리고 있다. 그만그만한 높이의 언덕을 달리는 차창 너머로 나와 같은 동포들이 살고 있을 듯이 보이는 산간마을의 집들과 살림의 풍경들이 지나친다. 간간이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궁이와 그 곁에 가지런히 쌓인 장작더미들이 살뜰스레 보인다. 수레를 끌고 가는 낯이 익은 듯한 사람들과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는 속절없는 아이들이 그림 속 고향 풍경 같다. 겨울 한 철 그곳에 묵을 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길은 끊길 듯 이어지고, 그 이어지는 길 따라 해발의 고도도 점차 높아지고 있고, 시선이 닿는 지평도 점점 멀어지고 있다.
 길과 길, 사람과 사람, 사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저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일가친척과 친구가 있고 생업이 있다. 희노애락을 춤추며 더 나은 내일을 꿈꾼다. 지금, 여기를 숨 쉰다.
 나는 순간, 반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개마고원의 언덕을 달리는 듯 착각에 빠진다. 우리를 실은 차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따로 없이 단조롭고 길게 늘어선 길을 통과하며 한없이 달린다. 영산 백두산을 오르는 길은 결코 까마득한 절벽을 수직으로 오르듯 가파른 등정을 눈앞에 보여주지 않는다. 얼마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렸을까. 우리를 싣고 가는 운전수가 갑자기 뭐라고 소리를 친다. 운전수의 손끝을 따라가 보니, ‘이도백하’의 간판들이 여기저기 늘어섰다.
 
 잠시 멈추어 섰다. 이곳이 백두산 아래 첫 마을인 이도백하였다. 눈앞을 흐르는 강물이 천연스럽다. 백두산 꼭대기 천지의 시원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지금 이곳을 흐르고 있다. 이곳의 해발이 700미터쯤이란다. 앞으로도 2천 미터는 더 올라가야 한다.
 얼마 가지 않아서 드디어 백두산 산문이 나왔다. 절간의 산문처럼 이곳도 산문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부턴 이미 노상에 잔설이 상당히 쌓여있다.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현지 사람들이 갈 만하니까 가지 않겠나, 그냥 이곳 사람들에게 맡기고 눈앞에 들어오는 풍경들에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지 않는 것처럼 달리고 달렸다. 마침내 차는 장백폭포로 가는 아래 관광 지구에 멈춰 섰다. 여기가 목적지다. 주변을 둘러보니 호텔 등속의 간판들이 넓지 않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올라가는 길목을 지키는 장사들이 너도나도 호객을 한다. 호객 행위가 보아줄 만할 때도 있다. 좀 시끌벅적해야 살판난다. 보기에도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개울에다 계란을 담가놓고 파는 사람들, 우리도 그 신기로운 광경에 한눈을 팔고 계란을 사먹어 본다. 기가 막히다. 장백폭포 아래서 분출하는 유황온천수에 담가 찐 달걀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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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지로 향해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오르는 길의 도중 장엄한 장백폭포의 위용을 목도한다. 눈을 뗄 수 없다. 천지의 시원에서 용솟음쳐 오른 물들이 물길을 이루어 낙차 큰 폭포로 떨어지는 시원스런 광경이라니. 오는 길에 쌓인 피로를 한눈에 씻어 내리는 듯. 안근이 청정해진다.
 이어지는 상행 길은 그야말로 심장 약한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길이다. 보기에도 아득한 꼭대기를 향해 끝없는 대열을 이루어 오르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도 안간힘을 써서 오르고 또 오른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이들도 간간이 보인다. 좁은 계단의 돌길을 오르고 오르며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바로 머리맡에서 갑자기 ‘야호’ 하는 누군가의 탄성이 터진다. 그 소리에 놀라 나는 본능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천지를 바로 앞둔 투명한 하늘이 나의 눈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눈앞에서 파란 하늘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그 감동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하늘 빛깔을 무엇에 비유할까. 튕기면 쨍하고 금이라도 갈 듯. 투명하디 투명한 하늘빛이 금방이라도 툭 터져버릴 것 같은 내 눈망울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궁창의 하늘에서 나는, 하늘 빛깔 밖의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 하늘 밖의 어떤 세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 그것은 내가 여태껏 보아온 하늘이 아니었다. 하늘이라는 내 속의 관념을 초탈한 바로 그런 하늘, 하늘 아닌 하늘, 그 푸르디푸른 쪽빛 하늘에서 나는 천지를 보았다. 바로 천지가 하늘빛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천지는 눈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머리에 빛으로 쏟아져 들어와서 섬광처럼 휘돌아 그 빛에 나를 감싸들고 있었다. 그 희디흰 빛의 광휘 속으로 내 온 존재가 빨려 들어가는 듯, 아니 존재랄 것도 없이 나는 그저 밝은 하나의 빛의 기둥이 되어 그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오, 투명한 빛깔로 빛나는 얼음기둥, 밝음의 빛조차 감추어 들여서 안으로 꽁꽁 얼어붙은 얼음조각처럼, 나는, 무형상의, 무색의, 무성의, 무미의 무촉각의,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육식(六識)을 놓아버린 아뢰야식, 마치 그대로였다. 
 
 그 후로 천지의 하늘은 내 속에 들어와 나와 하나가 되었다. 줄곧 어느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고서 내 안에서 나를 숨 쉬고 있는.
 
 우리는, 그리고 거기 올라온 모두는 천지의 현현(顯現)을 두고 환호했다. 모두 그 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마치 그 품에 풍덩 뛰어들기라도 할 듯, 한달음에 내달려서 탄성을 질러댔다.
 천지의 못가에 다가가서 손을 담그고 얼굴을 씻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투명한 이슬방울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속울음을 참고 있었다. 감격과 환희,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참아내야만 했던 고통과 비애의 현실, 그 너머의 고독한 실존, 갈라지고 무너진 공동체, 신음소리들.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그 흔연한 새소리들에도 한번 터진 눈물샘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천지의 샘가에서 벌어진 한바탕 축제를 비껴서, 나는, 차웁디차운 눈 쌓인 언덕 한켠을 배경삼고 앉았다. 남도의 겨울엔 느껴볼 수 없는 매서운 바람 한 줄기 날아들어 얼굴을 때린다. 깜박거리는 눈까풀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조차 영롱스레 빛나던 시간, 나는 눈을 감았다.
 
 장마당에서 들려오는 듯한 시끌벅적한 세음(世音)이 마음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생존을 부르는 소리들과 욕망을 자극하고 좇는 소리들이 귓전에 부딪쳐 내린다. 누구로부터 온 것인지 모를 고통과 신음소리들이 마음의 강물을 따라 줄지어 흐른다. 버들강아지 춤추는 사이로 바위틈 비낀 시냇물 졸졸졸 흐르고, 물살을 거슬러 오른 빛깔고운 산천어들이 저들의 한때를 유유하게 노닐고 있다. 돌 틈에서 가재를 찾던 눈길 하나, 어디선가 불어오는 실바람에 한 길 제 속마음을 들킨 듯 자세를 고친다. 
 
 한 마리 나비의 꿈속 같은 세상의 소리들이 꿈결처럼 들려온다. 한 겹 한 겹 접혀 들어가는 탐조의 빛 따라 벗겨져 나오는 층층의 소리들, 그 소리들 속에 켜켜이 쌓인 욕망들, 욕망에 가려진 무지의 시간들, 몸과 입과 생각이 지어온 습기들, 세음의 바다엔 온갖 시내와 강물들로부터 흘러들어온 희노애락의 물결들이 그닥그닥 출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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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흡의 기운이 닿는 지점으로부터 하얗게 피어오르는 한 점 밝은 빛이 오랜 시간을 두고 대지를 감싸고 있다. 묵은 땅 오랜 연원의 고토로부터 길어올려진 물길은 하늘 아래 천지에 젖줄을 대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듯 땅속에서 솟은 듯 하늘의 못을 샘솟는 천지의 혈(穴)에선 여의주를 얻은 잠룡이 청천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듯 끝없이 하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천지의 못가에서 한동안의 노님을 유유히 즐기던 일기(一氣)가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서니, 각각의 등허리의 관문을 지키던 경비들이 꽃을 바치며 제 자리를 내어준다. 일거에 미려와 협척을 통과하고 옥침에 올라서니, 다시 천지를 덮고 있는 그 하늘에 이른다. 니환궁에 배알하고 호흡을 조절한다. 수면 위를 감돌던 바닷바람이 해일을 일으키니 붕새는 그 바람을 타고 수만리길 펼쳐진 구름이 되어 날아오른다. 구름을 뚫고 솟구친다. 다시 천지를 덮고 있던 그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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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라에서 백두까지 남과 북, 좌와 우를 돌고 돌아, 조국의 등골을 밀밀하고 관관하게 통과하여, 손 맞잡고, 어깨 걸고, 눈빛 교환하며, 한스런 철의 장막 걷어내고 마침내 도달하고 싶었던 그곳 영산의 샘가에 앉아서, 나는, 내 속에 내려앉은 하늘을 친견하고 있었다.
 
 내가 거기 앉아 있는 것,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기적이었다.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 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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