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을 다 풀고 부드러움의 세계로 민웅기의 수련일기

민웅기 수련일기 16/물안개 낀 토굴에서 참장공 수련

 

왜 토굴이라고 할까? 여러 해 전까지만 해도 멀쩡한 집을 두고 토굴, 토굴 하는 사람들을 두고 내가 품은 의문이었다. ‘암자’와 ‘토굴’과 ‘동굴’ 사이에서 내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세 가지 주거(?) 형태의 차이를 궁금히 여겨왔으나, 묻지는 못 했다. 그러던 차, 이곳저곳을 떠돌다보니 저절로 그 차이를 알게 되었다.
 암자란 작은 규모의 절을 말한다. 명실공히 사찰이 갖추어야할 것들을 다 갖춘 게 암자다. 다만 규모가 작을 뿐이다. 종교적 기능도 한정되어 있고, 주석하는 스님들의 수효도 적다. 도량(道場)이 단출하고 적정(寂靜)하나 수행의 본래적 쓰임을 다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흔히 토굴이라 하면 일반인들은 동굴이나 땅굴을 생각하기 쉽다. 동굴은 상고시대의 혈거(穴居)와도 같은 곳을 말한다. 언덕의 좋은 곳을 뚫어 만든 터널 같은 공간이다. 혹은 산중의 바위틈에 형성된 굴속 같은 걸 두고 동굴이라고 한다. 보통 도사들의 수행처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에 비해 ‘토굴’은 보통 1인 수행처를 일컫는다. 흙집으로 만들어져 작고 간단하다. 조그마한 오두막 같은 곳이다. 흙으로 지어진 굴속 같은 집, 그러니 토굴이다.

10002.jpg » 태극권 수련하는 민웅기
 
 규모 있는 사찰들에선 의례와 규율과 교육, 그리고 수행과 문화와 포교가 복합적이고 다기능적이며 규모 있게 전례 된다.  이에 비해 암자나 토굴은 몸집이 작은 까닭에 큰 규모의 사찰에서 누릴 수 없는 이점들이 있다. 수행자의 입장에 따라서 암자나 토굴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숨 쉴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와 수행, 집중과 자유가 이곳에선 충분히 보장된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행과 삶을 오롯이 누릴 수 있다.

정업사 4.jpg » 정업사 토굴
 
 작고 단박한 데서 오는 자유로움은 토굴생활을 꿈꾸는 자들의 로망이다. 그리고 이런 원시적 오두막의 시공을 통해서 수행자는 자기만의 인생의 기로에 주어진 어떤 터널을 통과해 간다. 자신과의 싸움에 승리하기 위한 길에서, 수행자는 바깥세상의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부담과 압박으로부터 벗어난다. 종교내부의 정치적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다. 경전과 계율의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독창적 이해와 해석의 지평을 확보한다. 밀려오는 외부세계의 강요와 강박, 소음 등속을 차단하니, 내 앞에 오롯이 열리는 참된 고독의 세계에 전면적으로 마주한다.       
 
 나를 방해하는 바깥의 온갖 장애를 치우고 나니, 내면으로의 여행길이 환히 열린다. 눈앞을 아른거렸던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업과 직장의 동료들이 한 순간에 물러가고, 그 자리에 내면의 켜켜이 쌓인 묵은 의식들이 고개를 내민다. 보이는 바깥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 매달려온 세월이 얼마던가. 젖 먹던 힘까지 다 끄집어내어 썼던 세월에 너는 무엇이었는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소유하며, 무엇을 욕망해왔는가?
 
 토굴 주변의 풀들을 메고 앞마당의 거친 돌들을 제거하여, 태극권 수련에 좋도록 터의 높낮이를 반반하게 맞춰나간다. 이런 일엔 천부적인 소질이 있고말고, 피식 웃는다. 먹을거리만 안정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이곳의 생활에서 나무랄 일은 없다. 안정, 이 놈은 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붙는다. 현대철학의 거두인 화이트헤드는 그의 강연록인 <이성의 기능>에서 말했다. 안정과 리듬을 타는 것은 쇠락의 조짐이라고. 끊임없는 도전과 실천, 자기변신을 통해서 이 뜻 모를 쇠락의 길로 나를 재촉하고 몰아세우는 ‘안정’이란 이 넘을 깨부숴야 해.
 
 이곳의 본찰인 정업사 공양간을 이용하면 안정된 세끼 식사를 확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난, 여기서도 한발 비켜가기로 했다. 나만의 세계를 방해하는 어떠한 요소도 허용하지 않기로. 번거로운 출입을 일삼다보면 모처럼만에 구가한 청정의 시공이 방해받을 건 뻔하다.
 괜한 고집을 피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신간편한 일이지 싶다. 고개를 들어 눈앞에 펼쳐진 하늘을 바라본다.
 
 물기 젖은 이슬방울들이 온종일 산허리를 감싸고 있다. 진경산수화 한 폭을 보는 듯하다. 걸망하나 걸치고 시절을 유랑하니 밝은 전망의 아침을 맞는 때가 많지 않다. 내가 머무는 곳, 그곳이 선계일 뿐이다.
 이곳의 일기는 늘 이랬다. 옷을 빨아 널어도 며칠을 그대로 있다. 해가 비친 듯 비가 오는 듯 일기가 늘 그 모양이다. 빠삭하게 빨래가 말라본 적은 지금 내 기억엔 한 번도 없다.

정업사 3.jpg » 안개낀 정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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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 그게 더 좋다. 밖의 날씨가 화창하면 사람들은 소풍가는 기분이 된다. 양기가 한번 발동하면 봄날 처녀 가슴 울렁울렁 거리듯 꽃과 나비를 찾아 마음은 이미 밖으로 출타하고 없다. 이상하게도 수행자들이 머무는 처소엔 늘 운무가 자욱하다. 이렇게 안개 자욱한 산중에선 화창이 개인 봄날의 마음상태와는 사뭇 다르다. 마음은 밖으로의 출입을 삼간다. 다만 안으로 침잠한다.
 
 서안의 거리는 건조했다. 연중 강우량도 매우 적어 물문제가 상당히 심각하다. 그런데 이곳 토굴의 산상은 늘 촉촉한 날씨에 물안개에 젖어있다. 나의 감성도 따라서 늘 촉촉하다. 촉촉한 감성마저도 잊고 눈을 감으면 여기가 바로, 선계(仙界)다.
 
 나의 부실한 하체에 대한 스님의 특별 처방전은 그 비결이 ‘참장공’ 수련에 있었다. 두 발을 어깨넓이로 하여 무릎을 약간 구부린다. 구부리나 허리는 반듯하게 한다. 겉모습으론 마치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의자를 빼내버린 것처럼 엉거주춤 선다. 두 팔은 가볍게 어깨높이로 들어 올리고, 힘을 뺀 상태에서 두 손바닥 중앙의 장심이 하단전을 향하게 한다.
 
 턱은 단정히 끌어당긴다. 척추는 부드러운 일자로 하늘과 땅을 이어 준다. 머리끝의 백회는 하늘을 향해 우러르니 하늘 기운에 닿는다. 꼬리뼈 지점의 미려혈은 땅 아래쪽으로 뿌리를 내리니 땅 기운을 빨아들인다.
 두 발바닥의 중심인 용천혈은 땅속에 그 심을 깊이 박은 듯 흔들림이 없다. 두 손바닥의 장심혈과 두 발바닥의 용천혈, 그리고 하단전, 이렇게 다섯 개의 구멍이 하나의 기운을 통하듯 바로 선다. 오궁합일(五宮合一)이 완성된다.

 
 겉모양새의 관건은 척추의 바른 자세에 달려 있고, 속 마음가짐의 핵심은 ‘방송(放松)’에 있다. 이 방송의 요령을 터득하는 데 참장공과 태극권의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러므로 태극권이든 참장공이든, “松(송)으로 들어가서 松(송)으로 나온다.”
 ‘시작도 방송, 완성도 방송’ 이라는 표현이 적확한 표현이 된다. 하여, 태극권의 구결엔. ‘부드러움 속에서 강함이 나오고, 강하지 않으면 부드럽지도 않다.‘ 는 역설이 성립한다. 노자가 말한 ‘柔勝强(유승강)’, 즉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의 꿍푸적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방송’을 성취할 것인가의 문제가 이제부터 나의 태극 참장 수련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다.
 
 “태극권을 수련할 때 온 몸을 다 풀어놓네.
 호흡은 자연스럽게 하고 생각을 배꼽아래에 두네.”
 (練太極時 全身放松 呼吸自然 存想臍下)
 
 “가슴은 안을  듯이 하고, 어깨는 낮게 팔꿈치는 아래쪽으로 늘어뜨리네.
 척추는 방송되어 소나무처럼 곧게 드리워 있고, 꼬리뼈는 살짝 당겨 정중앙에 있네.”

  (含胸拔背 沉肩捶肘 松沉直竪 尾閭正中)

 

  

  글 민웅기(<태극권과 노자>저자,송계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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